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용으로 쓴 글입니다.
공미포 9249자
카케히로. 히로가 카케루에게 반하는 내용입니다.
그날은 유난히 맑은 날이었다.
앞으로 쥬오인 그룹을 책임질 후계자로서 쥬오인 카즈오는 본사 빌딩을 방문했다. 스케줄에 따라 직원의 안내를 받고 본사 주요 부서들을 돌아봤다. 일하던 직원들은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한-비록 정장을 빼 입긴 했으나-카즈오를 힐끗 보곤 다시 일에 집중했다. 직원들은 이미 카즈오가 올 것이란 것을 주지 받은 듯했다. 한 명 정도는 다가와 “무슨 일이니? 길을 잃은 거니? 보호자는 어디에 있니?”라고 물어볼 만도 했건만 다들 그의 존재를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괜히 눈에 띄었다가 불이익을 받느니 가만히 있는 게 동양인의 미덕이었다. 카즈오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장실로 가는 길엔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복도는 고풍스럽고 딱딱한 디자인이었지만 벽으로 막힌 그늘을 벗어나면 한쪽 전면이 티 한 점 없는 유리로 되어 햇볕에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간간이 있는 유리의 이음새로 빛이 투영되어 붉은 바닥에 얇고 가는 일곱 빛깔의 프리즘 기둥을 만들었다. 카즈오는 그 복도를 걷는 동안 마치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늘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햇볕이 모든 것을 따스하게 비추고 푹신한 카펫이 모든 소리를 잡아먹었다. 창밖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고요히 존재하고 있었다. 카즈오는 하늘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 창밖으로 누군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나이가 든 사람이었다. 카즈오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외롭고, 괴롭고, 무서운 얼굴이었다.
“보면 안돼!”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직원이 카즈오의 눈을 가리며 복도 안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시야가 차단된 그의 귀로 직원의 불안한 숨소리와 이를 악 다문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카즈오는 이어서 틀림없이 둔탁한 충격음과 비명 소리가 들려올 줄 알았다. 적어도 누군가 뛰어와 상황을 알리는 고함 소리라도 들릴 것이라 생각했다. 불안감에 카즈오는 눈을 꼭 감고 직원의 품에 의지했다.
그러나 기대한 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5분쯤 지났을까? 복도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평소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품위가 있었다.
카즈오를 놓아준 직원은 이사장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길 망설이고 있었다. 원래의 스케줄대로라면 그를 이사장실로 안내하고 벌써 자신의 부서로 복귀했어야 했다. 하지만 투신자살이 일어난 상황에서 어떤 연락과 지시가 오가고 있을지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문을 두드려도 되나 직원은 한참을 망설였다. 카즈오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나긴 시간이 지나고 이사장실 문이 안쪽에서부터 열렸다. 풍채가 당당한 노인이 카즈오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왔니, 카즈오? 혹시 험한 걸 보진 않았겠지? 할애비는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의 거친 손이 카즈오의 정수리를 헝클었다. 그리고 그는 직원에게 낮은 소리로 지시했다.
“경찰보다 기자가 먼저 올 테니 얼른 카즈오를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나가게! 지금 당장!”
그의 지시는 명료하고 단호했다. 직원은 카즈오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돌아본 할아버지의 얼굴엔 피로의 그늘이 져 있었다.
카즈오는 집으로 돌아와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몇 달 전 실각한 전무의 라인으로, 이전에는 꽤나 중요한 일들을 맡아 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직급은 차장으로, 전무가 실각한 이후부터는 아무런 일거리를 받지 못 했고 자리는 사무실 구석 화장실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이동되었다. 부서는 1인 부서였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아무도 함께 밥을 먹어주지 않았다. 가족들은 자녀의 유학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다고 했다. 그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했다고 한다.
“안 되는 걸 알면 차라리 빨리 포기하고 나가버리지! 죽는 것보단 그게 낫잖아! 집에 눈치 볼 사람도 없구만 왜 붙잡고 있다가!”
어머니는 혀를 찼다. 너무 매정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차라리 모두 놔버리고 쉬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집을 팔고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갔어도 좋았을 텐데. 혹은 자녀들의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방법도 있었다. 무엇이든 죽음보다 나쁜 것은 없었다. 카즈오는 유리창 너머로 봤던 얼굴을 떠올렸다. 외로운 얼굴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카케루는 자신의 방을 찾아온 히로를 반갑게 맞이했다. 히로는 킹컵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얼굴에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그가 그렇게 피로를 달고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지만 카케루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워낙 큰 일을 치른 직후였다.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자신의 방을 찾아올 때 히로의 목적은 보통 세 가지로 압축되었다. 1.게임이거나 2.프라모델 조립이거나 3.구하기 힘든 프리즘쇼 블루레이 감상 중 하나거나 둘이거나, 혹은 셋 모두 해당되었다. 때론 후배 주제에 너무 좋은 침대에서 자는 거 아니냐며 가끔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아주 가끔뿐이었지만. 그가 침대에서 낮잠 자길 원한다면 자신은 게임이나 하며 침대를 내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모처럼 휴일인데 여기 오셨네요. 게임이라도 할까요?”
카케루가 말을 꺼내자 익숙한 듯 히로가 TV대에서 콘솔용 게임기 패드를 두 개 꺼냈다.
“뭐 새로 산 거 있어?”
“글쎄요. 2인 되는 걸로... 아! 좀 옛날 게임 해볼까요? 괴혼이란 건데.”
“아, 왕자가 굴려서 덩어리 붙이는 거?”
히로가 아는 척을 했다.
“아시나봐요?”
“그런 게 있다는 것 정도는. 엄청 오래된 거 아냐? 플스2?”
“잘 아시네요. 그걸로 할까요? 아니면 평소처럼 철권이나 길티기어로 할까요?”
“아냐, 괴혼 해보자.”
히로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 게임이 딱히 내켜서라기보다는 다른 선택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한 것 같았다. 카케루는 게임 소프트를 챙기러 히로의 옆에 앉았다가 의아한 얼굴로 그의 옆얼굴을 봤다. 확실히 격투 게임은 기력을 소모한다. 피곤할 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여기 왜 온 것인가?
“1인용이라도 괜찮으면 니어 오토마타라도 할래요? 아니면 한숨 잘래요?”
카케루가 슬쩍 잔다는 선택지를 내밀어 봤다. 그러나 히로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는 싫어. 괴혼 하자.”
“좋은 선택이에요!”
히로의 대답에 카케루는 깊숙이 넣어둔 플레이 스테이션2를 꺼냈다. 주섬주섬 TV와 게임기를 연결하는 그의 뒷모습을 히로는 멍하니 앉아 쳐다봤다. 눈동자엔 조바심과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
“다 연결했으니까 켜면 돼요. 난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어, 어어...”
카케루는 뭘 마실지 묻지도 않고 방을 나섰다. 히로는 게임기를 켜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믿음직해 보일 때가 많았지만, 때론 너무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킹컵 직전이 특히 그랬다. 오죽했으면 아직 초등학생 같아 보이는 유우가 그를 걱정할 정도였다.
카케루 본인은 그때 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안심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도망은 차라리 괜찮았다. 그런 이들은 어떻게 되든 삶을 이어나가기는 한다. 비참한 인생이든 다시 빛나는 인생이든. 카케루는 추락 자살 사고 이후로 몇 건의 자살 사건을 더 접했다. 거래처의 거래처 사장의 자살, 라이벌 업체 연구실 직원의 자살, 하청 기업 노동자의 자살... 다행히 쥬오인 홀딩스는 카케루가 목격했던 자살 사건 직후 이사장이었던 할아버지가 책임지고 사퇴하면서 자살 방지를 위한 시스템을 공고히 해둔 덕분에 일 문제로 자살하는 직원은 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카케루는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트라우마처럼 뇌리에 남아 그와 비슷한 표정을 발견하면 언제고 튀어나와 우울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쩌라고. 그렇다고 내가 뭘 해줄 수 있단 말이야? 돈? 그래서 돈을 주면 그 뒤는 어떻게 되지? 당장의 위기를 피하더라도 스스로 설 의지와 능력이 없으면 일회성 도움은 그들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아. 오히려 그들은 내게 의존하려 하고 지속적으로 돈을 달라 하고 스스로 일어설 기력을 잃게 되지. 내가 그런 꼴을 한두 번 본 줄 알아? 투자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거야. 차라리 빨리 넘어져 버리는 편이 그들에게 훨씬 나아. 카케루는 시니컬한 얼굴을 하고 그에게 대꾸했다. 차라리 도망쳐버려!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가 때로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카케루에게는 없었다. 특히나 히로에게는 더욱 그랬다.
기숙사 식당 냉장고에서 음료를 두 개 꺼냈다. 히로가 늘 마시던 것과 자신의 것. 소음 때문에 방에 들이지 않았지만 이럴 때는 조금 아쉽긴 했다. 자신의 방을 찾아온 히로를 혼자 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내가 마시던 걸 알았어?”
음료를 건네받은 히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거 있으면 늘 이거 드셨잖아요.”
카케루는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히로는 건네받은 음료를 잠시 매만졌다. 그 모습에 카케루는 아차 싶었다. 자신이 히로에게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 음료가 어디서 났느냐는 질문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것과 히로가 좋아하는 이 음료는 때가 되면 카케루가 챙겨뒀다. 히로가 마시고 싶을 때 어디 헤맬 필요 없이 여기서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냥 마시는 게 불편하면 나중에 자신에게 돈을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자신이 챙겨뒀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기숙사 냉장고엔 항상 이게 있구나 하고만 생각해주길 바랐다.
“저도 좋아하거든요.”
카케루는 안경을 밀어올리며 덧붙였다. 히로는 웃었다.
“고마워.”
둘은 게임을 시작했다. 시나리오는 손톱만한 크기의 왕자가 술 마시고 필름이 끊겨 별을 부순 부왕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 별을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시작에 둘은 약간 웃었다. 그리고 작디 작은 왕자는 자기 몸보다 큰 구체를 굴려 물건들을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책상 위에서 문구류를 붙이면서 시작되었다. 압핀, 지우개, 메모지, 작은 장난감 등을 붙여갔다. 그리고 둘은 곧 거리로 나갔다. 온갖 것들이 붙었다. 펜스도 붙이고 맨홀 뚜껑도 붙여 덩치가 커지고 무게도 불어난 덩어리는 곧 사람도 붙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붙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덩어리는 또다시 사람들을 붙이고 붙이고 또 붙여서 더욱 더 덩치가 커졌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젖소도 황소도 자동차도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갔다. 둘은 웃었다.
“그러고보니 이거 제목이 『카타마리(덩어리) 다마시이(영혼)』였지?”
유원지의 관람차를 붙일 때 즈음 해서 히로가 물었다. 아직 건물을 붙이던 카케루는 여유 없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했다.
누가 더 큰 덩어리를 만드냐 경쟁은 결국 섬을 넘어 크라켄까지 붙인 히로의 승리로 끝났다. 카케루는 앓는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히로는 하하 웃었다.
“한 판 더 해?”
히로가 묻는 말에 카케루는 손사래를 쳤다.
“좀만 쉬었다 해요. 기력 회복할 시간을 줘요.”
카케루의 말에 그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누워서 쉬는 카케루의 얼굴을 힐끔힐끔 보았다. 카케루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깊이 한숨을 쉬고 술렁대는 가슴을 도닥였다. 그와 함께할 때면 항상 이랬다. 정신 차리자, 카즈오. 이런 마음을 가져도 되는 상대는 자신과 다른 성별을 가진 생명체야. 지독하게 연습벌레에 향상심의 화신 같은, 그렇지만 가끔은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고 싶어지는 같은 성별의 선배가 아니라. 스스로 되뇌인 생각이 조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카즈오”는 효과가 좋았다.
“있잖아.”
히로가 운을 떼는 소리에 효과가 다 날아가 버렸지만. 카케루는 태연을 가장하기 위해 조금 긴장하며 그를 올려다 봤다. 그의 표정에도 긴장의 흔적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그는 말을 망설이다 입을 다물곤 표정을 전환시켰다.
“도대체 이 게임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무생물이고 생물이고 사람들이고 전부 모아서 별을 만든다는 발상이라니!”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말 돌리긴. 카케루는 약간 섭섭함을 느끼며 허리를 일으켰다.
“글쎄요, 외로웠던 것 아닐까요?”
“외로워서?”
“다들 사무치게 외로워서, 외로워하는 흩어진 사람들을 강제로라도 모아 구르고 구르다보면 외롭지 않을 거야. 그렇게 굴러가다 보면 위대함도 태어나겠지. 그런 거 아닐까요?”
“인류보완계획 같은 말이잖아?”
히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니 이해는 되네.”
그는 쉬는 동안 타이틀로 돌려놓은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케루는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외로움은 그에게 특히 사무치고 극복하기 어려운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가 오버 더 레인보우 멤버들을 대하는 태도에 그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사업은 동향 분석이고 눈치 싸움이었다. 오랜 기간 경영에 몸을 담가온 카케루에게 히로의 허세는 마치 통유리로 된 카페의 벽 같았다. 안이 훤히 보이지만 자신은 바깥에 서서 그저 보기만 한다.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 카페에 자신이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도 드러내지 않은 채, 누군가 카페에 대해 말을 걸어오면 그가 바깥에 내놓은 메뉴판의 안내 글귀에 대해서만 얘기한다. 결코 자신이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카케루는 히로를 그렇게 대해왔다. 다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가끔은 죽도록 외로워도 혼자 끌어안고 있기만 해서 옆에서 도와줘야만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까요.”
카케루는 오늘 그에게 완곡하게 자신의 관심을 슬쩍 드러냈다. 히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말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한테 실망했어?”
순간 카케루는 숨을 멈췄다.
“네? 킹까지 되어놓고 그 무슨 말씀이세요??”
“비꼬는 거야?”
“아니,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어서 하는 말이에요.”
“너...”
히로는 한숨을 쉬었다. 카케루에게 그는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킹컵 전 잠적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이후 훈련을 같이 하면서 이전보다 후배들과 훨씬 친해졌는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케루는 그게 신기했다. 그를 보는 후배들의 시선이 킹컵 이전과 이후로 얼마나 달라졌는지 당사자가 눈치를 못 채다니. 이전엔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막연히 ‘저 사람은 잘 하는 사람’, ‘원래 대단한 사람’ 같은 평가를 받았다면, 지금은 훨씬 뜨겁게 지지와 열망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대고 “나에게 실망했어?”라니, 자신을 몰라도 얼마나 모르는 사람인가. 카케루 자신이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기는 쉬운 사람이지만 이해는 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히로 선배는 필요한 때 필요한 걸 한 거예요. 그러니 실망할 이유도 비난할 마음도 없어요.”
상대가 다른 사람, 이를테면 코우가미 타이가 같은 사람이었다면 모른 척 말하기 싫어하는 그 연유를 굳이 스스로 말로 하게끔 만들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히로가 꺼내기 힘들어하는 말을 굳이 꺼낼 필요가 없게끔 먼저 대답했다. 하지만 히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뭘 말하고 있는지는 알아?”
“네, 알아요. 1월에 말없이 잠적했던 거 말이죠?”
히로는 카케루의 말에 불편한 얼굴을 했다.
“히지리 대표에게도, 너희들에게도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해. 비난하는 것도 그 때문에 실망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그래서 언제든 사과를 하려고 해왔었어. 여태까지 아무말도 못 했지만.”
“흐응”
카케루는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히로가 머리 숙이는 그림을 상상하니 그다지 기분이 유쾌하지 않아졌을 뿐이었다.
“히로 선배가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말했다시피 선배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행동을 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나도 선배에게 실망할 이유도, 비난할 이유도,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어요. 다른 애들도 그럴 걸요?”
“필요한 때 필요한 행동은 약속을 이행하고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거야! 나는 에델로즈의 신뢰도를 추락시켰고 팬들에게도 불안감만 조성했어! 너희들에게도 걱정이나 끼치고... 내가 그때 코우지를 찾아갔던 걸 후회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때 내가 했어야 했던 건 그게 아니었던 거야!”
카케루의 말에 히로는 울컥 화를 냈다. 카케루도 그 말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특히 ‘그때 코우지를 찾아갔던’ 부분이 그의 신경을 거칠게 긁어댔다.
“히로 선배, 화내지 말아요. 나는 내가 생각한 걸 말했을 뿐이에요. 에델로즈의 신뢰도는 선배가 킹이 되면서 회복시키다 못해 오히려 대폭 올랐어요. 로즈 파티 때 쉬겠다고 팬들에게도 공지를 제대로 했었고, 대회 이후 여태까지 쉬지도 못 할 정도로 일했잖아요. 이 정도면 열일한 거 아닌가요?”
“결과만 좋으면 무조건 다 좋다는 식으로 말 하지마! 아니면 뭐야? 실망도 하지 않았다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야?!”
카케루는 덥석 히로의 손목을 잡았다. 눈은 히로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분노로 눈앞이 하얗게 변해가는 와중에 이성이 가장자리에서 겨우 펄럭였다. 이성의 깃발에 적힌 문구는 ‘소리를 지르지 마라, 쥬오인 카케루!’가 전부였다.
“내가 차가운 사람인 것 같나요?”
카케루가 조용히 말했다. 히로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후배의 눈을 당황해서 쳐다봤다.
“외로움과 불안을 우습게 보지 마요. 그걸로 사람이 죽기도 해요.”
히로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히로 선배가 잠적했을 때 나 좀 안심했어요. 너무 몰려있던 것 같아서. 기대와 책임과 불안과 외로움에 압사당할 것 같아 보여서. 도망쳤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죽지는 않을 것 같아서! 어쩌면 이 사람은 여기까지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죠. 그럼 거기까지가 히로 선배의 프리즘쇼 인생인 거예요. 그 뒤로는 다른 인생을 살겠죠!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카케루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돌아와줬을 땐 기뻤죠! 너무 기뻐서 정신 못 차리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뭘지 필사적으로 찾을 정도로! 그리고 히로 선배가 킹이 되었을 땐 내가 한 그 무엇도 히로 선배가 나한테 준 것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될 정도였어요!”
“카케루...”
“지금 나한테 가장 가치 있는 건 히로 선배예요! 그러니 히로 선배는 내 우상으로서 나이가 들어 연골이 마르고 닳을 때까지 잘 살아줘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내 투자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지 말아줘...요...히로...선배...”
카케루는 말끝을 흐리면서 히로의 손목을 놓았다. 말을 전부 토해내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하게 되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불이 날 것 같았다. 히로도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었다. 카케루는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을 구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 식은땀 나는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시켜야 하는데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떡하지? 히로의 약간 붉어진 얼굴에 사고가 극단적으로 날뛰었다. 표정이라도 정돈하고 싶은데 얼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목에서 끄으으 하는 억눌린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때 어쩔 줄 몰라하는 카케루를 히로가 덥석 끌어안았다.
“???!!!!!”
갑자기 얼굴이 히로의 가슴팍에 묻히는 바람에 고개가 아팠다. 히로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카케루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히로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히로의 완력이 만만치 않았다.
“나를 그렇게 조... 동경해주다니, 고맙다, 카케루! 나는 기쁘다!!”
“히로선...!”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아아! 살아온 보람을 느껴!”
히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진심? 진심으로?? 카케루는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약간의 안심과 허무함과 의구심이 한데 뭉쳤다. 그래서 어쩔 거야?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한 문제였다. 상대에게 답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약간의 좌절감과 슬픔과 자괴감이 섞였다. 그 색은 체념과 닮아 있었다.
히로가 카케루를 놓아 주었다. 카케루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눈가가 붉었다. 입꼬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부분이 그의 감동 버튼을 누른 건지 당장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카케루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히로의 손이 카케루의 팔을 잡고 있었다. 셔츠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체온이 올라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는 웃었다. 갑자기 안았던 것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카케루도 덩달아 복잡한 표정으로 웃게 됐다.
“아, 나 이제 방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코우지가 오면 신곡을 맞춰보기로 했어서...”
“아, 네.”
카케루의 대답에 히로는 서둘러 손을 뗐다. 뒤로 돌아 콧물을 한 번 삼키고는 빠른 걸음으로 카케루의 방문을 향했다. 도망가는 게 명백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카케루는 안심했다. 회피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답이 없는 문제에서는 답이 나올 때까지 잠시 도망가 있는 것이 상책인 경우도 있었다. 허리에서 힘이 빠졌다. 카케루는 뒤로 풀썩 쓰러졌다.
“도망치는 것이 상책인 경우도 있다.”
카케루는 되뇌었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 선배에게 투자한 것이 아니라 에델로즈를 구한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 선배의 가능성에 걸고 에델로즈를 구했다. 이제 에델로즈에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나는 결코 선배를 위해 프라이드를 되찾아준 것이 아니다. 핑계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카케루는 히로의 옆에 남아있기 위해 히로에게서 도망치기로 했다.
히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기타를 만지고 있던 코우지가 그를 반겼다.
“어서와, 히로.”
그러나 코우지의 인사에도 대답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침대에 쓰러졌다. 그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숨죽였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코우지는 기타를 침대 옆에 세웠다.
“무슨 일 있었어?”
히로는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베개에 고개를 처박고만 있었다. 코우지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다시 기타를 손에 쥐었다. 그때 히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그렇게 감동적인 말은 처음... 아니, 코우지한테 팀 같이 하자고 들었던 거 이후로 처음이야.”
“응?”
“울 뻔했잖아. 꼴사납게. 후배 앞에서.”
“히로,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래? 알아듣게 얘기를 해봐.”
코우지는 다시 기타를 놓고 그를 향했다. 히로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이따금씩 뭔가를 깨달은 듯 뒤통수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았다. 눈은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츠토모...!”
“응?”
“이츠토모 그룹! 얼마 전에 쥬오인이랑 계약 체결했다고 그랬지?!”
“어? 어.. 쥬오인과 프리즘 관련으로 기술 협약 맺었다고...”
“으...! 투자란 게 그거였냐고!”
히로는 머리카락을 붙잡고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주먹으로 베개를 몇 번인가 치고 좌우로 데굴데굴 몸을 굴렸다.
“왜...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쥬오인이 뭐라 그래?”
“아니...”
히로는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후배 주제에 건방지게 키다리 아저씨 같은 짓이나 하고 그걸 여태까지 입 다물고 있었던 것도 그랬고, 거기에 얹어 평소의 가벼운 말투는 어디로 가고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라느니 안위를 걱정했었다느니 고백 같은 말들을 쏟아내질 않나, 손목을 잡은 손도 쳐다보는 눈도 뜨거워서 히로는 그가 전하는 것들을 그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백억...”
히로는 중얼거렸다. ‘투자’라고 했다. 프라이드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데 드는 비용. 히로의 가능성을 믿고 에델로즈에 투자했다손 치더라도 히로가 킹이 될 수 있었을지 여부는 불투명했다. 컨디션은 엉망이었고 마음은 너덜너덜했고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단순히 에델로즈를 구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자신의 순서가 오기 전에 미리 변제해둘 필요는 없었을 터였다. 겸사겸사라고 해도 좋았겠지만, 카케루가 욱해서 내뱉은 말엔 ‘내가 원한 것은 히로 선배를 위한 프라이드 사용권’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히로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솔직히 어느 쪽이라 해도 히로에겐 대단히 기쁜 선물이 되었겠지만, 에델로즈보다도 ‘프라이드’를 선택했던 자신이었다. 말하자면 게임 전에 가져다 준 음료와도 같았다.
“어쩐지...”
왜 실격 처리가 되지 않았나 했다. 히로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귀가 빨개, 히로.”
코우지가 다가와 히로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다정한 친구의 고마운 마음씨였다. 평소였다면 이걸로 마음이 안정되었을 텐데 히로의 가슴 속 동요는 사그러들 기미가 들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대고 숨 쉬기가 힘들었다. 자신의 가치를 얘기하던 카케루의 얼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히로는 베개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갔다. 베루 때도 이런 감정이었던가? 떠오르지 않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늦겨울의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는 자그만 목련꽃봉오리가 돋아나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