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혼자서 놀자!! 하며 쓰는 경향이 강한 어떤 것입니다.
봐주시면 감사하고 그렇지 않아도 사실은 상관은 없습니다. 아마 이쪽 관련 이야기가 앞으로 종종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해요.
뭐 그런 물건입니다!!!
보구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남빛 하늘에 유성우처럼 궤적을 그리며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무기들을 피하여 경찰들과 마법사들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부서지는 소리, 부딪치는 소리, 뛰어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매캐한 먼지 사이로 퍼졌다. 경찰차가 고철처럼 찌그러지고 아스팔트가 움푹 파였으며 온통 피와 고깃덩이가 튀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꼼짝도 않고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검은 라이더자켓을 입은 금발 적안의 남자였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앞에 쓰러진 한 남자에게 못박혀 있었다. 신부복을 입은 장신의 남자였다. 남자는 무릎을 굽혀 시신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피가 낭자하게 흘러 죽은 얼굴이 파리해져 있었다.
"얄궂은 일이다. 무수히 많은 세계에서 네 죽음을 느껴왔건만, 그것은 쓸쓸했을지언정 이런 슬픔과 분노를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과연 보고 듣는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것은, 죽음의 비명소리만큼이나 끔찍한 현실감을 갖게 한다."
슬픈 것도 같고 호기심이 어려있는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그는 고개를 약간 꺾어 시신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시신의 얼굴은 여전히 파리하니 무표정했다. 볼을 붙잡은 두 손으로 전해지는 체온은 계속해서 차가워져가기만 했다.
"죽은 자에게 집착하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군, 길가메쉬. 너답지 않다."
장신의 신부복을 입은 자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다가온 자는 시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마치 최고의 미주를 마시듯 그는 주변 상황을 음미하고 있었다. 길가메쉬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올려다보는 눈동자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기가 신부의 몸통을 뚫었을 뿐이었다. 그는 울컥 피를 토했다. 그러나 무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몇 차례 무기가 그의 몸을 뚫고 그는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길가메쉬는 다시 시선을 시신으로 돌렸다.
"키레..."
길가메쉬의 손길이 다시금 파리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보구의 비는 한동안 그칠 줄 몰랐다.
제목이 뭔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서번트 키레.
길가메쉬X키레
루비를 녹인 물이 완벽한 원을 형성했다. 두 겹으로 되어 그 사이에 룬어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안쪽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그려진,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마법진이었다. 토오사카 아유무는 일어서서 전체적으로 쓱 한 번 훑어본 후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캐스터를 그녀는 불러낼 참이었다. 평행세계를 오가는 스케일의 캐스터를. 그녀는 가보로 내려오던 아조트 검을 마법진 중앙에 올려놓았다. 얄쌍한 입술로 주문을 외자 마법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나오기 시작했다. 바람은 주문이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점점 속도가 늘었고 몸 속에 내재된 모든 마법회로들이 개방되어 거침없이 마력이 바람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토오사카는 계속해서 기어를 올렸다. 호리호리한 몸이 바람에 흔들릴 법도 한데 주문자는 꿈쩍도 않았다. 입술은 쉬지않고 주문을 외웠고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바람이 빛을 몰아내듯 어둠이 마법진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그런 어둠 속에서도 마법진은 불길한 붉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문이 막바지에 이르러 모여든 어둠이 완전해졌을 때 폭발하듯 어둠과 바람이 터져나왔다. 토오사카가 비틀거리며 몸의 중심을 잡고 있는 사이 바람이 다시 중앙으로 모여들며 마법진 위에 선 인물의 옷자락과 머리칼을 어지럽혔다. 아직 어둠이 남아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큰 키에,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쌌지만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는 탄탄한 몸을 보며 그녀는 감탄했다. 과연 완벽한 마법사란 심신을 모두 완벽하게 단련하는 것인가! 오로지 마법 기술에만 의존하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던 그녀에게 어둠 속의 인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묻겠다. 그대가 내 마스터인가?"
이 순간 토오사카 아유무는 승리를 확신했다. 전설적인 마법사의 전성시대와 조우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 했다. 어둠이 걷혀 위대한 마법사의 얼굴이 드러나자, 한 순간 그녀의 얼굴에 불안의 빛이 스쳤다. 그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긴 했지만, 상당히 동양적인 인상이었다. 혼혈인인 듯도 보였다.
"진명이 뭐지?"
토오사카는 대답 대신 소환된 서번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서번트는 심드렁한 얼굴로 평가하듯 그녀의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훑어보았다. 토오사카는 몸을 긴장시켰다. 죽은 듯 탁한 그의 눈동자가 향했을 때 그녀는 숨도 쉴 수 없었다. 무심하게 풀어내는 살기가 온 몸을 죄여왔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느껴본 적이 없던 압박감이었다. 그러나 곧 그의 시선이 아조트 검으로 향하고 그녀는 자신을 옥죄어오던 압박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정돈된 호흡을 내쉬려 애쓰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 남자의 입술이 완만한 호를 그리고 있었다.
"그래, 통성명을 해두는 게 서로에게 좋겠군."
그는 낮고 남자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토오사카는 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그가 말한 그의 진명은 토오사카 아유무를 경악케 하기 충분한 이름이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칼을 가진 어린 청년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고성의 서쪽 탑에서 그는 자신과 같은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한 여인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하얀 피부처럼 흰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게 치장된 붉은 벨벳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소 힘겨운 듯 비스듬히 앉아 불규칙적적인 호흡을 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하얀 속눈썹이나 창백한 입술은 마치 눈꽃이 그녀의 피부며 온몸에 달라붙어 그녀의 생기를 모조리 빼앗아가고 있는 듯 했다. 청년은 그녀의 모습이 보기가 괴로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율리안 C. 아인츠베른."
청년은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조심스레 그녀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가는 손가락을 들어 고개 숙인 청년의 머리칼을 찬찬히 헝클었다. 창밖으로 소리없이 북쪽의 눈발이 날렸다. 방에 비치된 벽난로에서 나오는 온기가 청년의 얼굴에 훅 끼쳤다. 하지만 방의 온기는 오로지 청년만의 것인 듯, 그녀의 얼굴은 흩날리는 눈발같은 얼어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년은 자신의 홍조를 그녀에게 나눠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누님..."
청년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성배의 그릇은 누님인데 저만 따뜻한 곳으로 가는 것은 안될 말입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갔다.
"누님도 같이 갈 수 있도록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크게 벌려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다시 불렀다.
"율리안, C. 아인츠베른"
청년은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거렸다. 주저하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그녀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 쪽으로 향했다. 손가락을 구부려 자켓과 셔츠를 후크처럼 걸어 당기자, 그의 하얀 목덜미 뒤로 붉은 흔적이 나타났다. 령주였다. 오른쪽 견갑골보다 약간 안으로 위쪽에 자리한 붉은 자국은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어떻게 보자면 방파제 같기도 했고 어찌 보자면 꽃무늬 같기도 했다.
"성배의 선택을 받은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그녀는 또렷하게 말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가서 싸워 성배를 쟁취하고 오세요. 그것이 당신이 아인츠베른의 이름을 이어받은 의미입니다."
그녀의 말에 청년은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곧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짓에 따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한 그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바닥에 깔린 동물의 모피를 밟고 소리없이 방을 걸어나왔다. 시중 드는 호문쿨루스가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키자, 그는 그녀를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눈 하나 깜짝 않는 호문쿨루스를 거기 두고 그는 복도를 걸었다. 발치에 걸리는 장식물을 걷어차고 거칠게 소리질렀다. 문 밖에서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던 호문쿨루스에게도 이런 식으로 뒤에서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아인츠베른의 인간들에게도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도 그저 소리없이 흩날리는 눈발에도 화가 치밀었다. 가슴에 쌓인 분노가 임계치를 향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곧 성배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분노를 풀 무대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율리안은 그때까지는 참아주기로 했다. 남은 것은 무대를 얼마나 즐기며 장악하느냐 뿐이었다.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소리없이 밟으며 걸었다. 그것은 마치 늑대의 걸음걸이 같았다.
윌리엄 그레이 아치볼트는 아버지에게서 냄비를 받았다. 냄비에는 수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치볼트는 냄비의 무게에 휘청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콧잔등에 간신히 걸터앉아 있던 뿔테 안경이 미끄러졌다. 아직 선이 가는 소년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이제 열 여섯이나 되었을까. 그는 아직 가는 팔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그리는 호의 중앙엔 거의 썩다시피 한 나무조각과 녹슨 은조각이 놓여 있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는 원을 찌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옆에선 아버지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하고 싶다만... "
아버지의 한숨 섞인 말에 원이 조금 찌그러졌다. 그는 아버지가 눈썹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마술각인을 모두 이양해버렸으니 이 집안은 이제 네가 책임져야만 한다."
아치볼트는 또다시 실수를 했다. 그는 재빨리 틀린 부분을 지워냈다. 손에 쥔 냄비는 어째선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 이식받은 마술각인이 몰입을 방해하고 있었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욕지기를 지껄였다.
케이네스 아치볼트는 아치볼트가의 종손이었다. 그리고 그는 4차 성배전쟁 때 자신에게 이어진 모든 마술각인을 끌어안고 죽어버렸다. 덕분에 아치볼트 가의 마술각인은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고, 그의 사촌이 갖고 있던 소량의 마술각인을 이어받은 육촌 조카가 아치볼트 가의 이름을 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당주가 되었고, 그 당주의 손자가 성배의 선택을 받게 된 것이다.
"네 어깨에 아치볼트 가의 재부흥이 달려있다."
아버지의 무거운 목소리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냄비의 무게만으로도 이미 그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윌리엄은 잠시 허리를 펴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무거워지는 수은으로 마법진을 계속 그렸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작업이 수 시간에 걸쳐 끝이 나고, 이상적인 형태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치볼트는 그제서야 무거웠던 냄비를 내려놓고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허리를 펴지 못 했기에 목구멍으로 공기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눈물이 비죽 나올 것 같았다.
"잘했다, 빌리. 주문은 다 외고 있겠지?"
"예, 예에...!"
"그럼 됐다. 빨리 주문을 외거라."
윌리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장 그의 자질을 평가받는 시간이 돌아왔다. 아버지가 준비해준 성유물을 매개로 아버지가 준비한 영령을 부를 준비는 이제 끝난 것이다. 영창 중간에 그가 혀를 깨물거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주문을 까먹는 일만 없으면 된다. 그는 한쪽 팔을 어깨높이로 들었다. 그의 아버지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마냥 새하얀 병실이었다. 세월의 때나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병실에 깡마른 소년이 누워 있었다. 움푹 꺼진 눈두덩이 아래로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와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가는 팔목과 손가락은 힘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창백한 안색에 하얀 환자복을 입고 흰 이불을 덮고 있는 방과 일체화된 소년. 그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이질적인 여자가 있었다. 오렌지색으로 염색하여 짧게 자른 머리, 반토막난 눈썹, 눈썹이며 귀며 코며 입술에 피어스를 주렁주렁 달고 검은 가죽 재킷에 가죽 핫팬츠를 입고 그 아래로는 찢어진 망사스타킹에 워커를 신은 여자였다.
그녀는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감회라고 해야할지 모를 피로와 닮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거대한 통유리를 더듬었다. 그것은 그저 차갑고 딱딱했다.
"웃기지 마."
그녀의 입술 한 쪽이 올라갔다. 한 손에 쥐고 있던 금속 클립보드가 구겨졌다. 꽂혀있는 종이와 클립보드가 마치 꽃의 모양처럼 될 때까지 그녀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시선을 내려 원래 종이에 적혀있던 '안락사 동의서'란 글씨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만족한 듯 클립보드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깡깡거리는 가볍게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그녀는 다시 시선을 소년에게로 돌렸다. 그녀의 마른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거기엔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죽지 않아."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년은 호흡을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여전히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죽이지 않아."
나직하게 읊조렸다. 소년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병실 앞에서 걸어 나갔다.
그녀가 내던지고 간 금속 클립이 형광등에 반짝였다. 참혹하게 우그러진 금속 사이로 종이 끄트머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곳에 적힌 날인은 '에미야 리츠'였다.
어둠의 내린 항구의 한 구석, 캐리어를 끌고 가는 한 여자가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굴러가는 캐리어에선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12cm 힐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걱정 마. 잘 할 수 있을 거라니까. 그런 걱정 하는 건 너 뿐이야."
그녀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짜증을 부렸다.
"내가 누구야.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있어. 이젠 가서 소환만 하면 돼. 성유물... 내가 그런 걸 구할 돈이 어디 있어? 재산은 오빠가 전부 가져갔다니까. ......... 괜찮아. 전략은 이미 다 짜놨어. 제대로 소환만 하면 돼. ............ 아니, 괜찮아. 내가 부를 수 있는 최선의 인선을 벌써 생각해놨어. 네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으니까 제발 걱정은 그만해. 끊어."
그녀는 귀에 꽂은 이어포드(ear pod)를 톡톡 두드렸다. 다시 정적을 되찾은 항구엔 스키니 진이 스치는 소리와 힐의 또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드문드문 설치된 조명 아래로 거침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은 46번 컨테이너 앞에서 멈췄다. 지문 인식 단말기에 손가락을 대자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풀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컨테이너 안은 텅 비어있었고, 오로지 마법진이 중앙에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캐리어를 끌어다 한쪽 구석에 놓고 주머니에서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꺼냈다. 날을 꺼내자 열려있는 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예리하게 빛이 났다. 사이즈는 작았지만 그 예리함만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마법진 앞으로 다가가 왼쪽 소매를 걷었다. 길고 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꽉 다문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얇아졌다. 그리고 나이프가 거침없이 왼쪽 팔뚝을 그었다. 선명한 붉은 피가 하얀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팔에 힘을 줬다. 피는 멈추지 않고 흘렀고, 그녀의 입술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닫아라(채워라), 닫아라(채워라), 닫아라(채워라), 닫아라(채워라), 닫아라(채워라), 되풀이 될 때마다 다섯 번. 그저 채워지는 각을 파각하라."
주문이 진행되며 마력회로가 대거 개방되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일 때면 마력의 소용돌이는 그 흐름을 더욱 격해져 그녀의 앞머리며 잔머리들을 거칠게 잡아 흔들어댔다. 왼팔에선 계속해서 피가 흘렀고 걷어낸 왼팔이나 그녀의 옷깃 사이로 마술각인이 빛나고 있었다.
"강림하는 바람에는 벽을. 사방의 문을 닫고, 왕관에서 나와 왕국에 이르는 삼차로는 순환하라!"
그녀의 목소리는 극적으로 변해갔고 주문은 절정을 맞이했다. 그리고 마력의 소용돌이가 물러났을 때, 그곳엔 진홍색 시스루 드레스를 몸에 두른 유달리 흰 피부의 여인이 서 있었다. 속이 비치는 드레스와는 대조적으로 선해보이는 큰 눈망울에 단정하게 올린 백금발은 묘하게 언밸런스한 느낌을 주었다.
"그대가 나의 마스터인가?"
붉고 작은 입술이 움직여 술사에게 물었다. 오싹할 정도의 미인인 그녀를 앞에 두고 술사는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나는 이성현. 당신의 마스터예요."
술사-성현은 손을 내밀었다. 서번트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마력으로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피ㅡ 처녀의 피로 성현은 의도하던 서번트를 의도하던 클래스로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에르제베트 바토리,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쇄살인마이자 마술사. 그리고 캐스터로서의 현계 강림.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 악수는 그 시작을 고하는 악수였다. 그리고 에르제베트는 군소리 없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병을 왼손으로 옮겨 그녀와의 악수에 응했다.
"마지막 서번트의 소환이 확인됐습니다."
묘하게 천진함을 띤 남자의 목소리가 사제실에 울렸다. 푸른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린 사내는 도색잡지를 펼쳐들었다. 귀에는 이어포드가 꽂혀 있었다.
"그런 말씀 하셔도 저는 일렉트로닉 브레인을 장치하지 않았으니까요. 교단에서 그렇게 냅두질 않았잖습니까. 제가 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있나요."
그는 도색잡지의 페이지를 넘겼다. 몇 살인지 모를 일본 아가씨들의 큰 가슴과 매끈한 엉덩이들이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마술협회에 제가 무슨 인맥이 있겠어요. 하루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었으니 제가 뭘 했으면 금방 알아챌 것을 무슨 짓을 하겠냐고요. 그냥 마술협회에선 전통 지키기를 좋아하나보죠. 핏줄이니 가문이니 하며 감독역으로 코토미네 가의 사람을 우겨대는 걸 보니 그런 모양이죠. 제가 출발할 때도 이 이야기를 했었고 똑같은 과정을 거쳐 똑같은 결과를 낼 거라 생각치 않으십니까?"
도색 잡지에 알 수 없는 경고문과 함께 "TOUCH!"라고 적힌 부분을 남자는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았다. 페이지 구석에서 3D 홀로그램이 튀어나와 남자와 여자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앙! 아! 아!"같은 일본 특유의 과장된 신음을 내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한 손으로 금발 고수머리를 쓸어넘겼다.
"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남자는 그 광경에 질린 듯 도색 잡지를 덮어 소파 바깥으로 내던졌다. 이어포드로 노성이 전해졌다. 남자는 심드렁한 얼굴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예, 예. 붙여주신 감시인은 잘 있어요. 목소리라도 들려드릴까요?"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검소한 신부복을 입고 목엔 묵주를 건 신부는 차분한 눈동자로 금발의 남자의 행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옙! 니콜라스 드 올텐시아, 임무 완수하겠습니다!"
그는 장난스레 경례 자세로 팔을 올려붙이며 과장된 톤으로 말했다. 하지만 곧 이어포드를 탁자에 내던지고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명백히 반감을 드러낸 얼굴로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렸다. 3인승 소파를 꽉 채우고도 모자라 몸을 웅크려 누운 그를 짙은 갈색 머리칼의 신부는 차분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도색잡지는 어디있지?"
금발의 신부는 아무렇게나 소파 바깥쪽을 가리켰다. 갈색 머리의 신부는 땅에 떨어진 도색잡지를 주워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넣었다.
"그 이야기는 왜 하지 않았지?"
갈색 머리 신부가 물었다.
"필요 없으니까."
금발의 신부가 답했다.
"주교님께는 다 보고해야 해."
"마음대로 해. 난 널 죽이고 도망칠테니까."
"네가? 날?"
갈색머리 신부는 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금발의 신부는 그를 잠시 돌아다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원래 자리로 돌렸다.
"잊고 있나본데, 계약한 건 나야. 영주라도 써서 널 죽이라고 명령하면 그만이라고."
금발의 신부가 손을 흔들흔들 흔들었다. 그의 손등엔 소용돌이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다른 신부의 눈에 혐오감이 깃들었다.
"세상을 위해 반드시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니키, 내가 널 죽일 수도 있다."
"어련하겠소. 잠이나 주무시지, 브랜."
브랜은 도색잡지를 휴지통에 쳐박고 니콜의 등을 발로 찼다. 니콜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가 침대를 향해 엉거주춤 걸어갔다. 그가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브랜은 책을 펴들고 소파에 앉았다. 침대 속에서 니콜이 박수를 세 번 치자 방 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