젓가락질
스티브는 당황했다. 그는 냅킨으로 서둘러 셔츠에 묻은 붉은 점들을 닦아냈다. 이게 뭐라고 했더라. 고추장 소스랬던가? 잔뜩 헤집어놓은 그릇 안에는 아직 반도 먹지 못한 면발과 야채들이 들어 있었다. 입안은 얼얼하고 벌써 물만 네 컵째 들이킨지라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았다.
"오웃, 절경이로군. 어딜 여행해도 이같은 광경을 볼 수 있을까!"
맞은편에서 스타크가 이죽거렸다. 스티브는 그를 쏘아보곤 다시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들기가 무섭게 젓가락 한 쪽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토니 스타크는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티브는 한숨을 쉬었다. 점심 초대에 응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긴 속눈썹을 내리고 잠시 화를 참았다.
2시간 전, 막 잡은 범죄자를 경찰에게 넘겨준 스티브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토니 스타크였다. 그는 평소처럼 가볍기 짝이 없는 말투로 그에게 앞으로의 스케줄을 물었다. 하던 일 계속 하고 있을 거라고 얘기했더니 "별 스케줄 없네. 점심이나 먹지."라며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해왔다. 거절의 말을 하기도 전에 연락을 끊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티브는 이국적인 이름의 식당을 약속 시간에 맞춰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단이다.
"캡, 결식아동을 생각하며 이 음식을 낭비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음식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주제에 잘도 복지를 논하는군."
스티브는 베시시 웃는 토니의 얼굴을 한 번 흘겨보곤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몹시 매운 듯 얼굴이 붉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쫄면에 젓가락을 박았다. 고아로 자랐고 군인으로 40년대를 보낸 그가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쇠젓가락을 사용하는 한식 - 그 중에서도 메뉴가 쫄면정도 되어서야, 그가 고전하는 것도 당연했다. 붉은 소스로 미끌거리는 면발을 가까스로 집은 스티브는 신중하게 그것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면발이 미끄러지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는 손가락에 힘을 줬다.
우그럭.
토니는 순간 먹고있던 불고기를 내뿜을 뻔 했다. 그것은 마치 스티브 로저스가 캡틴 아메리카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피터 파커가 캡틴 아메리카의 움직임에 대해 표현한 '부드럽고, 빠르고, 치명적이고 민첩한 발레. 그리고 강력하기도 한' 구절 그대로 부드럽고 빠르고 치명적이고 민첩하며 우아하고 강력한 손길로 그는 쫄면을 집어든 젓가락을 우그러뜨렸다. 물론 쫄면은 그릇 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 젓가락 값은 변상해야겠지."
토니 스타크는 그의 미간 사이의 주름을 보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그를 흘끔흘끔 쳐다봤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와중에 스티브의 '젓가락' 발음이 너무나도 훌륭해서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젓가락 발음만큼 젓가락질을 좀 잘 해봐! 천하의 수퍼솔저가!"
"그래, 자네 체술만큼 내 젓가락질이 엉망이란 건 인정하지."
그는 식탁 구석에서 새 젓가락 한 쌍을 꺼냈다. 토니는 낄낄 웃으며 그의 젓가락을 낚아챘다.
"이러다 점심이 저녁 되겠어. 내가 먹여주지."
"...... 새 메뉴를 시키는 게 낫지 않겠나?"
"음식쓰레기가 환경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거야, 캡?"
토니의 정론 아닌 정론에 스티브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입을 벌렸다. 토니는 능숙한 젓가락질로 쫄면을 들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스티브는 면발을 빨아들인 다음 어색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토니는 그의 입술에 묻은 붉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리고 나의 체술이 그렇게 엉망인지는 침대에서 가늠해보는 게 어때?"
스티브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며 켈록거렸다. 콜? 대답을 재촉하는 토니의 눈빛을 외면한 채 스티브는 아주머니를 불러 포크를 달라 주문했다.
덕분에 그는 어색한 젓가락질에서는 해방될 수 있었으나 정색하는 토니를 달래느라 3시간을 쇼핑에 동참해준 다음 양쪽 팔에 백을 주렁주렁 매단 채 자신의 방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토니는 다음번에 중식당으로 스티브를 불렀을 때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하는 그를 발견하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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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리퀘받았던 것. 어설프게 면 먹는 스티브.
원래는 포크로 파스타를 어설프게 먹는 스티브를 보고 싶다는 뉘앙스였지만, 그래도 서양인인데 파스타를 못 먹어서 고생하는 스팁은 좀 애매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젓가락질로....... .............
4개국어도 하는데 포크질쯤은 잘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뭐 그냥 그랬다고요. 연성을 전혀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최근엔 소비러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