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깁니다..
츠무기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왜케 길어졌짘ㅋㅋㅋㅋ
너무 길어서 퇴고가 만족스럽게 되지 못했습니다.
에이치 <- 츠무기/ 나츠메 -> 츠무기 요소 있음.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아이를 내려다 봤다. 태어난 지 이제 몇 달 되지 않은 가냘픈 아이가 쌔근쌔근 잘도 자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길게 웨이브진 머리가 아이의 얼굴을 간질였다. 아이는 잠깐 고개를 흔들었지만 다시 무방비하게 잠이 들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사랑스럽고 작은 아이의 얼굴을 쓸었다.
그녀는 그 손가락으로 아기의 목덜미를 가볍게 쥐었다. 지금은 한밤중이었다.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에도 그는 꿈쩍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목을 꺾어버릴까. 아무리 출산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녀라도 이 아이를 죽이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아이의 시체 처리는? 수사는 어떻게 벗어나지? 그녀는 아이의 목을 잡은 채 고요히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상황을 타개할 방책이 없었다. 그녀는 아이에게서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애초에 낳는 게 아니었다. 중절해버릴 것을, 유산해버릴 것을 왜 여태까지 끌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아이는 세상에 나와버렸고, 출생신고가 되어버렸고, 그녀가 낳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작은 용기의 부족으로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낳고 나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과거의 자신이 가소로워 실소가 날 지경이었다. 도저히 감당도 못할 것을 내놓은 어리석음에 한탄했다.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밀려오는 좌절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멋대로 흘렀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밤중의 침묵과 어둠 속에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숨죽여 오열했다.
사카사키 나츠메는 스커트를 펄럭였다. 치마가 바지에 비해 편한지 불편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인지 복장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딱히 없었다. 그러나 그 차림으로 댄스 학원에 억지로 다니게 된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원에 다니게 된 이유가 ‘엄마에게 신세진 사람들이 무료로 가르쳐주겠다고 해서’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이에 비해 기량이 뛰어나단 이유로 이목이 주목되는 것이 싫었다. 동네의 극성 학부모들에게 ‘재능있는 여자애’로 이리저리 소개되고 “얘가 ‘그’ 사카사키냐”는 말을 듣는 것도 싫었다. 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없었지만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시키기에 했던 것뿐이었다. 천재라는둥 역시 여자애가 빠르다는둥 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을 내팽개칠 성정도 아니었기에 꾸역꾸역 강사가 시키는 과제를 수행해냈다. 결과적으로 그게 자신의 평판을 강화시킬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재능있고 똑부러지는 어린이의 비극이었다.
그의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외동이라 그런지 또래보다 똑똑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또래보다는 나이가 더 많은 사람과 얘기 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들은 아이스케키 같은 저급한 장난을 치지 않았고 또래보다 말귀가 밝았다. 가끔 나츠메가 어린애 같은 말이나 행동을 무심코 저질렀을 때는 머리를 헝클며 귀여워했다. 귀여움 받았던 숫자가 적지 않았던 걸로 봐선 어쩌면 응석이 부리고 싶은 것뿐일지도 몰랐다.
그런 천성이다보니 그는 몇 살쯤 많은 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오는 존재가 있었다. 주로 부정적인 일로 자주 언급되었는데, ‘이상한 녀석’, ‘이상한 데서 화내는 녀석’, ‘싫은 녀석’, ‘시건방진 원장 아들’ 같은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를 싫어하는 아이는 초등 저학년부터 중학년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고학년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아이를 그렇게 정색하며 싫어하기가 좀 그런지 애둘러서 감정을 표현하곤 했지만 소수의 고학년 남자애들은 그에게 강렬한 혐오감을 내비쳤다. 나츠메는 딱히 동조하지도 않았지만 좋은 인상도 갖지 않았다. 애당초 얘기를 섞은 적도 별로 없었다.
처음 얼굴을 마주한 건 엄마와 처음 이 학원에 왔을 때였다. 원장님이 엄마와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하는 사이 ‘시건방진 원장 아들’은 도련님처럼 차려입고 우울한 얼굴로 원장의 옷을 붙잡고 서 있었다. 그 얼굴은 원장인 엄마의 얼굴을 빈틈없이 닮아서 아버지의 얼굴은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원장은 대단한 미인이었고 그 아들도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 애가 작은 아이인가요?”
“아, 네. 츠무기라고 해요. 츠무기, 엄마 일해야 하니까 얼른 수업 들어가.”
츠무기라 소개된 아이는 엄마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 원장은 당황하며 츠무기의 손을 벗겨냈다. 그리고 강사를 불러 츠무기를 교실로 데려가게 했다. 나츠메는 그 광경을 조금 기이하게 여기며 봤다. 초등학생은 되어 보이는데 어째서 저런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할까?
“아이가 사랑이 많네요.”
나츠메의 엄마가 웃으며 말하자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응석이 많은 것뿐이에요.”
첫인상은 원장의 말 그대로였다. 나츠메는 원장의 아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데 자신보다도 더 응석쟁이라고, 아직 덜 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그의 모습을 봤을 땐 조금 다른 인상을 받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학원으로 가던 도중, 도로 건너편에서 그를 목격했다. 그의 형이, 아마 5학년쯤 되어 보였는데, 그가 읽던 책을 뺏아 들고 조롱했다. 츠무기는 책을 돌려달라며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깡총깡총 뛰었지만 2학년이 5학년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를 벌였다.
약간 변화가 생긴 것은 책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던 츠무기가 결국 “돌려줘!”라며 소리쳤을 때였다. 그의 형은 움직임을 잠깐 멈췄다.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럼 뺏아보든가.”
형은 빙글빙글 웃었다. 그리고 책을 높이 들고 놀리기 시작했다. 츠무기는 다시 형의 주변을 돌며 폴짝거렸다. 그러나 이번엔 그저 책을 들고 피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형은 츠무기를 책으로 때렸다. 츠무기가 달려들 때마다 때리고 또 때렸다. 나츠메는 조금 놀라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형은 이리저리 피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듯하더니 츠무기를 발로 찼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츠무기를 형은 계속해서 책으로 때렸다.
“뺏아 보라고. 왜 못 뺏아? 못 뺏는 네가 잘못이지. 안 그래?”
나츠메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로서는 여태까지 대한 적이 없었던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츠무기는 팔로 머리를 감싼 채 길가를 뒹굴고 있었다. 길가를 지나가는 어른들은 골목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했다. 맞고 있는 츠무기는 처음 차였을 때만 비명을 질렀을 뿐, 그 뒤로는 끽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쏟아지는 폭력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츠메는 다리가 덜덜 떨렸다. 무서웠지만 자신이라도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멀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마!”
결국 나츠메가 선택한 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만 악에 받힌듯 위기감을 품을 목소리 덕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췄다. 나츠메는 시선을 받으며 길을 건너 츠무기와 그의 형에게로 다가갔다. 몇몇 어른들은 무슨 일인지 살피려는 듯 골목 입구를 어른거렸다. 형은 어른들의 시선에 황급히 그들을 밀치고 자리를 떠났다. 두고 보자는 말을 남겨놓은 건 아무래도 좋을 덤이었다.
“......”
나츠메가 손을 내밀었지만 츠무기는 무시했다. 그저 옷을 툭툭 털고 일어설 뿐이었다.
“아...”
츠무기가 가늘게 소리를 냈다. 넘어지면서 잘못됐는지 셔츠 단추가 하나 튿어져 있었다. 나츠메는 그 사이로 츠무기의 쇄골에 생긴 멍자국을 얼핏 보았다. 나츠메의 시선을 눈치챈 츠무기는 셔츠 깃을 모았다.
“넘어지면서 생긴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츠무기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엄마한테 가서 얘기하자!”
“하지마!”
츠무기가 황급히 말을 막았다. 나츠메는 영문을 모른 채 츠무기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책은 집에 가면 있을 거야. 나한테도 엄마 아빠가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단호한 거절의 말이었다. 나츠메는 충격을 받았다.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거절당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움의 손길이면 더더욱 그랬다. 원래 갖고 있던 츠무기에 대한 인상을 배신한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늦되고 어수룩하고 엄마나 찾는 응석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나의 도움을 거절하는 거야? 충격을 받은 나츠메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츠무기의 얼굴을 쳐다봤다. 츠무기는 시선을 모른 척한 채 걸음을 빨리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 이후로는 주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학원 복도 너머에서 가끔 보는 정도였다.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때로 깜짝 놀랄 정도로 잔인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겐 끊임없이 매달렸다. 원장은 그럴 때마다 상냥한 말투로 그를 떼어냈다. 그래도 그는 또다시 매달리곤 했다.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끈질겼다. 엄마가 주술사 일을 하고 있을 땐 절대로 건들지 않는 나츠메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면 듬뿍 사랑해줄 텐데. 저렇게 상냥하고 천사같은 엄마가 그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역시 나츠메도 츠무기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 셔츠 사이로 보이던 멍자국이 생각날 때면 나츠메는 가슴이 콕콕 쑤셨다.
그리고 그 상태는 나츠메가 더이상 학원을 다니지 않게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츠무기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방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들어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 읽기엔 두꺼운 책이었지만 츠무기에겐 상관이 없었다. 행복의 시간은 책의 두께와 비례했다.
글자는 좋았다. 활자를 읽는 동안은 다른 생각이 사라졌다. 아빠가 형을 때리는 것도, 형이 자신을 때리는 것도 잊을 수 있었다. 가끔 운이 좋으면 책을 읽고 있었던 덕에 주먹을 피할 수 있기도 했다. 가족 중 최약체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였다.
최근엔 그래도 엄마가 집에 있어줘서 다행이었다. 엄마가 있으면 가족들은 서로 덜 때렸다. 자신이 엄마에게 투명인간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엄마에게 기대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엄마와의 연결을, 피로 이어진 연결을 믿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 어떤 할아버지가 츠무기에게 말을 걸어왔다. 츠무기의 이름을 확인한 그는 츠무기를 꽉 끌어안았다. 몇 번이고 자신이 츠무기의 외할아버지라고 말하던 그는 확실히 엄마를 닮아 있었다.
포옹의 온기에 당황한 츠무기는 할아버지를 집안으로 들였다. 외할아버지는 츠무기에게 이런저런 먹을 것과 선물을 주었다. 선물은 책이었다. 그는 츠무기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고 인자한 얼굴로 맞장구 치고 자신의 이야기도 했다. 그는 상가를 몇 채나 가진 건물주였고, 나름 윤택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손주들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얼마나 섭섭했는지, 얼마나 걱정이 되었는지를 말했다. 이전까지 받아본 적이 없는 따뜻한 말들이었다. 츠무기는 외할아버지에게 홀딱 빠졌다.
돌아갈 때 외할아버지는 엄마 몰래 찾아오기로 약속했다. 엄마가 아직 어렸을 때 노는 학생들과 어울리더니 대학까지 보내줬는데 학기중에 남자친구 애를 임신하고 가출해서 멋대로 결혼해버리는 바람에 엄마와는 연이 일방적으로 끊겼지만 자신은 언제나 엄마와 가족들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츠무기에게는 사랑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외할아버지가 가족으로서 돌봐주고 싶다고 했다. 엄마에겐 비밀로, 가끔 이렇게 집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밥을 먹여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냐고 아주 점잖고 다정하게 물었다. 츠무기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랑을 주겠다는 사람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츠무기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몇 번인가 ‘외할아버지’가 오갔다. 츠무기는 그가 오가는 사실을 가족들이 모르게 열심히 흔적을 지우곤 했다. 그는 다정했다. 몇 번이고 츠무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츠무기가 아이돌 육성학원에서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곤 춤과 노래를 요청하곤 했다. 그리고 열성적으로 박수를 치고 기뻐해줬다. 책을 많이 읽는 것에 대해선 착실하고 머리가 좋다며 칭찬해줬다. ‘외할아버지’가 츠무기의 상처를 발견하기 전까지 그랬다.
상처를 발견한 외할아버지는 분노했다. 옷 속의 상처까지 확인한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츠무기에게 엄마의 전화번호를 내놓으라고 을렀다. 츠무기는 겁을 먹었다. 이 비밀이 알려지면 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없었다. 애당초 외할아버지와의 만남은 비밀이었다. 울면서 넘어가 달라는 츠무기를 측은하게 바라보다 끌어안았다. 자신의 피가 이어진 아이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폭력에 노출되게 할 수 있냐며 한탄했다. 츠무기는 엄마 탓이 아니라며 울었다.
그날 저녁, 츠무기가 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자 ‘외할아버지’는 집 앞에서 엄마를 기다려서 만났다. 엄마는 외할아버지를 앞에 두고 경직되었다. 딱딱한 얼굴을 하고 온 몸을 긴장시켜서 소리쳤다. 참견하지 마라, 무슨 낯짝으로 여기 찾아왔느냐 같은 고성이 집앞에서 오갔다. 츠무기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귀를 막았다. 엄마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킨 기분이었다. 수치심에 눈물이 흘렀다.
고성이 잦아들고 집으로 들어온 엄마는 조용히 이사를 얘기했다. 아빠는 반발했지만 엄마는 무시했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나서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츠무기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엄마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엄마...”
엄마는 답이 없었다. 그저 그를 외면한 채 캐리어에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형이 때린다고 내가 말한 게 아니에요. 멍이 아직 낫질 않아서... 멍 보고 그랬어요.”
“......”
엄마는 접어 정리한 옷을 캐리어에 던졌다. 다분히 분노가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엄마, 엄마, 형이 날 때려요. 날 봐요, 엄마. 나를 때린다고요.”
“...... 그래서, 외할아버지한테 갈래?”
엄마는 차갑게 물었다. 분노를 압축한 단단한 목소리였다. 츠무기는 엄마의 발목에 매달렸다.
“아뇨, 엄마, 버리지 마요! 날 버리지 마요! 엄마!”
츠무기는 그 자리에서 목놓아 울었다. 엄마는 옷을 다 챙기자 츠무기를 내팽개치고 거실로 나갔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을 향해 “이사갈 집을 알아보면 돌아오겠다.”라고 선언하곤 집을 나가버렸다.
남은 사람들의 일상은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을 기준으로 돌아갔다. 엄마를 찾아 아빠도 형도 몇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가 이사갈 집을 찾으면 돌아오겠거니 하며 포기했다. 형은 익숙지 않은 집안일을 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화풀이가 더 잦아졌다. 아빠는 엄마가 없어도 종교를 들고 오는 사람이 없어져서인지 속이 더 편해졌다고 했다. 츠무기는 상처투성이 몸으로 매일 빨래를 돌리고 집을 쓸고 닦았다.
그러다 어느 날 아빠가 형을 심하게 때렸다. 다른 일도 아닌 동생을 왜 자꾸 때리냔 것이었다. 집에 있던 대걸레가 부러지고 형의 허벅지엔 커다랗게 피멍이 들었다. 츠무기는 안절부절못했다. 이제부터 형이 또 때리면 말하라 했지만 아빠가 자기 편이 되었다곤 생각할 수 없었다. 엄마도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을 하긴 했지만 아빠라고 그렇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형이 조금만 잘못해도 폭력을 휘둘렀고 츠무기에 대해선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때로 가벼운 체벌도 있었다. 다행히 크게 맞은 적은 없었지만 언젠가 더 크면 형이 맞는 것처럼 자신도 맞을까봐 두려워했다. 그런 아빠가 자신을 감싸줬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맞은 형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츠무기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엄마를 계속 불렀다.
형은 이후로 몇 번은 “어디 아빠한테 말해봐”라며 때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목격한 아빠에게 사정없이 맞았다. 바닥을 뒹굴고 머리가 깨지기도 했다. 그리고 형은 조용해졌다. 놀랍도록 입을 꾹 다물고 얌전하게 행동했다. 이제 츠무기는 맞지 않았다. 그 사실에 작은 만족감을 느꼈다. 아빠에게 약간의 호감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형에게 맞은 멍이 희미해져갈 때쯤 아빠가 방을 찾아왔다. 월차를 써서 회사에 가지 않은 날이었다. 형은 학교에 가 있었다. 츠무기는 학교가 일찍 마친 덕에 집에 와 있었다. 아빠는 츠무기에게 오늘은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는 기뻐하며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아빠가 대화를 하자며 방으로 들어왔다. 츠무기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빠를 맞이했다.
아빠는 츠무기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짓을 츠무기에게 했다. 츠무기는 저항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생이 성인 남성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빠는 츠무기를 강간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아빠는 츠무기를 찾았다. 츠무기는 강간당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엄마를 애타게 불렀다. 엄마가 왔더라면, 엄마가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츠무기는 몸서리치며 울었다. 나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츠무기의 방을 찾은 형이 아빠가 아무렇게나 버려놓은 콘돔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게 뭐야?” 형이 물었지만 츠무기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형은 분노했고, 츠무기를 마구잡이로 때렸다. 그날도 아빠는 형을 때렸지만, 형은 츠무기를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빠도 츠무기를 강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집은 지옥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아빠가 월차를 써서 집에 있는 날이었다. 엄마가 집을 나간 지 3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아빠는 그날도 츠무기를 찾았다. 츠무기는 거의 체념하고 있었다. 괴로워하고 울부짖고 저항한들 아무도 들어주지도 도와주지도 않았다. 그저 아빠를 기쁘게 해줄 뿐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게 된 이유 중엔 형도 있었다. 형은 집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상기시키지 않도록 얌전히 입 다물고 티 내지 말라고 협박하며, 간혹 자신이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츠무기를 때리고 괴롭히며 죽으라고 저주할 뿐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이제 더 찾아오지 않았다. 희망이 있다면 엄마, 엄마뿐이었다. 엄마가 돌아오면 이 모든 상황이 끝날 터였다.
아빠의 호흡이 많이 거칠어졌을 때였다.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츠무기는 그쪽을 쳐다보았다. 엄마가 있었다. 마치 기적 같았다. 엄마가 가장 필요한 이 순간에 엄마가 나타난 것이었다! 츠무기는 엄마를 간절하게 올려봤다. 엄마가 나타났으니 이 모든 상황이 종결시키고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줄 터였다. 희망이 차올랐다.
그러나 희망이 무색하게 엄마의 표정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형 같았다. 텅 빈 눈동자는 아빠와 츠무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빠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나 엄마는 침착한 동작으로 다시 문을 닫았다. 츠무기와 아빠를 단 둘이 방치한 채 그녀는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캐리어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갔다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곧 부엌에서 물을 틀고 식기를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엄마는 밥을 차리고 있었다.
츠무기의 안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그러졌을지언정 어느 정도 형태는 띠고 있던 마음이, 희망이 부서져내렸다. 자기 몸 안에 성기를 억지로 밀어넣었던 아빠가 황급히 빼내고 옷을 추스리는 광경 역시 그를 부수는 데 일조했다.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자신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츠무기는 부서져내린 마음 조각들 사이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엄마가 아빠에게 이혼장을 내민 것은 그로부터 2개월 후였다.
“엄마, 날 지켜주려고 이혼한 거예요?”
츠무기가 물었다. 아직 이삿짐 정리가 끝나지 않아 어수선한 방에서, 스탠드만 켠 채 머리를 싸매고 앉은 엄마의 뒷모습이 생경했다.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길고 웨이브 진 머리를 어깨 뒤로 넘겨댔다. 그래도 머리카락은 계속해서 어깨 앞으로 흘러내렸다.
“그럴 리가 없잖니.”
엄마가 대답했다. 츠무기는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는 순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아빠의 이혼도, 형과의 이별도, 집이 좁아진 것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젠 형에게 맞았던 것도 아빠에게 강간당했던 것도 아무렇지 않아졌다. 엄마의 무관심도 이젠 당연한 게 되었다. 아마 다른 이유로 이혼했겠지. 아들이 강간당한 것보단 아들을 강간하는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게 싫어서 이혼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했다. 형에게 아무리 맞아도 양친은 모른 척해왔던 것이다. 자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였다.
츠무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도, 위기에서 구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구제할 길 없는 불행이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책을 들었다.
책은 좋았다.
책만이 자신을 구제해줬다.
츠무기의 엄마는 루틴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일과를 보내고 문제 없는 가정을 연출한다. 가정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 눈치채여서는 안 된다. 비록 재산이 탕진되고 때때로 정신이 휘청여도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됐다. 그녀는 가슴 속 깊이 묻은 자신의 죄를 들킬까봐 노심초사 했다.
그러다 자신을 완전히 잃을 것 같을 땐 종교에 몸을 던졌다. 속죄를 위해, 자신의 몸에 들러붙은 추악한 죄를 씻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오열하고 반성하고 속죄하고, 그렇게 죽도록 기도해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면 죄의 증거가 형태를 갖고 자신을 맞이했다.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듯, 그렇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듯,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신을 비웃는 듯,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과거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듯, 집안에서 바깥에서 자신을 끈질기게 쫓아오며 “엄마”라 불러댔다.
이번에도 그랬다. 아버지를 보고 집에서 뛰쳐나온 지 3개월쯤 되었을 것이었다. 끊임없이 죄를 씻어내고 이사갈 집도 알아봤으니 이제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정상적인 가정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완벽하게, 남 보기 부끄럽지 않은 가정을 만들어야만 했다.
날이 많이 더워졌다. 벌써 8월이었던가. 바깥은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무더운데 집안엔 온통 서늘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여름의 뙤악볕 아래서 보는 집안은 마치 마굴 같았다. 다른 집들도 이럴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머, 츠무기 엄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웃집에 사는, 첫째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아이를 키우는 여자였다. 그녀는 항상 단정한 차림새에 화장도 엷게만 하고 다니는 ‘모범적인 엄마’의 전형 같아 보였다.
“웬 캐리어야? 어디 다녀왔어?”
“출장을 조금...”
거짓말을 했다. 옆집 여자는 아마도 좋은 사람이었다. 첫째를 낳고 신세를 많이 졌었다. 먹을 것도 챙겨주고 아이를 돌보는 방법이나 이런저런 것을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에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필요하다며, 친척이 적은 아이는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하며 친정과의 관계 회복을 종용했던 사람이기도 했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결여도, 그래서 발생하는 사회성 결여도 모두 ‘비정상’이라며, 정상적인 아이로 키우기 위해선 친정과 꼭 관계를 회복해야만 한다고 했었던 사람이었다.
사실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친구도, 남편도, 직장 동료도, 심지어 아무 상관도 없는 가게 점원들까지 다들 똘똘 뭉쳐 자신에게 “화해”를 종용했다. 자식의 도리를 위해,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를 생각해서, 아이를 위해.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은 본인의 잘못이었나. 이제 나이도 들고 애도 낳아서 성적 매력이 줄었으니 괜찮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한 자신의 잘못이 가장 컸을지도 몰랐다.
“최근 애 비명소리나 소리지르는 게 자주 들려. 첫째가 둘째를 좀 괴롭히는 것 같은데 주의 좀 줘.”
“...... 제가 좀 장기 출장을 다녀왔는데, 그동안 애 아빠한텐 이야기 해봤어요?”
“아니, 육아는 역시 엄마 몫이잖아? 엄마가 없는 동안 애들이 꾀죄죄해졌다구~”
그래요. 그렇게 날 괴롭혀요.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지난 10년간 자신에게 화해를 종용한 사람들을 얼마나 원망해왔는지 몰랐다.
“네, 죄송합니다. 잘 할게요.”
설마 8년 만에 화해를 위해서 갔다가 다시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게 될 줄은, 그리고 그 한 번으로 설마 아이를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를 가지게 될 줄 몰랐기 때문에 발견도 늦었다. 발견이 늦었던 만큼 중절의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 했다. 낳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꼭 닮아 있었다.
자신도 설마 했었다. 자신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옆집 사람에게, 동네 사람들에게, 남편에게, 친구들에게 원망을 품어봤자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당하지 않은 것을 자신만 당한 것 같아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강간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그랬다. 애가 얼마나 발랑 까졌으면. 그랬다. 남자들은, 아버지들은 원래 강간을 하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가 뭔가 잘못을 해서 트리거를 누르면 그들은 갑자기 강간마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선량한 그들이 잘못한 게 아니다. 트리거를 누른 여자들의 잘못이었다. 지나치게 색기가 넘치거나 발랑 까지거나 짧은 치마를 입어서 섹스 어필을 하거나 교복을 입거나 얼굴이 예쁘거나 몸매가 좋거나 나이에 비해 성숙하거나. 그녀의 잘못은 ‘너무 예뻐서’, ‘나이에 비해 성숙해서’, ‘아빠를 닮아서’였다. 저항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근친 성관계를 여러 번 가졌고, 그 씻을 수 없는 죄는 증거가 되어 나왔다. 가족들은 그 아이에게 ‘츠무기’란 이름을 붙여줬다.
그녀는 현관으로 통하는 문고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츠무기를 두고 자신이 생물학적 아버지이니 아이를 볼 권리가 있다고 치근거렸다. 딸만 있는 집에 대를 이을 아들이 생겼으니 얼마나 경사스럽냐는 소리도 했다. 과연 그가 인간이 맞는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런 주제에 집밖에선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녀는 지나가다가도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설교하는 소릴 몇 번이나 들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표정을 잘 관리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좋은 사람에게 근친강간이란 죄를 짓게 하다니, 초등학생 시절부터 너는 얼마나 나쁜 년이었던가. 그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게 그런 것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이날까지 살아온 것이 기적 같고 저주 같았다.
거실로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듯 집안은 조용했다. 신발은 작은 아이의 것과 남편의 것 둘 다 있었지만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아니, 작은 아이의 방에서 불길하게 억눌린 소리가 잠깐 울렸다. 그녀는 불안한 가슴을 안고 방문으로 다가갔다. 문앞에선 안의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설마.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아이를 강간하는 장면을 정면으로 목도했다. 아이는 망가지고 있었다. 죄악의 증거이자 과거의 자신이 거기 억눌려 숨도 못 쉬고 있었다. 남편은 그걸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문을 닫았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집안에서 자신의 과거가 재현되고 있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완벽한 가정을 만들 준비가 다 되었는데.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는데. 지주님을 마음의 지지로 삼아 겨우 현실을 견딜 준비가 되었는데. 그녀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마치 그때 그녀의 어머니처럼.
이럴 땐 루틴이 중요했다. 평소 하던 것을 하면서 자신을 돌봐야만 했다.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밥이라도 지으면 제정신이 돌아올까? 그녀는 밥솥을 잡았다. 밥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 집안일을 거들떠도 보지 않던 남편이 처음으로 고마워진 순간이었다.
이혼할 때 남편은 그녀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큰아이는 남편에게 맡기고 가장 보기 싫어하는 작은 아이를 선택한 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이제 더 좁은 집에서 더 자주, 다른 가족 없이 자신의 죄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이래봤자 어차피 과거의 자신도 아이도 구할 수 없고 결과도 달라지지 않을 텐데. 그 아이, 츠무기는 끔찍하리만치 불쌍하게도 느껴졌고 끝없이 혐오스럽게도 느껴졌다. 사랑이 없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괴로움과 불안과 측은함과 증오와 죄책감과 사랑스러움 사이에서 그녀가 택해왔던 것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선택할 것은 외면과 무시였다. 마치 그 죄가 거기 존재하지 않는 듯이, 자신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모른 척하고 무시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더이상 죄악과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것이 힘겨워지면 주지를 찾아갔다. 일그러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행운을 부르는 항아리 구입 같은 건 기본이었다. 이런 거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버거운 운명이 어떻게든 바뀔 수 있도록. 노력을 하지 않으면, 돈이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츠무기는 며칠 전에 만난 외할아버지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대충 자신에게 우호적이고 애정어린 말을 했던 것 같았지만 거기에 애정은 없었다. 텅 빈 말이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그 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외가의 피를 이은 정통한 자식이었댔던가 외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든가 어머니는 여자고 행실이 불량해서 그럴 수 없다든가 츠무기를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라고 불렀다든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문맥이 잘 이어지지도 않았거니와 자신에게 사랑과 승계를 말하면서도 어머니를 까내리는 것도 그랬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슨 영문에서인지 몰랐다.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간절하게. 더이상 생각이 자신을 좀먹지 않도록.
병원 정문을 지나면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반장으로서 선생님께 부탁받은 일을 완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자신은 부탁받은 일을 완수하는 것에 집중하기만 하면 됐다. 어차피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든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차라리 생각을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나 하고 지금을 즐기는 게 현명한 길이었다. 가방 속에 든 오늘의 읽을 거리를 생각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병실에 도착하자 만나야 할 사람이 보였다. 다인실이어서인지 침대에 앉아있거나 주변을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노래를 부르는 뒷모습은 아직 가냘프고 어딘가 위태해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눈길을 끄는 힘이 있었다. 츠무기는 그에게 걸어갔다. 노랫소리도 뒷모습도 츠무기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학교에 있을 때도 그가 이렇게 시선을 끌었던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네요, 에이치 군♪”
“응? 으음, 으으으음... 넌 누구지?”
“너무해!? 잊지 말아주세요, 같은 반의 아오바예요!”
“아아... 아오비 츠무기 군, 맞지? 소박하지만 울림이 예쁜 이름이네.”
그, 텐쇼인 에이치의 맑은 얼굴이 작게 미소지었다. 마치 천사 같은 얼굴이었다. 츠무기도 웃었다. 마치 텅 빈 것 같은 자아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조금씩 흘렸다. 꽤나 무거운 이야기라 여겼는지 에이치는 ‘의외로 이상한 애’라고 말했다. 츠무기는 조금 들뜨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행복의 파랑새”라고 명명했을 때는 아마 좀 더 그랬을 것이었다. 반장으로서 돌볼 보람이 있는 애였다. 그랬달까, 인상이 좋았다. 이름을 외워주진 못 했지만 그는 몸이 약해서 학교를 거의 나오지 못 했으니까. 오히려 건강해서 매일 학교에 나올 수 있었던 츠무기 자신이 그를 발견하지 못 했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 츠무기는 그에게 끌렸다. 분명 그와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후 다시 만난 건 시일이 조금 지나서였다. 에이치가 팔목에 ‘에이치군 게이지’를 달고 학교로왔었다. 츠무기는 그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러나 그보다도 외할아버지가 다시 자신을 찾기 시작한 게 문제였다. 그는 저녁 8시쯤 되면 전화를 했다. 어머니를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 요지는 언제나 그것이었다. 츠무기는 거절했다. 외할아버지는 끈질겼다. 매일 저녁 8시마다 전화가 와서, 그 시간대엔 아예 전화기를 꺼놓고 있을 지경이었다. 소음 문제도 있었다. 최근 어머니가 어디서 돈을 빌렸는지 빚쟁이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그 시간대가 딱 7~9시 사이였다. 가족들은 냉장고 같은 기본 설비를 제외한 모든 전기를 꺼놓고 없는 척 숨을 죽였다. 그때 전화기가 울리면 그런 가족들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될 터였다. 정말 곤란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턱밑에 들이밀며 당장 태도를 결정하라고 윽박지르고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매일마다 스토킹을 해대는 일은. 어떤 의미에선 재미있기도 했다. 남들은 당연한 듯 누리는 것들을 누리지 못 하고 숨죽이며 살면서도 거기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외할아버지의 손은 적극 거부하는 것이. 피가 전혀 이어지지 않았는데도 외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친아버지의 얼굴을 찾아내고 마는 것이. 목소리에서 그 때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
어느 날은 전화가 쉬는 시간에 울렸다. 외할아버지의 번호였다. 츠무기는 전화를 무시하고 가방 안에 넣었다.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옆에 있던 반 친구들이 츠무기의 가방과 츠무기의 얼굴을 번갈아 볼 정도였다. 츠무기는 시선에 당황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거절했다. 또다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고, 그는 전화기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무슨 전화야?”
오오타가 그에게 물었다.
“아하하.. 요즘 장난전화가 자꾸 와요. 받아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얘기만 무섭게 해서 무시하고 있어요.”
“변태 아냐? 다음에 전화가 오면 날 바꿔줘. 욕지거리를 해서 다시는 못 하도록 해야지! 아니면 내가 지금 전화 걸어줄까? 전화기 줘봐.”
오오타는 츠무기의 전화를 빼앗으려 했다. 츠무기는 전화기를 재빨리 바지 주머니에 넣고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나도 남자니까요!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답니다. 체력에도 자신이 있고요.”
츠무기의 말에 친구는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얼굴엔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냅두겠지만... 상대가 이상한 걸 요구하면 큰 소리로 명확하게 거절하고 도망쳐. 장기 같은 거 털리지 말고.”
오오타는 츠무기의 정수리를 헝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츠무기는 갈퀴손으로 머리를 정리하고선 다음 시간 교재를 책상 위로 꺼냈다. 행동하는 내내 왼쪽 얼굴에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에이치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츠무기는 뜨끔했다. 마치 마음 한 켠이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어색하게 시선을 회피했다. 가슴은 불안하게 두방망이 쳤다.
수업이 마치자 에이치가 다가왔다. 츠무기는 평소처럼 인사를 나누고 혼자 도서실로 향하려 했었다. 그러나 에이치는 귀가하지 않고 그를 따라 도서실로 향했다. 츠무기는 언제 그가 예의 전화 얘기를 할지 몰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에이치는 도서 정리를 도와주는 동안에도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요즘 누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여러가지 학교 이야기를 묻고 답한 것이 전부였다.
해가 지고 하교할 시간이 되어 에이치가 이윽고 그 화제를 꺼냈다.
“곤란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날 이용해도 돼.”
그가 꺼낸 말은 의외였다. 어떤 사정인가를 캐물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에이치는 해결방법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돼. 구체적인 사정을 몰라도, 내가 돈을 쓰거나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도움은 줄 수 있어. 그저 이름을 파는 것만으로도. 혹은 무언가를 가볍게 지시하는 것만으로도, 혹은 내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껄끄러운 일들이 해결되기도 해.”
담담하게 말하는 에이치의 옆얼굴을 츠무기는 바라보았다.
“그 일에 있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네 편일 테니까 마음 편하게 네가 가진 걸 이용하면 돼. 그 정도 비용은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어.”
츠무기는 웃었다.
“그 말은 우리가 친구란 얘기죠?”
에이치 역시 가볍게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창으로 비치는 달빛에 츠무기는 설렘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같은 편이 되어주겠다는 말 때문인지 그의 아름다움 때문인지는 츠무기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어쩌면 뭐든 정말로 해낼 수 있을 만큼 재력과 힘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복도를 함께 걷는 동안 어깨를 나란히 하자 에이치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전에 없이 의식되었다. 원인이 무엇이었든 츠무기는 에이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잘가요. 좋은 밤 되길.”
“그래, 츠무기. 내일부터는 전화가 울리지 않길 바라. 널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계속 전화를 꺼놔선 필요할 때 통화도 못 하게 되니까.”
에이치는 교문 앞에 정차한 리무진에 올라 탔다. 문이 닫히자 검고 긴 리무진은 소리도 없이 어둠 속을 미끄러져 갔다. 츠무기는 리무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필요할 때 통화도 못 하게 되니까.” 에이치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전원이 꺼진, 검은 액정이 반짝였다. 이 설렘은 자신만의 것일까 궁금했다. 집까지 가는 동안 전화를 해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에이치가 전화를 걸어준다 해도 지금은 받을 수 없었다. 전화를 켜면 분명 에이치보다도 먼저 외할아버지가 먼저 전화를 걸어올 터였다. 츠무기는 전화기를 켜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주머니 안에 넣었다. 하지만 언젠가, 가까운 시일 내에는 외할아버지와의 일을 해결하고 그와 수화기 너머로도 대화를 하고 싶었다. 부디, 가까운 시일 내에.
떠들썩한 교실에서 책이 날아다녔다. 게임 잡지였다. 아이들은 웃으며 아무렇게나 책을 집어던졌고, 받은 아이는 페이지를 펼쳐보고는 “야, 이런 애냐!”라며 도로 잡지를 던졌다. 누군가는 캐릭터 이름을 외쳤고, 다른 히로인의 이름도 누군가가 외쳤다. 도서위원으로, 책을 소중히 다루는 게 습관이 된 츠무기는 약간 조바심을 느꼈다. 책이 언제 찢어질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책은 아니었지만.
“걔가 뭐가 좋아, 창녀인데!”
오오타가 외쳤다. 츠무기는 놀라서 오오타를 올려다 봤다. 산뜻하게 생겨선 그런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게 이상했다. 아무리 남자들만 있는 교실이라 해도 그랬다.
“야, 걔 좋아하는 팬들도 있다. 팬들한테 사과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
“그것도 모에 포인트인 거 모르냐?”
다른 누군가는 그런 말을 했다.
“오빠한테 강간당한 거랑 창녀랑 무슨 상관이 있냐? 말 참 더럽게 하네.”
다른 누군가는 그런 말을 했다.
“애당초 강간은 왜 당하냐? 한 놈도 나쁘지만 당한 년은 멍청하고 더러워.”
오오타가 외쳤다. 그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늘 자신만만한 애긴 했다. 외할아버지에게서 온 전화를 자기가 받아서 욕지거리를 해주겠다던 그 태도와도 잘 연결이 되는 일관적인 모습이긴 했다.
“텔레비전에 나가는 새끼가 할 말이냐? 미친놈”
누군가 그를 비난했다. 그러자 그는 발끈했다.
“야, 나만이 아니야! 그거 게임 처음 나왔을 때 걔 아다 아니라고 게임 시디 깨고 버리고 난리도 아니었단 건 아냐? 걘 주인공 자격이 없는 거야. 다들 싫어해서 찢고 깨고 인증했는데 왜 나만 못된 놈인 것처럼 말해?”
오오타의 말에 츠무기는 그가 들고 있던 페이지에 새겨진 소녀의 얼굴을 봤다. 가만 기억을 떠올려 보자 언젠가 그녀의 얼굴의 파편을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츠무기는 뜨끔했다. 확실히 오오타 혼자만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 캐릭터에 대해 얘기하며 열을 올리다 “그런 것 때문에 애들끼리 싸우냐”는 중재에 입을 다물고 앉았다. 확실히 그랬다. 그녀는 실존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가족에게 강간당하는 건 그들에겐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그 일로 열을 올려 싸우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츠무기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의 과거가 밝혀지면 어떤 식으로 그들은 자신을 대할까? 멍청하고 더러운 창남이 될까, 모에 포인트를 가진 캐릭터가 될까,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사과를 받게끔 만드는 존재가 될까? 그렇다면 오오타는 자신의 친구란 이유로 아오바 츠무기를 비난한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게 될까? 아니면 자신은 남성이기에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런 여성은? 거기서 츠무기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곧바로 지웠다. 생각해선 안 될 일이었다.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그는 생각을 다시 포기했다. 어차피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이 이야기는 또 당장의 과업에 밀려 기억의 뒤편으로 내던져질 것이었다. 무엇을 말해도, 무엇을 생각해도, 그렇게 심각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 죽음을 제외하곤 그를 상처입힐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터였다.
그날부터 츠무기는 학교 활동에 더 열을 올렸다. 수예부에 가서 이츠키 슈와 차를 마시며옷을 만들고, 도서실에 가선 밤늦게까지 빠진 책은 없는지 수선이 필요한 책은 없는지 챙기고 배치를 확인했다. 전화기는 꺼 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집에서 전화가 올 일도 없었다. 가끔 레이가 불러 달래기도 하고 을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에이치와는 이전보다 대화가 줄었다. 밤이 되면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다. 자고 일어나면 묘하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에이치가 오오타와 교실에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었다. 츠무기는 그럴 때마다 자신의 ‘자격’을 생각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외할아버지가 아예 집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늦게 돌아가기 시작한 지 3주쯤 되던 때였다. 전화기를 꺼놓고 지냈기 때문인 듯했다. 그는 다짜고짜 츠무기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함께 돌아가자고 반쯤 윽박지르듯 말했다. 츠무기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감정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류의 공포 같기도 했고 혼란 같기도 했다. 떠오르는 얼굴은 둘이었다. 아름다운 친구와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츠무기는 외할아버지를 떨치고자 친구와 어머니의 얼굴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집 앞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츠무기는 진작에 외할아버지를 떨쳐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잡혔던 손목도 멀쩡했다. 옅은 손자국이 남아 있긴 했지만 내일이 되면 사라질 정도였다. 오늘은 이거면 됐다. 내일은 다른 길을 선택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츠무기는 현관문을 열었다.
오오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수면부족인지 다크서클이 심해지고 피부도 거칠어졌다. 보통의 남고생이라면 게임이라도 하느라 그럴 수 있겠지만, 아이돌 지망생쯤 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최근 텔레비전 프로그램 일을 하나 받아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이 많이 바쁜 걸까? 그러고 보면 전날엔 학교도 빠졌었다. 츠무기는 그가 걱정되었다. 자리도 근처였고 자신은 반장이기도 했으니까. 오오타 역시 그를 걱정해준 적이 있었다.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오오타의 팔을 잡았다.
“오오타 군”
“ㅎ...ㅣㄱ”
오오타는 조금 기묘한 소리를 내며 그에게서 팔을 빼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츠무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츠무기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자 오오타는 어색한 얼굴로 팔을 털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평소 답지 않게 너무 놀라는데요?”
“아무 일도 없어! 갑자기 뒤에서 잡으니까 놀라는 게 당연하지!”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꾸미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낭패감과 불안감 사이 어딘가에 있을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로 드러나 있었다. 츠무기는 재차 물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나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요.”
“아니,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니깐...!”
“오오타”
다소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에이치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몸을 움찔거렸다.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절대자의 목소리를 들은 듯 그의 자세는 완전히 경직되었다.
“수업 마치고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에이치는 부드럽고 조용히 말했다. 오오타는 우물거렸다. 츠무기는 오오타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친구 사이에 그럴 이유는 없을 터였다.
“알았어.”
한참을 망설이던 오오타는 결국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저도 거기 껴도 될까요? 걱정이 되네요.”
“잠깐, 너는 안 와도...”
“그래, 츠무기도 와. 같이 듣는 게 좋겠지.”
에이치가 오오타의 거부 의사를 가볍게 묵살하고 츠무기를 받아들였다. 오오타는 마치 약점이라도 잡힌 듯 이를 악 물고 에이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츠무기는 사뭇 이상하다는 듯 둘을 바라보았다. 오오타의 못마땅해 하는 얼굴을 보며 잠깐 빠져주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을 했지만, 만약 자신의 경애하는 친구가 오오타를 괴롭히고 있다면, 둘 모두의 친구로서 중재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결론지으며 에이치의 호의를 아무말 없이 받아들였다.
수업이 마치고 에이치와 오오타와 츠무기는 좁다란 보컬 레슨실에 모였다. 딱히 레슨을 할 건 아니었다. 방음시설이 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에이치가 손을 쓴 것이었다. 츠무기는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예정이기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에이치는 태연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며 일상적인 얘기를 조금씩 물었다. TV 프로그램 활동은 어때? 관계자들은 어때? 오오타는 짤막하게 괜찮아, 좋아, 같은 대답을 무성의하게 내놓았다. 평소 같았으면 어떤 식으로 활동해야 할지 관계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처세술에 대해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겠지만 오늘은 에이치가 유난히 조용했다. 츠무기는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때 네게 연결시켜준 프로듀서”
“......!”
오오타의 방송 프로그램은 아무래도 에이치가 연결시켜준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에게서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겠지. 분명, 적어도 츠무기 자신보다는 오오타 쪽이 더 반짝이고 있어 보였다.
“내가 경고했던 일이 일어난 거야?”
에이치가 오오타에게 질문했다. 오오타는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에이치의 손가락은 느리게 건반을 하나씩 눌렀다.
“아니야.”
오오타가 대답할 때까지 에이치는 건반을 다섯 번 눌렀다. 츠무기는 눈을 깜박였다.
“저, 대화를 따라잡질 못 하겠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츠무기의 질문에 에이치는 한숨을 쉬었다.
“내 실수에 관한 얘기야, 츠무기. 나의 나이 때문에, 누군가를 조사할 때 굳이 그의 성벽에 관해선 애송이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판단해서 보고를 누락시켜버리는 성인 사용인이 있었고, 그걸 고려치 못하고 함부로 사람을 연결시켜버린 내 실수에 관한.”
“아...”
“불과 이틀 전에야 그 녀석이 우리 또래의 남자애들, 특히 아이돌 지망생들을 ‘좋아’한단 얘기를 들을 수 있었지. 말이란 참 재미있어. ‘좋아한다’니, 일을 빌미삼아 약자의 성을 착취하는 것을 그런 긍정적인 단어로 포장한 것은 사람들이 강자인 가해자에 이입하기 때문일까? 대부분은 강자가 아닌데도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아직 입지를 다지지 못한 우리 신인 아이돌들은 방송계에서 약자야. 여성 아이돌들에 비하자면야 낫긴 하겠지만, 결코 안전하다 할 수는 없어. 추행이나 강간은 대체로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범죄야. 범행 대상자의 성별따위 알 바 아니지. 그래서 아직 미성년에 입지도 제대로 다지지 못한 남자 아이돌들도 누군가의 권력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도구로 다뤄질 가능성이 충분해. 이런 얘길 이틀 전 너에게 보내지 않았나? 그땐 분명 자신만만하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했었지?”
에이치가 오오타를 쳐다봤다. 오오타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외면했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꽉 쥔 주먹엔 혈관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래서 어쩌란 거야? 네 말대로 우리는, 나는 입지를 다져야만 했어. 미래를 틀어쥐고 있는 사람한테 어쩌란 거야? 일을 포기하고 미리 꽁무니를 빼야만 했단 거야?”
오오타의 목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에이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피해를 당한 거야?”
“아니야!!”
에이치의 질문에 오오타는 강한 부정의 말을 내뱉았다.
“나는 남자야! 그런 거 당할 일도 없고 당하지도 않았어! 그건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런 게 아니야!”
츠무기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자신도 그때 아버지가 자신에게 뭘 하고 있는지 몰랐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주고받던 이야기 속에서,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범위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온몸이 얼어붙는 두려움과 혼란과 고통과 누군가 자신을 구제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모든 것이 꺾여나가는 듯한 무력감이 자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혼자 멋대로 만족하고 성기를 빼낸 다음에는 지독한 혐오감과 비참함이 몰려왔었다.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도 그때의 감각이 울컥 되살아날 때면 한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온몸을 끌어안고 자신을 진정시켜야만 했었다.
초등학생인 주제에 야동에 중독된 아이도 있었다. 걘 여자는 강간해줘야 한다면서 반에서 야동 흉내를 내며 신음성을 흘리곤 했다. 남자는 강간을 하는 존재, 여자는 강간을 당하는 존재라 단언했다. 츠무기는 그럼 자신의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자신은 여자 취급을 받은 것일까? 그렇다면 여자는 그런 취급을 받는 존재인가? 어머니는 그런 일을 당하기 위한 존재인가? 자신은 아직 남성적인 특징이 나타나지 않았고 힘도 약하니 그런 취급을 당해도 되는 것인가? 자신이 당한 것은 무엇인가? 강간인가? 아닌가? 형은 아버지가 아닌 자신을 매도하며 폭행했다. 집안에서도 집밖에서도 어디서든 의도 없는 비난이 날아들었다. 괴로웠다. 밤이 되어 혼자가 되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다. 빨리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도했었다. 그리고 이 과거만은 어딘가 고장나버린 지금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다른 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음에도.
“널 흠집내려고 묻는 게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 오히려 그 반대야. 네가 피해를 당했다면 지원을 해주겠다고 얘기하는 거야.”
에이치의 말에 오오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발개진 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빨개진 콧잔등을 주먹으로 문질렀다.
“나는... 나는 지원 대상이 아니야. 나는 그런 그런 사람이 아니야.”
“어라, 오오타 군, 아직도 강간 당한 쪽이 멍청하고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츠무기는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순수한 의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약간은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렸을 때 자신은 얼마나 간절히 도움을 원했던가.
“무섭고 화가 나겠죠. 밤마다 꿈을 꿀지도 몰라요. 매일 잠도 못 자고 상대를 원망하다 결국 자기혐오로 빠지는 자가당착을 되풀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디까지나 오오타 군이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지만요. 오해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정말로 피해를 입었다면 에이치 군의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거예요. 오오타 군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는 있어요.”
그는 아직 괴로워하고 울 수 있었다. 늦지 않았다. 자신처럼 망가지기 전에 그는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길 츠무기는 바랐다. 오오타는 그런 츠무기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의 얼굴에 감기는 묘한 감정을 츠무기에겐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고통이라곤 느끼지 못 하는 심장으로라도 고통받는 그를 감싸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매장이야... 끝장이야.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돈이 엄청나게 들었어. 엄마도 아빠도 나만 보고 있단 말이야! 내가... 내가 강간... 당한 걸 공론화 시키면 엄마아빠도 절망할 거야! 여태까지 들이부은 돈은 허사가 되고 아이돌로서의 내 꿈도 희망도 끝나버릴 거야! 운 좋게 그 피디는 퇴출시킨다 해도 그 피디의 친구들이 내가 방송생활을 이어가도록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사람들도 내가 TV에 나오는 것도 싫어하겠지! 그들은 피해자를 싫어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평화를 깨뜨린 우울한 얼굴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나는... 엄마 아빠도 친척들도 볼 낯이 없어... 하지만 내가 참고 버티면서 피디와 둘이 될 상황을 잘만 피하면... 어떻게든...”
말하며 오오타는 츠무기의 소매를 붙잡고 울었다. 온 얼굴 가득 눈물을 흘리며 인내를 말했다.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에이치였지만 시선은 완전히 츠무기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츠무기는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에이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하면 녀석은 다른 희생양을 찾겠지. 방치했다간 100명이고 200명이고 희생자는 늘어날 것이고, 그런 녀석 같은 가해자의 숫자도 계속 늘어날 거야. 자정하려면 도려내야만 하는 부분도 있어. 네가 그를 요령좋게 피한다 하더라도 범행을 묵인받은 가해자는 또다시 다른 약자를 찾아 범행을 저지르게 돼. 결국 너의 꿈을 지키고자 하는 행동이 네 또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거야. 누군가 피해를 호소해도 다른 전례가 없으니 피해자만 거짓말쟁이가 되어 묻히고 녀석은 범행을 멈추지 않을 거야.”
“오오타 군의 책임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에이치 군.”
츠무기가 에이치의 말을 끊었다. 에이치는 입을 다물고 시선으로 오오타의 얼굴을 훑었다.
“혼자 감당하라고는 말하지 않을게. 어차피 네가 처음이 아닐 거야. 사람을 써서 조사해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내 함께 하도록 종용할 거야. 변호인단도 지원해 주지. 물론 네가 강간이나 추행이나 성희롱을 당했다고 말했을 때의 얘기야. 아니라면 무시하면 돼. 언제든 전화로든 라인으로든 얘기해줘.”
에이치는 말을 끝내곤 다시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몇 개인가 음을 눌러 조율이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한 후 열 손가락 모두를 건반 위에 올렸다.
“이제 그만 가도 좋아.”
그리고 그는 단순한 선율의 피아노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오타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콧물까지 슥슥 닦아내고선 퉁고 붓고 빨개진 눈으로 에이치를 쳐다봤다.
“내일까진 연락할게.”
그리고 그는 방을 나갔다. 츠무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레슨실에선 그렇게 울었는데도 걸음걸이는 의외로 바른 걸음걸이였다. 그는 분명 상처받았지만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냥하네요, 에이치 군.”
츠무기는 시선을 다시 에이치 쪽으로 돌렸다. 에이치는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나는 아이돌이란 문화를, 아이돌 그 자체를 사랑하는 거야. 우리 역시 이 학원을 벗어나면 방송계에서 일하게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일터인 방송계 쪽을 봐둘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내가 직접 가선 아무런 의미 없이 대접이나 받다 오겠지. 그래서 굳이 적당히 작은 자리에 적당히 잘하는 오오타를 보냈던 거였는데... 이런 일이 될 줄은 몰랐어. 이런 것 하나 예상 못 하다니, 내 불찰이야.”
에이치의 왼손이 시 음을 눌렀다가 건반에서 아예 떨어졌다. 양손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사건을 이용해 연관된 가해자들을 뿌리 뽑을 생각이야. 어쩌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얽혀 나올지도 모르지. 캐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야. 어쩌면 우리도 타격을 조금은 입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얼마나 타격을 입든, 가급적이면 이 일로 방송관계자들의 성착취를 근절시킬 수 있으면 좋겠어. 완전히는 무리겠지만 그런 ‘분위기’는 만들어낼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오오타의 인정이 필요해. 모든 작업의 시작은 오오타 자신이 스스로 당한 일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거야. 그게 없으면 텐쇼인 가의 원조도, 변호인단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네...”
“그리고 다정한 건 너야. 오늘 오오타가 거의 자신의 피해를 인정하기 직전까지 간 건 네가 있어서야, 츠무기.”
“네? 아니, 그럴 리가요. 에이치 군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츠무기는 그렇게 말하곤 피아노에 손을 얹었다. 오오타가 만약 자신 때문에 피해를 말할 생각이 들었다면 그건 자신이 다정해서라기보다는 아마 동료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일종의 동지애와 비슷한 것이었다.
일의 해결은 피해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한다. 맞는 말이었다. 애당초 그것이 피해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확인한다.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쓰리든, 어떤 좌절감을 안겨주든, 얼마나 더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든, 그것을 확인하는 것부터 먼저 해야만 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부정하고 피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서 해결하려 한다 해도 해결되지 않을 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받는다. 설령 그로인해 다른 아픔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게 최종적으로는 스스로의 고통과 불편을 덜 수 있는 바른 방법이었다. 심리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된 츠무기에게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핸드폰을 켤 수는 있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 숨어서라도 에이치와 라인으로 잡담을 나누고 웃을 수 있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가치가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도 츠무기는 왠지 모르게 위로 받았다. 에이치의 말에서, 단호함에서, 그의 행동에서 그랬다. 그리고 평소 츠무기의 언행처럼 가볍고 급작스럽게, 불현듯 생각난 듯이 외할아버지와의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솟아난 것이다.
“그보다 에이치 군,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나요?”
츠무기가 묻자 에이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글쎄,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 하지만 최대한 들어주도록 할게. 너니까, 츠무기.”
츠무기는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았다. 목재 테이블이 견고한 소리를 냈다. 패밀리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가 비워진 만큼 물을 채우고 갔다. 맞은편에선 장년의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장년 남자의 등 뒤 대각선 자리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짧은 머리에 근육이 착실히 잡힌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츠무기는 그를 향해 웃었다. 그는 에이치에게 부탁해 함께 오게 된 텐쇼인 가 소속의 경호원이었다.
“뭘 보며 그렇게 웃는 게냐!”
정면의 남자가 화를 냈다. 츠무기는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남자의 얼굴을 봤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과 한창 실랑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 쪽으로 오면 빚쟁이에 쫓길 일도 밥 굶을 일도 없어! 새 옷도 많이 사주겠다는데 도대체 왜 안 오겠다는 거야? 느이 엄마가 너한테 도대체 무슨 세뇌를 했길래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냐!”
장년의 남자, 츠무기의 외할아버지는 위압적으로 말했다. 츠무기는 한때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이 싫은 거예요.”
츠무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외할아버지는 화가 나 붉어진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나이가 들어 툭 튀어나온 눈은 금방이라도 노성을 지를 것 같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싫은 거냐?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느이 애미가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주입이라도 하디? 그년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 나랑 같이 살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바로 그런 점이 싫은 거예요.”
츠무기는 즉답했다.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답니다. 당신이 나를 아들이라 말하고 있다는 걸요.”
외할아버지는 물을 들이켰다. 츠무기는 그가 컵을 다시 놓는 손동작을 응시했다. 자신의 손과 비슷하게 생긴 손이었다.
“나는 아픈 게 싫어요. 그래서 강간도 싫어요. 다른 사람이 아파하는 것도 싫어요. 특히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것은 더욱 싫답니다.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를 강간하고 나를 낳게 한 외할아버지를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외할아버지에게 가지 않아요. 그러니 더이상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츠무기의 말에 외할아버지는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는 위협하려는 듯 테이블을 양손으로 세게 내려치곤 츠무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강간이라니, 누가 강간을 해! 그건 강간이 아니야!! 느이 애미가 섹스 중독에 발랑 까져서나를 유혹하고 쑤셔달라고 얼마나 매달렸는지 알아?! 느이 애미는 원래 그런 년이야! 그런 데서 너 같은 아들을 낳았으니 내 씨가 좋았던 거지! 그러니 너는 잔말 말고 우리집에 와서 나랑 같이 살아!”
츠무기는 눈을 내리깔았다. 손가락은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라면 나도 그런 사람이겠죠. 그건 누구로부터 시작됐을까요?”
츠무기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마치 외할아버지가 모든 죄의 시작이라는 듯이 다시 시선을 들어 웃었다.
“내가 바로 당신의 죄의 증거예요. 다시 연락하거나 찾아오면 강간죄로 신고할 거예요.”
츠무기의 말에 외할아버지는 츠무기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뒤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노성을 질렀다.
“해봐!! 어디 한 번 해봐!! 느이 애미 빚 때문에 이걸로 경찰에 잡히면 사기죄로 감방에 들어갈 거다! 그리고 유혹에 넘어가 성인인 느이 애미랑 합의로 잔 나는 무고죄로 너도 쳐넣을 거다!! 어디 한 번 해봐!!”
그의 주먹이 츠무기의 옷자락을 조여 목을 조르고 있었다. 경호원이 달려와 그의 팔목을 잡았지만 아랑곳없었다. 결국 팔을 꺾어 얼굴을 테이블 위에 처박고서야 그는 츠무기를 놓아주었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경호원에게 넌 누구냐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에이치 군의 경호원이에요. 에이치 군은 내 친구이고 대재벌의 후계자랍니다♪ 텐쇼인이라고 하면 알까요?”
외할아버지는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목소리 볼륨이 점점 줄어들었다. 저항이 약해지자 경호원은 그의 팔목을 놓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져선 잠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다간 “그 애미에 그 새끼!”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경호원과 츠무기는 잠시동안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은 손남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서 있었다.
“곧 음식이 나올 거예요. 같이 먹을래요?”
츠무기는 침착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경호원은 아무 말도 없이 맞은 편에 앉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마시던 물컵은 테이블 바깥쪽으로 내놨다. 컵을 옮기던 경호원의 얼굴과 손짓에 경멸이 감돌았다.
마침 음식이 얹힌 트레이를 끌고 웨이터가 다가왔다. 익숙한 손길로 물컵을 치우고 새로운 물과 식기세트를 세팅했다. 이제 막 완성된 음식을 테이블 위에 얹어놓고선 웨이터는 츠무기와 경호원의 얼굴을 슬쩍 훑었다. 츠무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자신 앞에 놓인 함박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중절해버렸으면, 중간에 버리기라도 했더라면 어머니는 편했을 텐데.”
자신을 볼 때마다 피해의 기억이, 증오스러운 아버지의 기억이 플래시백 되었을 텐데. 츠무기는 그 고통의 크기를 가늠해 보려다가 포기했다. 분명 자신도 죽을 것처럼 괴로웠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의 자신은 그때의 기억이 플래시백 되거나 아버지가 떠올라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저 금방 생각을 차단하는 걸로 끝냈다. 그래서 같은 경험을 했지만 그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덜 망가졌기 때문일 것이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태생부터 잘못된 자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안고 있어준 어머니께 기도하듯 감사 인사를 했다. 츠무기는 경호원이 그런 자신을 빤히 보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에이치 군은 대단하네요. 정말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도 외할아버지가 도망쳐 버렸어요. 저는 존재를 걸고 협박해도 안 통한 사람인데...”
경호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츠무기는 해사하게 웃었다.
“에이치 군에게 전해주세요.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함께하겠다고. 우린 정말로... 친구니까요.”
츠무기는 그렇게 말하며 함박스테이크를 입 안에 집어넣었다. 에이치가 좋아한다던 그 음식을 그는 시간을 들여 맛을 음미했다. 감미로운 맛이었다. 결코 질리지 않을 것처럼.
며칠 후 츠무기는 에이치에게 외할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위암이라고 했다. 아직 말기까지 진행된 것은 아니니 목숨에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오래 전에 외할머니와 이혼을 했던지라 그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병수발을 위해 츠무기를 필요로 했었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그렇게 말했더라면 가서 도와드렸을 텐데요.”
츠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병수발이라 하면 보통 남자애들은 도망부터 치니까.”
에이치는 작게 웃었다. 그런가요. 츠무기도 따라 웃었다. 보통의 남자애들. 자신이 그 무리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다.
“츠무기, 유닛을 하나 만들 건데, 같이 하지 않을래?”
에이치가 물었다. 츠무기는 기뻤다. 어딘가 고장나지 않았더라면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그가 바라 마지 않았던 제의였다.
그 일 이후로 츠무기는 에이치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라인을 통해 수많은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fine”를 결성하고 나서는 에이치의 계획도 본궤도에 올라 더 본격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그를 보좌했다. 그리고 작업을 수행하면서 츠무기는 그의 열기에 놀랐다. 그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명을 붙잡고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전투적으로 이상을 도모했다. 학교의 다른 학생들과는 달랐다. 어머니나 아버지나, 주변의 어른들과도 달랐다. 이런 자료를 구해와라, 저런 것들을 해달라 요구는 자주 있었지만 그것이 괴롭지는 않았다. 아니, 애당초 괴로움을 느끼지 못 하고 있었으니 이 표현은 적절치 않겠다. 그는 에이치의 계획에 참여하며 고양감을 느꼈다. 홀로 타오르는 고고하고 강한 불꽃 옆에서 그를 지키고 보좌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츠무기의 마음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황폐해진 밤의 정원 같았다. 집도, 나무도, 풀도, 나비도, 동물도, 자신을 지키는 울타리조차도 없이 그저 싸늘한 밤공기와 멀리 떨어진 무수한 별들, 그리고 자신을 절대 돌아볼 리 없는 ‘어머니’가 달처럼 밤하늘에 걸려 있었다. 외로워서 별들에게 말을 걸면, 별들은 멀리서 답을 해줬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 그에게 온 것이다.
정원의 중앙에서 츠무기는 불꽃을 끌어안았다. 불꽃의 온기로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 간질간질한 느낌을 그는 즐겼다. 불꽃 속의 이상을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 그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에이치의 아름답고 창백한 얼굴에서, 푸른 눈을 형형히 빛내며 모양새 좋은 입술이 무언가를 획책하는 것을 볼 때면 때때로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자꾸만 아픈 그의 모든 것을 보호해주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사랑스러움을 감히 ‘사랑’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가 특별해지면 특별해질수록 더 선명해지고 강렬해지는 한밤의 꿈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짓누르고 강간하던 꿈이었다. 경련하듯 깨어나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멍하니 앉아 한숨을 쉬곤 했다. 그리고 잠시동안 자신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발생한 감정인지 의심하곤 했다. 누군가에게 동성애 하는 남자들은 어릴 때 남자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근거 없는 이야기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꿈을 꾸면 그런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걸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에이치를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늘 그러하듯이 사고를 끊어냈다. 의심한다 해서 이미 존재하는 감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낮이 되면 학교에서 에이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를 위해, 그의 이상을 위해 행동하며 기쁨과 행복과 충만감을 쌓았다. 낮의 세계는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고통도 누군가의 추한 마음도, 혹은 집에서 불도 텔레비전도 끄고 빚쟁이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없는 척 숨죽여야 하는 일도, 그 어떤 것도 그 반짝임에 흠집을 낼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함께 학교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타인을 변화시키는 것,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에이치를 돕고, 지킬 수 있다는 경험이 차곡차곡 그의 텅 빈 자아에 쌓여갔다.
그는 행복했다. 도저히 집도 주변도 행복하다 할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만약 또다시 집이 빚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 신고를 한다 해도 상관 없었다. 사랑을 표현하지 못 해도, 그에 가까운 감정의 이름을 붙이고서 에이치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는 언제고 행복할 터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끝났다.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하지 않았기에 에이치에게 버림받았다. 적어도 그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에이치는 이별의 선물로 어머니의 빚을 모두 탕감해줬다. 집에 찾아온 검은 정장의 사람이 어머니에게 빚을 모두 갚았다는 영수증을 내밀었다. 새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했지만 어머니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츠무기는 탁자에 얹힌 종이들을 멍하니 내려다 봤다. 새아버지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 이마에 키스를 퍼부었지만 마음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차갑게 내려앉을 뿐이었다. 약 반년에 걸친 사랑의 증명이 이런 것인가. 허무가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 영수증들은 마치 이혼서류와 같았다.
“노래 하나를 받았는데”
게임연구부실에서 나츠메가 말했다. 츠무기는 소라가 하던 게임 화면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나츠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선배의 부모님께 보여주고 싶어.”
“나츠메 군?”
츠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츠메의 의도를 읽기가 힘들었다. 부모님께 공연을 보여줄 거라면 공연 날짜가 잡혔을 때 그곳으로 부모님을 부르면 될 일이었다. 츠무기의 부모뿐만 아니라 나츠메의 부모, 소라의 부모까지 모두 불러 당신의 아들들이 얼마나 아이돌로서 성장했는지를 보여드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런 의미는 아닌 듯했다.
“싫든 좋든 선배와 같은 유닛이 되어버렸잖아. 공연 중 선배네 부모님 문제로 누가 무대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대참사야. 팬들에게도 멤버 중 한 명의 집이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는 걸 알려서 좋을 게 없어.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고, 그들이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며 모금이라도 하면 어쩔 거야.”
“네에, 그건 나도 있어선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집은 이제 빚이 없는걸요.”
츠무기의 의문을 표하는 말에 나츠메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황제 폐하가 선배를 버리면서 빚을 대신 탕감해줬지.”
“하하, 사실이긴 하지만 버렸다는 표현은 좀 그렇네요. 에이치군이 나쁜 사람 같잖아요... 으앗! 으... 나츠메 군?!”
나츠메가 츠무기의 옆구리를 때렸다. 츠무기는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감싸곤 나츠메의 얼굴을 쳐다봤다. 불쾌함을 넘어 약간의 분노마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내 앞에서 그녀석을 두둔하지 마!”
츠무기는 약간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하하 어쩔 수 없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나츠메의 얼굴을 응시했다. 나츠메는 그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에 불만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옆에 앉은 소라를 의식해서였다. 소라는 아직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다. 험한 말을 들어서 좋을 이유가 없었다. 선배의 옆구리에 리버블로를 먹이는 장면을 보이는 건 따로 생각할 문제였다.
“나쁜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선배의 어머님이 또 빚을 무지막지 쌓기 시작해 다시 빚더미에 오르면 어쩔 거야? 그러니 그 전에, 무슨 수를 내지 않으면 안 돼.”
“하하... 부정할 수 없는 말이지만, 아무리 어머니라도 일 년 만에 빚쟁이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릴 만큼 빚을 쌓진 않을 거예요. 맞벌이 가정이기도 하고요.”
츠무기의 말에 나츠메는 또다시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는 최근 츠무기에게 거절당하는 것에 쉽게 분노를 느꼈다. 츠무기가 에이치에게서 결코 작지 않은 도움을 받은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츠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버텨야 할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어렸을 때의 인연도 있었고 여기 학원에서 만나 알고 지낸 기간은 에이치와 츠무기가 알고 지낸 기간과 불과 5개월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지하서고로 내려와 자신과 대화를 나눴고 정을 쌓았다. 적어도 나츠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 차이는 뭔가? 츠무기를 형이라 부르며 따르는 동안 츠무기와 에이치는 자신을 포함한 오기인을 교내에서 고립시키고 오명을 씌워 비난받게 만든 주제에 뻔뻔스럽게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다’라며 자세한 내막은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와타루에게 ‘상당기간 동안 그는 내막을 모른 채 에이치의 계획을 수행했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츠무기는 변명하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잘못이고 어디까지가 이용당한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한 행동에 대한 속죄를 하겠다.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라고만 했다. 결국 텐쇼인 에이치를 향해야 할 몫의 분노까지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했던 말 그대로 에이치에게 던질 돌을 자신이 막아서서 대신 맞아주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츠메에게는 유닛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도움을 주겠다는 데도 사양이나 하고 있었다. 누구처럼 막대한 금액의 빚을 변재해주는 것도 아닌데도, 그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주겠다는데도. 에이치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해놓고선 나츠메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나츠메는 그것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런 일이 생길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 선배 주제에 건방지네. 일단 끝까지 들어.”
“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건 양육자의 의무죠! 얼마든지 얘기해주세요!”
나츠메는 다시 츠무기의 보디를 때렸다. 츠무기는 때린 곳을 정확히 다시 때렸다며 나츠메의 기술을 칭찬했다. 나츠메는 이마를 짚었다.
“애 취급 하지마. 이야기가 진전이 안 되잖아. 그보다도, 그래서 선배네 집에 찾아가서 어머님과 아버님을 앞에 두고 이 곡을 불렀으면 해. 마법을 걸겠지만 안 통할 가능성을 상정해서... 선배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우리 마미의 이름을 이용해서라도 앞으로 가급적이면 선배를 믿고 낭비를 줄여서 생계 곤란 지경까지 빠지지 않도록 설득하는 거야.”
“헤에...”
“그래서, 곡의 가사는 선배가 써줬으면 좋겠어.”
나츠메가 악보를 건네줬다. 츠무기는 웃었다. 소용없을 일을. 나츠메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일이었다. 에이치가 거액의 빚을 갚아줬을 때도 자신에게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하는 횟수는 이전보다 줄었으면 줄었지 늘지는 않았다. 에이치조차도 자신을 끼고서는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애당초 원인은 자신의 존재 자체였으므로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 한 어머니는 계속 그 상태일 것이었다. 물론 지금 상태가 좋다거나 손 놓고 있는 게 최선일 리는 없었다. 그의 뜻에 따라 어머니를 설득해 본다 해서 딱히 손해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또다시 실패를 목격하는 건 역시 심정적으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haha~ 선배네 집에 우리가 행복의 마법을 거는 건가요? 소라는 대찬성입니다~!”
스테이지가 끝났는지 소라가 뒤로 돌아보며 말했다. 천진한 목소리였다. 나츠메는 애정을 듬뿍 담은 손길로 소라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소라. 행복한 존재는 중독되지 않아. 마약에도, 알콜에도, 폭력에도, 점괘에도, 종교에도 말야. 소라의 말이 정답일지도. 더구나 행복의 마법은 우리 유닛의 캐치프레이즈이자 특기이기도 하니까. 소라는 똑똑하구나.”
츠무기는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에이치를 바라볼 때도 저런 눈빛을 했을까 하는 어렴풋한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시선과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는지 스스로는 알 수 없었다. 츠무기는 미소지었다. 어차피 자신은 더이상 상처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을 위해 굽혀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선량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결코 나츠메와 소라 앞에서 매몰차게 굴진 않을 것이었다. 거절은 모두가 떠난 뒤에 혼자 맞아들이는 걸로 충분했다.
“제가 가족에게, 주로 어머니께 할 말을 정제해서 써 달란 얘기죠?”
츠무기는 악보를 받아 들었다. 나츠메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츠무기를 올려다 보았다.
“임시로 쓸 가사니까 좀 미숙해도 괜찮아. 하지만 어머님을 확실히 감동시킬 내용으로 부탁해.”
“하하, 어렵네요. 알겠어요.”
츠무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실을 나섰다. 어차피 실패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충 하는 것은 성정에 맞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는 건 무리한 부탁일지도 몰랐다. 행복해달라 부탁하는 것조차도 그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자신이 어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랑이든 무엇이든, 어머니를 지금보다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어떤 이야기를 자신은 찾아야만 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거나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라면 불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조금은 고통을 더는 이야기라면 자신이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파릇파릇하니 신록이 돋아나는 봄날의 저녁, 그들은 츠무기의 집 거실에 나란히 섰다. 눈앞엔 츠무기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배다른 형은 사정이 있어 오지 못 했다. 츠무기가 가볍게 어깨를 떨자 소라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둘은 서로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부를 노래는 아카펠라로 편곡된 노래였다. 무대가 가정집 거실이란 것을 감안해 안무는 최소화하고 가창에 집중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연습을 하는 동안 츠무기는 즐거웠다. 자신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는 사람과 함께하는 경험은 조금 특별한 것 같았다. 아마도 행복했을 것이다. 츠무기는 어머니께 그런 행복을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님, 아버님, 한 곡뿐이지만 잘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특히 어머님께는, 이 곡의 가사는 선배가 혼자서 직접 썼다는 걸 염두에 두고 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이 곡으로 아드님인 츠무기 선배의 가능성을, 그리고 우리 Switch의 가능성을 봐주세요.”
나츠메가 말하며 신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츠무기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박수를 치며 그의 멘트를 환대했다. 츠무기는 미소지었다. 어머니는 비록 나츠메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일찍 집으로 와 공연을 보게 되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용서하건 아니건 가사를 적으면서 그는 전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그 말을 그녀가 들어주길 바랐다.
스피커로 피아노의 선율이 흘렀다. 제일 먼저 츠무기의 솔로 파트였다. 그리고 소라와 나츠메가 화음으로 그를 보조했다. 노래는 아름답게 이어졌다. 마치 부드러운 천이 직조되는 것처럼. 츠무기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같은 상처를 갖고 있죠
긴 밤도 상처를 살피는 데 부족했어요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죠
하지만 왜 죄 지은 마음이 드는 걸까요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 걸까요
모르는 건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모르는 건 우리가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에요
우리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에요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죠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 걸까요
모르는 건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모르는 건 우리가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용서를 구한다면 내가 용서할게요
무죄의 증인을 구한다면 내가 되어줄게요
당신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요
당신의 행복을 기도할게요
당신을 사랑해요
노래를 들으며 츠무기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깨를 안고 츠무기에게 반짝이는 눈빛을 보냈다. 아마도 성장한 자식의 모습에 감격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던 어린 츠무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주 어렸을 때,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애정을 갈구하던 그 모습이, 자신을 부르던 그 모습들이 마치 이어붙인 것처럼 연속적으로 떠올랐다. 그는 늘 어딘가 어수룩하고 외로워했다. 그건 자신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남편에게 억눌려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을 그녀는 외면했다. 외면해왔다. 자신은 같은 상처를 가졌기에 외면했는데, 그는 같은 상처를 가졌기에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던, 누구가에게 보여줄 수조차 없었던 그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보듬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의 인생은 속죄와 자기혐오와 자기방어로 이어져 있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속죄해야 할지 몰랐지만, 끊임없이 속죄를 이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속죄, 가족에게 강간당한 것에 대한 속죄였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한 것에 자신이 빌미를 제공했다는 끊임없는 혐의에 대한 속죄였다. 그것을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한 아들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준 것이다. 자신의 불행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이란 생각을,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에 죄가 없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녀는 서러움을 토하듯 울었다.
츠무기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정말 기대하지도 않았던 반응이었다. 언제나 자신은어머니에게 무가치한 존재거나 괴롭히고 해로운 존재이지 않았던가? 그는 조금 더 자신의 말을 건네기로 했다. 그녀가 다시 마음을 닫기 전에 말을 해둬야만 했다.
“엄마, 저는 그때 엄마가 모른 척했던 건 원망하지 않아요.”
츠무기가 다가와 내민 손을 그녀가 맞잡았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고 그녀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어떻게... 나는 널 외면했는데...!”
“아뇨, 잘못은 아버지에게 있죠. 날 강간한 건 아버지예요. 어머니는 그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라 생각해요.”
츠무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말투는 다정했지만 그 내용에 뒤에 서 있던 나츠메는 크게 움찔거렸다.
“나를 볼 때마다 어머니는 괴로웠을 거라 생각해요. 외할아버지... 아버지가 생각났겠죠. 당장 나를 받아들여달라, 날 사랑해달라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그만 어머니 자신을 용서해줬으면 좋겠어요.”
츠무기는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나츠메는 더 이상 거기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이상은 자신이 발을 들여선 안 되는 철저히 사적인 영역이었다. 그는 방에 들어가 있겠다며 소라의 손을 끌고 츠무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니? 알고 있었니...! 네가 외할아버지가 강간해 태어난 애란 걸...!”
그녀의 말에 아버지는 망연자실해 하다가 츠무기와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그는 마치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둘 다... 둘 다 너무 고생했어...! 고마워!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내 아내와 아들이 되어줘서 고마워!!”
“하하... 그렇게 말하면 죽는 게 당연한 것처럼 들리잖아요.”
“으어, 아니... 그런 의도가...! 나는... 나는... 상상도 못할 만큼 아팠을 테니까...! 츠무기! 여보! 허어엉... 고생했어...!”
아버지는 그 말을 마무리 지으면서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츠무기는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마에 키스를 퍼부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작고 따뜻한 바람이 그의 마음 속 작은 정원에 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같이 끌어안았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가 기력을 다해 거의 실신하듯 아버지에게 기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츠무기는 나츠메와 소라를 데리러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나츠메의 무릎을 베고 소라가 잠들어 있었다. 츠무기는 그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츠무기가 소라를 업고 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나츠메를 바래다 주기로 했다. 봄이 왔어도 아직 밤거리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츠메는 옷깃을 여몄다. 둘은 별다른 말 없이 골목을 걸었다.
“하하, 못 볼 꼴을 보였네요.”
침묵을 먼저 깬 건 츠무기였다. 그는 부끄럽다는 듯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못 볼 꼴 보인 게 한두 번이야?”
츠무기의 말에 나츠메는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울었는지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있었다. 눈가도 붉었다. 츠무기는 웃었다.
“분명 일이 이렇게 풀린 건 나츠메 군과 소라 군이 마법을 걸어줬기 때문이겠죠.”
츠무기의 말에 나츠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마법은 걸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반응한 것이 자신의 마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녀가 만약 마법에 걸렸다면 그건 츠무기의 마법이었을 것이다. 나츠메는 알 수 있었다.
달빛이 츠무기를 비쳤다. 어머니를 닮아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표정은 온화하고 다정했다. 나츠메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맑은 눈망울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섬세하면서 오뚝한 콧날이, 힘든지 약간 벌린 모양새 좋은 입술이, 갸름한 얼굴이, 바람에 흔들리는 보드라운 앞머리가 시선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나츠메는 원망했다. 먼저 만났는데, 자신이 먼저 마음을 허락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차라리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츠무기는 이렇게나...
차라리 그가 마법에 잘 걸리는 타입이었다면, 모든 것을 황제의 탓으로 돌리고 츠무기를 마음껏 사랑하고 행복의 마법을 퍼부어 현실이나 과거가 그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는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행복 아래서 츠무기가 진심으로 웃는 것을 지켜보며 함께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츠무기는 나츠메의 망상을 비웃듯 그의 마법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도 현실도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보호라곤 무의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고통 차단만을 겨우 유지한 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는 판타지 세계가 아닌 평범한 세계에 사는 평범한 개인이었고 그의 삶은 소설도 동화도 아닌 평범한 현실의 인생이었다. 과거의 고통도 잘못도 있었고 현재의 장점도 단점도 있었다. 누구도 그를 한 순간에 고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카사키 나츠메에게 한계를 뚜렷이 인식시키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앞에서 나츠메는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기껏 무언가가 된다면 과거 그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속죄 대상이 되었다. 결코 에이치처럼 존재 자체로 그의 행복이 될 수 없었다. 나츠메는 그게 싫었다.
“앞으론 어머님도 잘 해주시겠지.”
나츠메가 말했다.
“하하, 글쎄요. 한 순간 기분에 휩쓸린 거라고 봐요. 어머니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수는 있겠지만 없던 사랑이 갑자기 생겨날 순 없으니까요. 아마 앞으로도 나를 사랑해주진 않으실 거예요. 이래저래 포장을 해봤자 존엄을 짓밟히고 상처 입었던 과거의 증거에 불과하니까요.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거예요.”
츠무기는 웃었다. 자조인지 습관적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자식간이란 것만으로도 사랑하기엔 충분해.”
“네, 응당 그래야 하는 존재죠. 나는 어머니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와는 별개로 어머니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일에 대해서는 원망하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사정에 대해선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날 버리지 않고 계속 안고 있어준 것에도 감사하고 있기도 하고요.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원하고 있죠. 결국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은 얻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갈망일 뿐이겠네요. 끝없이 갈망하고 좌절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쌓아가요. 하지만 그래도 사랑해서 또다시 갈망하고 말죠.”
“인간은 혼자선 살아갈 수 없어.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하하, 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은 본능적으로 프로그램된 게 아니란 건 마음이 아프네요.”
나츠메는 마음이 아팠다. 츠무기가 정말로 마음 아픔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애석함이나 그 비슷한 감정은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거짓말을 한 날엔 자축이라도 해야 할 터였다. 적어도 자기 보호 기능이 일부라도 돌아왔다고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일로 나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긴 했네요. 내 일이었을 땐 안 보이던 게 남의 일이 되니 오히려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요. 뭔가 해결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택시에 타는 나츠메의 옆 자리에 소라를 내려놓으며 츠무기는 말했다.
“나츠메 군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나츠메 군은 상냥하네요.”
나츠메는 그 말에 다시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당장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신이 상냥한 게 아니었다. 츠무기가 강한 것이었다. 그는 사랑받아 마땅했다. 자신이 처음 그에게 시도했던 마법처럼.
“쓸데없는 소리 마. 내일 학교에서 봐.”
나츠메의 타박에 츠무기는 활짝 웃고선 택시에서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의 거리를 달리며 나츠메는 기도했다. 사랑받아 마땅한 자가 사랑받길.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자들이 행복해지길. 온 거리에 행복이 가득하길. 온누리에 축복이 가득하길. 단 하루뿐일지라도 행복의 마법 속에서 현실의 짐을 내려놓고 기쁨을 만끽하길. 흘러가는 네온사인의 물결 속에서 나츠메는 마법을 걸고 또 걸었다. 누구에게라 할 것도 없이. 그렇지만 아마도 한 명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