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납치, 감금 소재를 다룬 내용입니다. ※ 살인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 사이비 광신도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 폭력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주의 바랍니다.
콧속으로 햇볕에 말린 침대보 냄새와 섬유유연제 냄새가 밀려들었다. 볼은 딱딱한 바닥에 눌려 광대뼈가 시큰거렸다.
이세진은 눈을 떴다. 은은한 색깔의 실크 벽지를 바른 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시선을 돌려보자, 고급스러운 책상과 의자, 더블 사이즈의 침대, 벽지와 색을 맞춘 깔끔한 문이 보였다. 어딘지 몰라도 상당히 잘 사는 집의 학생 방인 것 같았다. 그는 몰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입에 볼개그가 물려 있었다. 팔은 뒤로 꺾여 결박되어 있었고, 다리도 족쇄가 채워져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팔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결박에서 벗어나려 해봤지만 지상에 나온 생선처럼 꼴사납게 몇 차례 펄떡였을 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게 대체...??’ 그는 온몸을 움직이며 끙끙 소리를 냈다. 다시 몸을 펄떡이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써봤지만, 손목과 발목이 철제 족쇄에 상처를 입는 결과만 낳았다. 그는 잠시 포기하고 기다란 몸을 웅크렸다. 볼개그에서 침이 흘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납치당한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어떤 새끼인지 모르겠네.’ 이세진은 아이돌이었다. 잘 나가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먹고 살고 가족을 건사할 정도는 버는 2군 아이돌. 최근 종영한 인기 드라마에도 출연해서 이제 슬슬 궤도에 오르는 중이었다. 멤버들과의 사이는, 부모님 후광을 업고 제일 마지막으로 합류한 멤버와는 조금 신경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사이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팬일까? 아니면 돈을 노린 납치? 아니야, 돈을 노리고 납치까지 하기엔 재산이 많아 보여. 조폭이라면 나보다 잘나가는 녀석들을 노렸겠지.’ 족쇄까지 준비한 걸 보면 제법 철저히 준비를 한 녀석이었다. 이 정도로 광적인 팬이라면 팬페이지나 SNS 등에 분명히 위험한 흔적을 남겼겠지. 자이롭은 수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팬이 많지는 않으니 납치 사실을 인지하고 며칠 이내로 자신이 어디 있는지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만은 1군 아이돌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납치를 감행할 정도로 과몰입한 팬이라면 여자일 가능성이 높아. 팬이면 고문이나 흉터가 남을 상처는 입히지 않을 테고. 며칠이면 구조되겠지... 그 동안만 버티자. 틈이 보이면 탈출하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진정하려 애썼다. 식사가 얼마나 나올지 알 수 없으니 결정적인 때를 대비해 체력을 아껴둬야 했다. 하지만 스트레스로 열이 오르는 것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대며 뜨끈해진 머리를 식혔다. 그때 소리도 없이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여자치고는 너무 크고 뼈대가 도드라진 발, 날씬한 발목 위로 하얀 청바지가 이어지고, 긴 다리 위에 몸에 딱 맞는 하얀 터틀넥 니트를 입은 키가 큰 사람이 들어왔다. “이, 일어났어?” 맑은 저음으로 그가 말을 걸어왔다. 세진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처음엔 여자인가 했지만 골격도 목젖도 목소리도 확실히 남자였다. 다만 얼굴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고 작은 얼굴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자리하고, 그 아래로는 긴 목이 이어져 니트 위로도 보일 정도로 쭉 뻗은 쇄골이 도드라져 있었다.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 아래로 날씬한 상체가 허리로 갈수록 좁혀들어가고, 좁은 골반 아래로 긴 다리가 보기 좋게 뻗어 있었다. 맹세컨대 이세진이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본 남자들 중 가장 아름다운 남자였다. ‘저렇게 생긴 애가 나는 왜...?’ 대단한 미녀였다면 납득할 수 있었을지 몰랐다. TV 속에 있는 이성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데 외모가 그리 대단히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대단한 미남이 나타나자 세진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 외모면 설사 상대가 남자라 해도 고백해서 실패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역시 돈 때문일까? 세진이 놀란 눈으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남자가 다가와 그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마, 많이 놀랐지? 미안, 너, 널 구하려면 이 수밖에 없었어.” 볼에 닿는 감촉마저 부드러웠다. 엄지로 턱에 묻은 타액을 훔쳐내고 웃는 얼굴이 싱그러워 세진은 무심코 시선을 빼앗겼다. “여, 여긴 우리집이야. 원래 살던 곳은 아니고 바, 방학 때 가끔 여기 와서 살았어.” 별장이란 소리였다. 묘하게 말을 더듬는 남자는 곧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동자로 세진을 보았다. 세진은 그 눈동자에 어쩐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거, 걱정 마, 세진아. 너, 너도 나랑 같이 구원받을 수 있을 거야.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커다란 창으로 비치는 햇볕을 후광 삼아 초월적 미남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세진은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그냥 미친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흉터나 고문은 없을 거라고? 일단은 살아남는 거나 생각하자. 그는 조용히 ‘며칠만 버티자’에서 ‘반드시 버티자’로 목표를 수정했다.
*****
눈을 뜨자 낯선 벽이 보였다. 먼지가 느껴지는 콘크리트의 질감이 볼에 철썩 붙어 있었다. 꽤 오래 그렇게 있었는지 광대가 조금 아파왔다. 그리고 이세진의 맞은편에 손발이 묶인 삼십 대 남자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묶여 놓고도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고, 입에 아무런 구속 장치가 없는데도 아무 소리도 없이 얌전하기만 했다. 납치당한 게 아닌가? SM 플레이?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가? 갑작스러운 동료의 등장에 이세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지하인 듯 창문 하나 없이 꽉 막히고 넓은 공간이 아홉 개의 기둥으로 지지되고 있었다. 제대로 마감하지 않은 듯 시멘트만으로 매끈하게 만든 공간엔 벽과 천장에 LED 등이 여러 개 설치되어 주변을 환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구나 집기라곤 철제 테이블과 멀리 벽에 딱 붙여놓은 목제 책상과 책꽂이 하나가 전부였다. 아니, 잘 보니 책꽂이 옆에 휠체어가 하나 있었다. 구석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을 보니 정신을 잃었을 때 휠체어에 태워 이곳으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세진이 볼개그를 꽉 물고 엘리베이터를 노려보고 있자, 땡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어 커다란 수납 박스를 안은 선아현이 안에서 내려 어둡고 차가운 콘크리트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아현. 그를 납치한 미남이 소개한 이름이었다. 나이는 24살 동갑으로, 무용 전공자라고 했다. 그리고 휴... 뭐라더라, 복잡한 이름의 사이비 종교 광신도이기도 했다. 이제 200일이 지나면 종말의 때가 온다던가. 그때가 오면 개종하지 않은 자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종말을 겪고,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했다. “나, 나는 세진이가 그렇게 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 개종을 하더라도 1년간 시련의 시기를 겪어야 진짜 신도로 인정받기 때문에 선아현은 다소 거친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냥 평범하게 전도를 할 수는 없었던 걸까, 세진이 생각하던 걸 읽었는지, 그동안 접근하려고 무진 노력했지만 전부 차단되었다고 말해왔다. ‘우리 소속사, 돈만 축내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제대로 일하고 있었네.’ 그 말에 느낀 세진의 감상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선아현의 제의는 역시 사이비답게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다. “99일간 진정한 신도의 정액을 몸으로 받아들이면 시련의 기간 없이도 진정한 신자로 거듭날 수 있어. 세진아, 나, 날 받아들여 줄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남자가 그 말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세진은 볼개그 때문에 말도 할 수 없으면서 온몸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 꽉 막힌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몸을 펄떡이고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에 아현은 긴 속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순종적인 어투로 대답했었다. “으응... 알았어.”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세진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바퀴가 달린 철제 테이블을 이세진 쪽으로 돌돌 끌어온 아현이 박스를 테이블 위에 놓고 거기서 날카롭게 빛나는 식칼을 꺼냈다. 그리고 실실 웃는 낯선 남자를 바로 눕히고 셔츠를 천천히 벗겨냈다. 손가락이 길고 하얀 손이 푸른 셔츠를 걷어내고 맨살을 더듬자 남자는 기분이 좋다는 듯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세진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긴장한 상태로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긴장감에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푹, 식칼이 남자의 갈비뼈 사이를 한 번에 찔렀다. 남자의 몸 속에 들어갔다 나온 칼은 선명하게 빨간 피로 완전히 적셔져 있었고,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윽!” 소리 한 번 내더니 몽롱한 눈으로 다시 아현을 올려다 보았다. 칼에 찔린 자국에선 심장이 뛸 때마다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아현이 세진과 눈을 마주쳤다. “으읍! 으으으읍!” 세진은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하지만 보드라운 손길이 자신을 일으켜 남자의 앞으로 끌고가는 것을 막아내지 못 했다. 뒤에서 끌어안듯 세진의 손을 감싸 함께 식칼을 잡고 남자의 심장을 겨누는 동안 세진은 고개를 한껏 도리질 쳤다. 세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남자의 가슴을 겨눈 칼이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구역감이 올라왔다. 정신이 든 지도 얼마 되지 않았건만 극도의 흥분으로 숨이 찼다. 바깥 소리가 멀어지고 자신의 숨 쉬는 소리가 고막 안쪽을 가득 채웠다. 누워서 피 흘리는 남자의 외설적인 얼굴이 각막에 박혔다. 자신의 손을 감싼 아현의 손이 점점 강하게 칼을 쥐어왔다. “으읍! 으으읍! 흐으으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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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아, 아-” 날이 새로 밝았다. 선아현은 세진을 식탁 머리에 앉혀놓고 숟가락으로 밥을 먹이고 있었다. 비록 음식은 구운 치킨과 레토르트 두어 가지에 생으로 썬 채소와 즉석밥을 추가한 정도였지만, 먹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세진은 얌전히 입을 벌렸다. 아현은 작게 쪼갠 치킨을 반 숟가락이 채 되지 않을 만큼 뜬 밥 위에 얹어 세진의 입에 넣어줬다. 그리고 깔끔하게 입안에 모두 들어간 것을 보고 해사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볼개그를 뺀 참이었다. 먹을 것을 입에 넣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세진은 기계적으로 입안에 들어온 것을 씹었다. 짭조름하게 나온 육즙과 감칠맛, 고기 씹히는 느낌이 기꺼웠고, 그 감각이 끔찍했다. 어제 사람을 죽였는데 사흘 만에 먹는 음식이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반가움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그리고 살아있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서, 고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최대한 감정을 죽이기로 했다. “어제... 그 사람은 왜 죽인 거야?” 오랜만에 꺼낸 말다운 말이 거칠거칠했다. 아현은 사슴 같은 눈망울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모, 목소리가 엉망이야. 물 마셔야겠어.” 아랫입술을 쓸던 손가락이 떨어지고 대신 물컵이 다가왔다. 세진은 주는 대로 얌전히 물을 받아 마셨다. “구, 구원을 받으려면 진정한 신도가 돼야 해.” 조심스럽게 컵을 기울여주며 세진이 마시는 것을 살피던 아현이 말했다. 그는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를 받는 건 시, 싫다고 했으니까, 부, 불신자의 피로 믿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어.” 말하는 데 신경을 분산시켜서일까, 물이 넘쳤다. 발작적인 기침이 나고 세진의 입가로 물이 흘러내렸다. 등이 들썩이도록 기침을 하고 얼굴이 붉어졌지만 팔다리가 결박되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도로 들어갈 뻔한 물이 도로 나올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기침하고 있자, 아현이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
* 원작과 비슷하지만 다른 패러렐입니다. * 남성 임신 소재가 나옵니다. * 오리지널 캐릭터가 나옵니다. * 오리지널 세계관을 차용합니다.
0. 아니, 이 세계관은?
21세기 뎨한민국엔 다른 곳과 다른 특별한 점이 있었다. 20세기 말에서부터 21세기 극초반까지 젠더 갈등이 극한에 다다른 결과, 남과 여로 완전히 갈라진 것이다. 그들은 장벽을 세우고 동부는 여성들을 위한 곳으로, 서부는 남성들을 위한 곳으로 분리했다. 물리적으로 아예 남녀가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물론 동부가 여성들에게, 서부가 남성들에게 떨어진 것은 젠더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이 서울 및 경기도를 차지하기 위해 억지로 나눈 결과에 불과했다. 동부는 태백산맥 때문에 가용부지도 적었으니까. 하지만 동성으로만 이루어진 집단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재생산의 문제. 아이는 누가 낳느냐는 문제. 이 문제를 남성국가인 뎨한민국은 병역의 의무처럼 출산의 의무를 일반 국민에게 부과하면서 해결하게 되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이었다. 과학 기술 만세! 분리되기 전부터 남성체에 자궁을 이식하는 방법이 개발되어 남성의 임신이 가능해졌다. 다만 남성체의 회음부에 여성기를 만들어 여성의 출산을 무조건 모방하기보다는 한때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으로 유행했던 오메가버스의 세계관을 차용하여 직장에 질과 자궁을 연결했다. 대충 오메가와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생리나 페로몬 같은 건 없다. 뎨한민국 국민들은 만 25세까지 출산의 의무를 지고 누구와 가지든 애를 임신, 출산해야 했고, 만 25세까지 임신하지 못 했을 경우 군대로 끌려갔다. 그러할 경우 복무기간은 8년이었다. 물론 월급은 줬다. 징병제를 하던 대한민국 사병들보단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자부할 수 있다. 8년 임기를 보장받은 직장이랄까? 임신한 남성은 4개월간 임신기간을 거치고, 직장으로 출산유도를 하거나 제왕절개를 실시한다. 그렇게 바깥으로 꺼낸 아이들은 정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필요한 만큼 자라다가 국가의 보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크게 된다. 즉, 인구는 생산하지만 출산의 의무에 육아의 의무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여성들에 비해 너무 꿀 빠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뽕빨을 위한 세계관이니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정착한 뎨한민국 남성들의 출산 메커니즘은 이런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학교를 통해 국민들은 일괄적으로 잠재력 검사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잠재력의 등급을 받게 되는데, 결과는 EX등급이 아니면 정부의 서류에 기입되기만 한다. 타인이나 본인이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EX등급은 어떻게 되는가? 국위선양을 위해 자궁 이식을 면제받고, 출산 의무에서 벗어나게 된다. 대신 다른 의무에 직면하게 되는데, 더 우수한 인류 생산을 위해 그들은 만 35세까지 셋 이상의 아이를 ‘만들어야’한다. 그러니까, 자궁을 가진 이들에게 열심히 정액 제공이나 하란 얘기였다. 물론 명백히 기본권 침해였다. 하지만 대부분 묵살되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남자들이 그 의무를 받아들이고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여성들로 이루어진 대햔민국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출산의 의무를 져야 하는 아이돌 이세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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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문대
문대가 은근슬쩍 세진을 찔렀다. 영상을 보던 패드에 자신의 메시지 알람이 뜨는 것이 보였다. 세진은 그걸 잠깐 보는 듯하더니 폰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영상 봐. 문대문대는 할일 없어? 그렇지 않을 텐데~?
안 그래도 일하고 있었다.
오오, 역시 믿음직한 문대! 믿고 있어!
그리고 영상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봤다. 문대는 왠지 조바심이 느껴져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나도 EX다.
으음, 그렇구나! 좋겠다!
그리고 대화가 끊겼다. 문대는 이마를 짚었다. 이세진은 박문대를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결심을 이미 하고 있었다. 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박문대라면 스케줄 맞추기도 쉬웠고 굳이 만나러 바깥에 나갈 필요도 없었고 시간 낭비도 되지 않고 신뢰할 수도 있는 EX였다. 이세진에게 더 할 나위 없는 상대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키 때문에? 키를 신경 쓴다면 안타깝게도 이세진은 구할 수 있는 대상이 지극히 제한될 터였다. 그리고 이세진이 그런 걸 신경 쓸 성격도 아니었다. ‘비밀 만들었다고 그렇게 화를 내놓고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우리 친구 아니냐고 해놓고선. 다른 사람한테 비밀을 먼저 알렸다고 그렇게 화를 내놓고선. 베프니 뭐니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놓고선. 빙의니 회귀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박문대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순순히 믿어놓고선. 그렇게 오랫동안 목을 매고 집착했던 꿈도 박문대를 앞에 두고는 포기할 수 있다고 해놓고선. 그렇게 원치도 않던 신뢰를 일방적으로 퍼붓고선 막상 이세진 본인은 그런 문제에 있어 자신에게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게 화가 났다. 박문대에게도 의무는 있었다. 만 35세까지 아이를 셋은 만들어야 했다. 어떤 멍청이들은 남자는 머리와 하반신이 따로라서 욕구를 풀기 위해선 아무하고나 할 수 있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박문대는 아니었다. 현 시점에서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상대는 이세진밖에 없었다. 이세진뿐이었다. 이세진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선택지인 녀석이 다른 사람을 찾고 있다는 사실에 속이 끓어올랐다. 비록 이세진이 주로 문대에게 치대고 문대는 싫지 않은 척 받아주던 세월이 길었다 하더라도, 비밀을 털어놓고 서로 장난을 치는 걸로 이제는 서로 신뢰와 우정의 무게가 같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무슨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둘은 그룹 멤버이자 친구일 뿐, 성관계로 묶일 만한 상대인가 묻는다면 그도 그렇게 할 말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여태까지 그렇게 신뢰와 애정작을 해놓고서 다른 상대를 고른다니 그것도 상도덕에 어긋나지 않나? 억울해진 박문대의 머릿속엔 이런 생각만이 맴돌았다.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생각에 고통받다가 이세진이 드디어 태블릿을 끄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다 골랐다 이거겠지. 문대는 대상을 탔을 때 핸드폰이 방전될 정도로 울려대던 세진의 핸드폰을 떠올렸다. 그렇게 쌓아놓은 인맥이 그가 고른 대상에게로 연결해주겠지. 그리고 그렇게 만난 돼먹지 않은 새끼가 이세진을 만지고, 안고, 앞으로 1년간 빈 스케줄을 공유하고 독점할 것이다. 박문대는 어쩐지 참을 수 없어졌다.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보면 박문대는 이세진과 뒹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큰달을 살리기 위해 진행 중인 앨범 작업을 마무리하고 활동을 하고 미국 시장을 뚫고 업적을 만들어야 했다. 섹스는커녕 바쿠스가 필요할 때였다. 하지만! 문대는 태블릿을 놓았던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옆 좌석에 앉아 자고 있던 래빈이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자신의 손에 큰달의 존재 여부가 갈린다. 그러니 먼저 정신을 차리고 미국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준비를 하고... 그 후에 이세진의 문제를 해결해야... 저쪽은 목숨의 문제고 이쪽은 기분의 문제니까. 이세진이 딴놈이랑 좀 물고빨고뒹군다고 해서 당장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씨발. 문대는 다시 한 번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꽉 문 이로 뿌득 소리가 났다. 동시 진행을 하면 왜 안 되는 건데? 동시진행이 꼭 퀄리티의 저하라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일을 두 개를 하든 세 개를 하든 일정 퀄리티로 마감을 치는 만화가들도 있다. 박문대, 혹은 테스타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냐. 주먹을 꽉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문대형님,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래빈이 걱정스럽게 물어왔지만 문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 뿐이었다. 그는 앞으로 해야 할 일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훑었다. 동시에 간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동시에 가는 방법뿐이다. 등을 두들겨주는 래빈의 손길을 느끼며 문대는 굳게 결심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세진의 옆으로 박문대가 따라붙었다. 원래 잘 맞는 콤비였으니 자연스레 옆에 함께 서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이번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박문대 딴에는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고 붙었는데, 세진이 흘끔 눈으로만 보더니 픽 웃었다. 평소엔 눈치를 채더라도 이런 식으로 무안을 주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이러는 걸 보면 이미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다 눈치를 깠다는 뜻이었다.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빨라서. “어우 참, 너무~ 든든하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 그러셔?” “내가 뭐만 하면 무슨 의도가 있을 것 같냐?” “흐응, 문대는 좀 더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세진은 은근히 대화를 즐기고 있는 눈치였다. 문대는 좀 더 곁에 붙어서 대화를 나누었다. 가방을 찾고, 공항에서 마주친 일부 팬들의 함성소리를 듣고, 국제공항을 가로질러 출구로 나왔다. “핸드폰 좀 빌려줘.” 문대가 세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세진은 눈을 샐쭉하게 뜨고 문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본인 것 쓰세요. 멀쩡한 본인 것 두고 내건 왜?” “배터리 다 됐어.” “그럴 리가. 비행기 좌석에 충전기 꽂을 콘센트도 있고 충전잭도 있었는데 천하의 박문대가 핸드폰 배터리를 안 챙겼다고?” “...... 그렇게 됐다.” 믿지 않는 세진에게 문대는 까맣게 꺼진 핸드폰을 내밀었다. 관절이 약간 불거진 크고 긴 손이 핸드폰을 받고 전원 버튼을 누르는 사이 문대는 그의 외투 오른쪽 주머니를 털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어느 주머니에 핸드폰 넣는지 다 봐뒀지! 살을 내주고 뼈를 치는 전법으로 문대는 이세진의 핸드폰을 탈취했다. “문대!!” 이세진이 손을 뻗어 왔지만 날렵하게 피한 문대는 도로를 살폈다. 리무진 버스가 오고 있었다. ‘모 아니면 도!’ 핸드폰을 되찾으려 다시 손을 뻗는 것을 피하는 척하며 도로에 실수인 척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앗 소리도 내기 전에 버스 바퀴가 핸드폰을 깔아뭉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뒷바퀴가 확인 사살을 했다. 콰칵, 핸드폰이 부서지는 반가운 소리가 울렸다. 이세진은 물론이고 둘이 몸싸움 하는 것을 장난이라 생각하고 그저 방관하기만 했던 테스타 멤버들 전원 눈이 둥그래져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세진의 얼굴에 짜증이 오른 건 물론이었고, 배세진과 김래빈의 얼굴엔 경악이, 멤버 간의 갑작스러운 사고를 뇌가 받아들이길 거부한 듯 영혼 없이 인자하게 웃고 있는 얼굴의 류청우, 뭐가 그렇게 와우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신 와우를 외치는 차유진과, 입을 틀어막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뭔지 모를 표정을 지은 선아현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하다. 내가 새로 사줄게.” 문대는 짐짓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의였다는 건 둘 다 알고 있지만 주변엔 타인들도 있었다. 멤버들, 팬, 입국 스케줄에 맞춰 나온 기자들... 이세진은 어쩔 수 없이 웃으며 “그래, 최신형 제일 비싼 걸로 사줘야 해!”라며 농담을 지껄였지만 입꼬리가 떨리고 있었다. “포, 폰 필요하면 빌려줄까?” 옆에서 아현이 자기 폰을 빌려주겠다 했지만 세진은 거절했다. 숙소까지 가면서 잠깐 자면 돼~ 거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시무룩해진 세진의 허리를 아현이 감싸 안고 위로하듯 툭툭 쳤다. 그 사이 문대는 도로에서 부서진 이세진의 핸드폰을 주웠다. 위험하다고 청우가 말렸지만, 저속 구간이었다. 핸드폰이야 워낙 작으니 안 보였다 치더라도 사람을 못 보고 칠 일은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요즘 주소록은 구글 아이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세진을 보며 문대는 차가운 눈으로 화장실 문을 닫았다. 솔직히 할 말도 없었다. 괜히 속이 타는 것 같아 베란다로 나가 숨을 들이켰다. 뭘 하는지 알면서도 굳이 문을 연 것은 문대였다.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을 문을 열어 확인한 이유를 자신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한숨을 몇 번이고 쉬었지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글거렸다. 왜 하필 이세진인가. 테스타의 활동 방향을 정하는 것은 소속사와 테스타 본인들이다. 테스타 본인들이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문대가 일단 말을 꺼내면 큰세진이 어린 양들을 그쪽 방향으로 살살 몰아가는 그림에 가까웠다. 테스타가 큰 문제없이 여태까지 잘 굴러온 데는 큰세진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당장 여기 멤버 중 누군가는 다른 인물로 바뀌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녀석이 누군가에게 꽂히는 건 상당히 곤란했다. 그래, 상당히 곤란했다. 그룹의 미래를 위해서. 문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었다. 기실 세진은 그룹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도움을 준 것이 많았다. 아플 때마다 제일 먼저 발견해줬던 것도, 알아서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류건우의 생일을 챙겨준 것도, 굳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채고 움직여주는 것도 이세진이었다. 박문대가 되고 처음 아팠던 그때 자신을 붙잡던 손길을 아직도 기억했다. 꽤 오래 지난 일이었음에도 어디에 어떻게 닿았는지, 열로 들뜬 머리에 닿던 서늘한 손이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특별한 누군가가 생긴 것이다. 눈에 열이 올랐지만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자 머리가 삐걱대며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세진의 주의를 빼앗기는 것은 위험했다. 혀...? 현? 형?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세진의 핸드폰 주소록에 있을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완전히 정복하기 전에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무엇으로? 문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는 동안 베란다 문이 열리고 세진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조심스럽지만 날렵한 몸짓으로 문대와 약간 거리를 둔 곳에 나란히 섰다. 문대가 노려보자 조금 겸연쩍어 하는 얼굴을 한다. “손 씻었다, 문대야~ 두 번 씻었어.” 세진은 손을 깨끗이 씻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손바닥을 쭉 폈다. 베란다 난간 바깥에서 하얀 손바닥이 흔들렸다. 그 모습에 문대는 손 씻었으니 괜찮지 않냐며 평소처럼 자신에게 다가올 거라 생각했지만, 그걸 전달하기만 하면 만족한다는 듯 세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난간에 팔을 괴고 고개를 돌려 바깥을 쳐다볼 뿐이었다. “...... 들었지?” 답지 않게 잠긴 목소리로 세진이 물었다. 문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썹을 조금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미소는 탑재한 채였다. “싫겠지. 같은 팀 멤버한테 이런...” 문대는 어깨를 굳혔다. 같은 멤버? 만약 ‘형’이었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지. 문대는 신물이 울컥 올라오는 감각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 반응을 본 세진은 혀를 찼다. 쓸데없는 정보를 줬다는 걸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걱정마. 이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게 금방 죽일 거야. 첫 울음을 터뜨리기도 전에 숨통을 틀어막아 흔적도 없이 묻어버릴 거야.”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흩뜨렸다. 조금 과격해진 언사가 조금 낯설었다. 그래도 그에겐 아직 한 치의 여유가 남아 있었는지 입가는 호를 그리고 있었다. 감정이 죽인다고 잘 죽여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문대는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공시생들이 한 해, 혹은 그 이상을 꼴아박아 공부해놓고 눈짓 한 번에 흔들려 스스로 사랑의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말아먹고 마는 것이다.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니었고 한두 명 본 것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어떤 유혹보다도 강력하다. “얼마나 된 거야?” 문대는 조용히 물었다. 세진은 다시 한 번 씩 웃고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얼마 안 됐어.” “......” 문대는 머리를 굴렸다. 신용할 수 없는 대답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얼마 안 됐다면 다행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자극에 눈 돌아가면 잊어버릴 가능성. 지고지순한 사랑이면 모르겠지만, 방금 전까지 그도 자위를 하며 이름을 부르고 있지 않았는가. 애당초 조금만 자극을 주면 벌떡벌떡 일어나는 20대 초반의 남자애들을 한 곳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생긴 상황이었다. 그러니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주면 된다. 그러니까 성욕 말이다. 문대는 세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형형한 눈빛에 세진은 한 걸음 뒤로 물어났다. “워, 문대문대, 눈빛 장난 아닌데? 경멸하진 말아줄래? 금방 수습한다니까~” 실없는 얼굴로 말을 흘리는 세진에게 문대는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오히려 당황한 세진이 거리를 벌리려 하자 힘을 줘서 팔을 붙잡았다. (이어지지 않는 페이지입니다)
“청우형님, 오늘도 찢어주셨습니다! 캬~” 세진이 갑자기 청우에게 도망치기 전까지는.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갑자기 청우 옆에 딱 붙어 있기 시작했다. 대기시간이 길어져 이 기회에 화장실에서 풀게 나오라고 눈빛을 보내도 무시하고 옆에 붙어 있거나 혼자 있을 때 슬쩍 다가가면 교묘히 말을 미끄러뜨리면서 청우에게로 다가갔다. 청우가 개인스케줄이나 매니저와의 대화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때면 차유진과 김래빈을 끼고 있었다. 음방 대기중 세진이 화장실 갈 때 슬쩍 따라 나서면 김래빈을 끌어들여 셋이 같이 화장실에 가게 되는 웃기는 그림을 연출했다. 그러면서도 슬쩍 면박을 주면 당황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피할 거라면 처음부터 거절하든가, 몇 번이나 붙어먹어놓고 이제 와서 피하는 건 또 무슨 상황인지. 문대는 냉장고 속 보리차를 허락도 없이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뭐라 한 마디 할 줄 알았는데 청우 옆에서 앞으로 출연할 예능을 모니터링하며 딴청을 부린다. 참자. 참아야 한다. 문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솔직히 큰세진이 선아현을 찾지 않는 것만 해도 꽤 큰 성과가 아닌가? 애당초 자신이 큰세진에게 수작질을 한 것은 선아현에게서 시선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었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당히 컨트롤 가능한 성욕 해소’를 위한 행위에 의미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세, 세진아, 그 바지 편하고 시원해 보여. 사, 3부 바지야?” “아니, 4부인데 이 형이 다리가 워낙 길어서~ 하하” 옆으로 길게 드러누워 허벅지를 허옇게 내보이고 텔레비전을 보던 세진에게 아현이 다정하게 말을 걸고 세진은 또 능청스럽게 받아주는 꼴을 보니 속이 끓었다. 문대는 무표정을 가장하고 보리차를 냉장고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박문대는 그토록 기다리던 이세진과의 독대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날은 단체스케줄이 없어 다들 개인 스케줄로 뿔뿔이 흩어지고 웬일로 문대와 세진이 스케줄이 빈 것이다. 아니, 말은 바로 하자. 원래는 문대도 스케줄이 있었지만 열흘 전 매니저에게 은밀히 부탁해 취소했다. 방송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아니면 새벽에 시작된다. 쉬는 날이었지만 문대는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나 세진의 방을 쏘아보았다. 파랗게 동이 트는 창을 배경으로 멤버들이 부산스럽게 씻고 챙겨 나가는데도 세진은 방 안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래빈이나 아현이 방을 오갈 때마다 문틈으로 보이는 그 모습에 문대는 속으로 혀를 찼다. 누구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자서 눈이 퀭해지고 있는데 누구는 두 다리 쭉 뻗고 팔자 좋게 자고 있다니. 심지어 짝사랑하는 대상이 같은 방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한가? 다른 멤버들이 스케줄도 없는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며 더 자라고 한 마디씩 남기며 나갔지만 잠은 요만큼도 오지 않았다. 그저 소파 위에서 조용히 이세진이 방 밖으로 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11시가 되자 방에서 비척비척 세진이 나왔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눈이 조금 부어 있었고 머리는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다만 아이돌에게 수염자국은 언어도단이라며 제모해놓은 턱은 평소처럼 깔끔했다. “어, 문대, 스케줄은 캔슬이야? 선배님 다 됐네~?” 문대의 눈에나 보일 정도로 아주 잠깐 당황했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부엌으로 들어갔다. 음성이 갈라지는 걸 보니 아주 숙면을 취한 모양이었다. 천연덕스럽게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시는 동작은 일견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문대의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겼다. “잠시 얘기 좀 해.” 흐응. 문대의 말에 세진은 코끝을 울렸다.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문대 덕분에 나는 이제 마음의 정리를 다 끝냈어. 그러니 이제 그런 짓은 더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싱크대에서 컵을 씻은 세진이 가벼운 투로 말했다. 순간 문대는 자기도 모르게 욕을 할 뻔했지만 아래로 꾹꾹 눌렀다. 지금 화를 내봤자 상대에게 피할 명분만 준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은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글쎄, 단둘이 이야기 할 기회가 없어서 그만 그렇게 됐네. 하하.” 그 기회를 없앤 것은 다름 아닌 세진 자신이었다. 기싸움을 하자는 것인가? 평소의 능수능란한 혀는 어디로 가고 대뜸 회피를? 덕분에 잠을 못 잔 것까지 합쳐서 분노게이지가 슬금슬금 위험수위에 다다르고 있었다. “미안, 나는 좀 더 자야할 것 같아. 문대문대 너도 좀 더 자~ 수면부족은 피부미용의 적이라잖아~” 세진은 그런 그의 마음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휘적휘적 손을 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턱, 문이 닫히지 못하고 중간에 막혔다. 무표정했지만 열받은 게 분명한 문대가 문간에 서서 힘으로 문을 붙잡고 있었다. “......” 예상하지 못했는지 세진은 약간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잠깐의 대치상태. 그리고 굳이 힘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세진이 얌전히 문에서 물러났다. 문대는 뒤로 물러나는 그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방에 비해 넓어서 셋이 쓰는 방. 그래서 침대도 나란히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세진은 그 중 가장 왼쪽의 자리에 긴 팔다리를 접고 앉았다. 베개 옆에 놓인 블루투스 이어폰과 핸드폰을 보니 그의 자리인 것 같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난 이제 마음 정리가 끝났다니까.” 세진이 손으로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문대는 그의 맞은편, 가운대 침대에 앉아 침대를 한 손으로 쓸었다. 베개 옆엔 사슴 인형과 쿠션이 놓여 있었다. 누구 침대인지는 자명했다. 가슴이 콕콕 쑤셨다. “흠, 매일 밤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잠들면서 말이지.” 뿐만 아니라 팔 뻗으면 닿기까지 한다. 언제든 장난을 빙자해 손댈 수 있는 거리. 은밀히 연심을 담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그렇게 닿는 것을 방을 같이 쓰는 두 사람은 알아채지도 못 했겠지. 문대는 당연히 김래빈이 가운데 자리에서 자고 있을 줄 알았다. 서열에 민감한 연예계 분위기에 따라 테스타도 겨우 한 살 차이에도 존대와 반말이 오가고 있었다. 양쪽의 소음 모두를 감당해야 하는 가운데 자리는 당연히 막내 몫이 될 줄 알았는데, 아현이 동생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해준 모양이었다. 정말 쓸데없는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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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본무대는 두 시간 후에 하실게요!” 리허설이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오며 세진은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인영을 발견했다. 중간보다 조금 큰 키의, 무대의상을 입은 남자였다. “아” 몰라볼 수가 없었다. 세진을 데뷔조에서 밀어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테스타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고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엔 약간의 반가움과 긴장이 섞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여기 기다리고 계시죠?” 청우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저, 이세진 씨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요..” 단정하고 예쁘장한 얼굴만큼 매끄러운 미성이었다 .세진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로 쏠렸다. 다들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한 사람이라도 기억했다면 누구에게서든 백업이 들어왔을 터였다. “하, 이 몸의 인기란. 먼저들 들어가세요.” 세진은 능청을 떨며 멤버들을 대기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몇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지만 몇은 들어가지 않고 둘을 쳐다보았다. 쳐다보고 있네. 세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남자를 복도 끝으로 데려갔다. “네, 말씀하세요.” 세진은 창을 옆에 두고 그에게 용무를 재촉했다. 남자는 망설이는 듯 손톱 끝을 서로 부딪치며 아랫입술을 잠시 깨물었다. 눈동자는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뭐하자는 거야. 짜증이 치미는 만큼 깊이 웃었다.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일까. 사회생활 따위 다 때려치고 대기실로 들어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 했던 말이 상대에게서 튀어나왔다. “미안해요!”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뒤통수에 눈이 달렸을 리 없으니 남자는 세진의 반응을 모른 채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쥬오인 그룹을 책임질 후계자로서 쥬오인 카즈오는 본사 빌딩을 방문했다. 스케줄에 따라 직원의 안내를 받고 본사 주요 부서들을 돌아봤다. 일하던 직원들은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한-비록 정장을 빼 입긴 했으나-카즈오를 힐끗 보곤 다시 일에 집중했다. 직원들은 이미 카즈오가 올 것이란 것을 주지 받은 듯했다. 한 명 정도는 다가와 “무슨 일이니? 길을 잃은 거니? 보호자는 어디에 있니?”라고 물어볼 만도 했건만 다들 그의 존재를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괜히 눈에 띄었다가 불이익을 받느니 가만히 있는 게 동양인의 미덕이었다. 카즈오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장실로 가는 길엔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복도는 고풍스럽고 딱딱한 디자인이었지만 벽으로 막힌 그늘을 벗어나면 한쪽 전면이 티 한 점 없는 유리로 되어 햇볕에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간간이 있는 유리의 이음새로 빛이 투영되어 붉은 바닥에 얇고 가는 일곱 빛깔의 프리즘 기둥을 만들었다. 카즈오는 그 복도를 걷는 동안 마치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늘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햇볕이 모든 것을 따스하게 비추고 푹신한 카펫이 모든 소리를 잡아먹었다. 창밖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고요히 존재하고 있었다. 카즈오는 하늘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 창밖으로 누군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나이가 든 사람이었다. 카즈오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외롭고, 괴롭고, 무서운 얼굴이었다.
“보면 안돼!”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직원이 카즈오의 눈을 가리며 복도 안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시야가 차단된 그의 귀로 직원의 불안한 숨소리와 이를 악 다문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카즈오는 이어서 틀림없이 둔탁한 충격음과 비명 소리가 들려올 줄 알았다. 적어도 누군가 뛰어와 상황을 알리는 고함 소리라도 들릴 것이라 생각했다. 불안감에 카즈오는 눈을 꼭 감고 직원의 품에 의지했다.
그러나 기대한 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5분쯤 지났을까? 복도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평소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품위가 있었다.
카즈오를 놓아준 직원은 이사장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길 망설이고 있었다. 원래의 스케줄대로라면 그를 이사장실로 안내하고 벌써 자신의 부서로 복귀했어야 했다. 하지만 투신자살이 일어난 상황에서 어떤 연락과 지시가 오가고 있을지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문을 두드려도 되나 직원은 한참을 망설였다. 카즈오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나긴 시간이 지나고 이사장실 문이 안쪽에서부터 열렸다. 풍채가 당당한 노인이 카즈오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왔니, 카즈오? 혹시 험한 걸 보진 않았겠지? 할애비는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의 거친 손이 카즈오의 정수리를 헝클었다. 그리고 그는 직원에게 낮은 소리로 지시했다.
“경찰보다 기자가 먼저 올 테니 얼른 카즈오를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나가게! 지금 당장!”
그의 지시는 명료하고 단호했다. 직원은 카즈오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돌아본 할아버지의 얼굴엔 피로의 그늘이 져 있었다.
카즈오는 집으로 돌아와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몇 달 전 실각한 전무의 라인으로, 이전에는 꽤나 중요한 일들을 맡아 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직급은 차장으로, 전무가 실각한 이후부터는 아무런 일거리를 받지 못 했고 자리는 사무실 구석 화장실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이동되었다. 부서는 1인 부서였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아무도 함께 밥을 먹어주지 않았다. 가족들은 자녀의 유학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다고 했다. 그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했다고 한다.
“안 되는 걸 알면 차라리 빨리 포기하고 나가버리지! 죽는 것보단 그게 낫잖아! 집에 눈치 볼 사람도 없구만 왜 붙잡고 있다가!”
어머니는 혀를 찼다. 너무 매정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차라리 모두 놔버리고 쉬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집을 팔고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갔어도 좋았을 텐데. 혹은 자녀들의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방법도 있었다. 무엇이든 죽음보다 나쁜 것은 없었다. 카즈오는 유리창 너머로 봤던 얼굴을 떠올렸다. 외로운 얼굴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카케루는 자신의 방을 찾아온 히로를 반갑게 맞이했다. 히로는 킹컵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얼굴에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그가 그렇게 피로를 달고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지만 카케루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워낙 큰 일을 치른 직후였다.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자신의 방을 찾아올 때 히로의 목적은 보통 세 가지로 압축되었다. 1.게임이거나 2.프라모델 조립이거나 3.구하기 힘든 프리즘쇼 블루레이 감상 중 하나거나 둘이거나, 혹은 셋 모두 해당되었다. 때론 후배 주제에 너무 좋은 침대에서 자는 거 아니냐며 가끔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아주 가끔뿐이었지만. 그가 침대에서 낮잠 자길 원한다면 자신은 게임이나 하며 침대를 내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모처럼 휴일인데 여기 오셨네요. 게임이라도 할까요?”
카케루가 말을 꺼내자 익숙한 듯 히로가 TV대에서 콘솔용 게임기 패드를 두 개 꺼냈다.
“뭐 새로 산 거 있어?”
“글쎄요. 2인 되는 걸로... 아! 좀 옛날 게임 해볼까요? 괴혼이란 건데.”
“아, 왕자가 굴려서 덩어리 붙이는 거?”
히로가 아는 척을 했다.
“아시나봐요?”
“그런 게 있다는 것 정도는. 엄청 오래된 거 아냐? 플스2?”
“잘 아시네요. 그걸로 할까요? 아니면 평소처럼 철권이나 길티기어로 할까요?”
“아냐, 괴혼 해보자.”
히로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 게임이 딱히 내켜서라기보다는 다른 선택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한 것 같았다. 카케루는 게임 소프트를 챙기러 히로의 옆에 앉았다가 의아한 얼굴로 그의 옆얼굴을 봤다. 확실히 격투 게임은 기력을 소모한다. 피곤할 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여기 왜 온 것인가?
“1인용이라도 괜찮으면 니어 오토마타라도 할래요? 아니면 한숨 잘래요?”
카케루가 슬쩍 잔다는 선택지를 내밀어 봤다. 그러나 히로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는 싫어. 괴혼 하자.”
“좋은 선택이에요!”
히로의 대답에 카케루는 깊숙이 넣어둔 플레이 스테이션2를 꺼냈다. 주섬주섬 TV와 게임기를 연결하는 그의 뒷모습을 히로는 멍하니 앉아 쳐다봤다. 눈동자엔 조바심과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
“다 연결했으니까 켜면 돼요. 난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어, 어어...”
카케루는 뭘 마실지 묻지도 않고 방을 나섰다. 히로는 게임기를 켜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믿음직해 보일 때가 많았지만, 때론 너무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킹컵 직전이 특히 그랬다. 오죽했으면 아직 초등학생 같아 보이는 유우가 그를 걱정할 정도였다.
카케루 본인은 그때 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안심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도망은 차라리 괜찮았다. 그런 이들은 어떻게 되든 삶을 이어나가기는 한다. 비참한 인생이든 다시 빛나는 인생이든. 카케루는 추락 자살 사고 이후로 몇 건의 자살 사건을 더 접했다. 거래처의 거래처 사장의 자살, 라이벌 업체 연구실 직원의 자살, 하청 기업 노동자의 자살... 다행히 쥬오인 홀딩스는 카케루가 목격했던 자살 사건 직후 이사장이었던 할아버지가 책임지고 사퇴하면서 자살 방지를 위한 시스템을 공고히 해둔 덕분에 일 문제로 자살하는 직원은 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카케루는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트라우마처럼 뇌리에 남아 그와 비슷한 표정을 발견하면 언제고 튀어나와 우울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쩌라고. 그렇다고 내가 뭘 해줄 수 있단 말이야? 돈? 그래서 돈을 주면 그 뒤는 어떻게 되지? 당장의 위기를 피하더라도 스스로 설 의지와 능력이 없으면 일회성 도움은 그들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아. 오히려 그들은 내게 의존하려 하고 지속적으로 돈을 달라 하고 스스로 일어설 기력을 잃게 되지. 내가 그런 꼴을 한두 번 본 줄 알아? 투자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거야. 차라리 빨리 넘어져 버리는 편이 그들에게 훨씬 나아. 카케루는 시니컬한 얼굴을 하고 그에게 대꾸했다. 차라리 도망쳐버려!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가 때로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카케루에게는 없었다. 특히나 히로에게는 더욱 그랬다.
기숙사 식당 냉장고에서 음료를 두 개 꺼냈다. 히로가 늘 마시던 것과 자신의 것. 소음 때문에 방에 들이지 않았지만 이럴 때는 조금 아쉽긴 했다. 자신의 방을 찾아온 히로를 혼자 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내가 마시던 걸 알았어?”
음료를 건네받은 히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거 있으면 늘 이거 드셨잖아요.”
카케루는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히로는 건네받은 음료를 잠시 매만졌다. 그 모습에 카케루는 아차 싶었다. 자신이 히로에게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 음료가 어디서 났느냐는 질문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것과 히로가 좋아하는 이 음료는 때가 되면 카케루가 챙겨뒀다. 히로가 마시고 싶을 때 어디 헤맬 필요 없이 여기서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냥 마시는 게 불편하면 나중에 자신에게 돈을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자신이 챙겨뒀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기숙사 냉장고엔 항상 이게 있구나 하고만 생각해주길 바랐다.
“저도 좋아하거든요.”
카케루는 안경을 밀어올리며 덧붙였다. 히로는 웃었다.
“고마워.”
둘은 게임을 시작했다. 시나리오는 손톱만한 크기의 왕자가 술 마시고 필름이 끊겨 별을 부순 부왕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 별을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시작에 둘은 약간 웃었다. 그리고 작디 작은 왕자는 자기 몸보다 큰 구체를 굴려 물건들을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책상 위에서 문구류를 붙이면서 시작되었다. 압핀, 지우개, 메모지, 작은 장난감 등을 붙여갔다. 그리고 둘은 곧 거리로 나갔다. 온갖 것들이 붙었다. 펜스도 붙이고 맨홀 뚜껑도 붙여 덩치가 커지고 무게도 불어난 덩어리는 곧 사람도 붙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붙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덩어리는 또다시 사람들을 붙이고 붙이고 또 붙여서 더욱 더덩치가 커졌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젖소도 황소도 자동차도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갔다. 둘은 웃었다.
“그러고보니 이거 제목이 『카타마리(덩어리) 다마시이(영혼)』였지?”
유원지의 관람차를 붙일 때 즈음 해서 히로가 물었다. 아직 건물을 붙이던 카케루는 여유 없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했다.
누가 더 큰 덩어리를 만드냐 경쟁은 결국 섬을 넘어 크라켄까지 붙인 히로의 승리로 끝났다. 카케루는 앓는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히로는 하하 웃었다.
“한 판 더 해?”
히로가 묻는 말에 카케루는 손사래를 쳤다.
“좀만 쉬었다 해요. 기력 회복할 시간을 줘요.”
카케루의 말에 그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누워서 쉬는 카케루의 얼굴을 힐끔힐끔 보았다. 카케루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깊이 한숨을 쉬고 술렁대는 가슴을 도닥였다. 그와 함께할 때면 항상 이랬다. 정신 차리자, 카즈오. 이런 마음을 가져도 되는 상대는 자신과 다른 성별을 가진 생명체야. 지독하게 연습벌레에 향상심의 화신 같은, 그렇지만 가끔은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고 싶어지는 같은 성별의 선배가 아니라. 스스로 되뇌인 생각이 조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카즈오”는 효과가 좋았다.
“있잖아.”
히로가 운을 떼는 소리에 효과가 다 날아가 버렸지만. 카케루는 태연을 가장하기 위해 조금 긴장하며 그를 올려다 봤다. 그의 표정에도 긴장의 흔적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그는 말을 망설이다 입을 다물곤 표정을 전환시켰다.
“도대체 이 게임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무생물이고 생물이고 사람들이고 전부 모아서 별을 만든다는 발상이라니!”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말 돌리긴. 카케루는 약간 섭섭함을 느끼며 허리를 일으켰다.
“글쎄요, 외로웠던 것 아닐까요?”
“외로워서?”
“다들 사무치게 외로워서, 외로워하는 흩어진 사람들을 강제로라도 모아 구르고 구르다보면 외롭지 않을 거야. 그렇게 굴러가다 보면 위대함도 태어나겠지. 그런 거 아닐까요?”
“인류보완계획 같은 말이잖아?”
히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니 이해는 되네.”
그는 쉬는 동안 타이틀로 돌려놓은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케루는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외로움은 그에게 특히 사무치고 극복하기 어려운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가 오버 더 레인보우 멤버들을 대하는 태도에 그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사업은 동향 분석이고 눈치 싸움이었다. 오랜 기간 경영에 몸을 담가온 카케루에게 히로의 허세는 마치 통유리로 된 카페의 벽 같았다. 안이 훤히 보이지만 자신은 바깥에 서서 그저 보기만 한다.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 카페에 자신이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도 드러내지 않은 채, 누군가 카페에 대해 말을 걸어오면 그가 바깥에 내놓은 메뉴판의 안내 글귀에 대해서만 얘기한다. 결코 자신이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카케루는 히로를 그렇게 대해왔다. 다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가끔은 죽도록 외로워도 혼자 끌어안고 있기만 해서 옆에서 도와줘야만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까요.”
카케루는 오늘 그에게 완곡하게 자신의 관심을 슬쩍 드러냈다. 히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말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한테 실망했어?”
순간 카케루는 숨을 멈췄다.
“네? 킹까지 되어놓고 그 무슨 말씀이세요??”
“비꼬는 거야?”
“아니,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어서 하는 말이에요.”
“너...”
히로는 한숨을 쉬었다. 카케루에게 그는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킹컵 전 잠적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이후 훈련을 같이 하면서 이전보다 후배들과 훨씬 친해졌는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케루는 그게 신기했다. 그를 보는 후배들의 시선이 킹컵 이전과 이후로 얼마나 달라졌는지 당사자가 눈치를 못 채다니. 이전엔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막연히 ‘저 사람은 잘 하는 사람’, ‘원래 대단한 사람’ 같은 평가를 받았다면, 지금은 훨씬 뜨겁게 지지와 열망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대고 “나에게 실망했어?”라니, 자신을 몰라도 얼마나 모르는 사람인가. 카케루 자신이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기는 쉬운 사람이지만 이해는 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히로 선배는 필요한 때 필요한 걸 한 거예요. 그러니 실망할 이유도 비난할 마음도 없어요.”
상대가 다른 사람, 이를테면 코우가미 타이가 같은 사람이었다면 모른 척 말하기 싫어하는 그 연유를 굳이 스스로 말로 하게끔 만들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히로가 꺼내기 힘들어하는 말을 굳이 꺼낼 필요가 없게끔 먼저 대답했다. 하지만 히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뭘 말하고 있는지는 알아?”
“네, 알아요. 1월에 말없이 잠적했던 거 말이죠?”
히로는 카케루의 말에 불편한 얼굴을 했다.
“히지리 대표에게도, 너희들에게도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해. 비난하는 것도 그 때문에 실망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그래서 언제든 사과를 하려고 해왔었어. 여태까지 아무말도 못 했지만.”
“흐응”
카케루는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히로가 머리 숙이는 그림을 상상하니 그다지 기분이 유쾌하지 않아졌을 뿐이었다.
“히로 선배가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말했다시피 선배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행동을 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나도 선배에게 실망할 이유도, 비난할 이유도,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어요. 다른 애들도 그럴 걸요?”
“필요한 때 필요한 행동은 약속을 이행하고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거야! 나는 에델로즈의 신뢰도를 추락시켰고 팬들에게도 불안감만 조성했어! 너희들에게도 걱정이나 끼치고... 내가 그때 코우지를 찾아갔던 걸 후회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때 내가 했어야 했던 건 그게 아니었던 거야!”
카케루의 말에 히로는 울컥 화를 냈다. 카케루도 그 말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특히 ‘그때 코우지를 찾아갔던’ 부분이 그의 신경을 거칠게 긁어댔다.
“히로 선배, 화내지 말아요. 나는 내가 생각한 걸 말했을 뿐이에요. 에델로즈의 신뢰도는 선배가 킹이 되면서 회복시키다 못해 오히려 대폭 올랐어요. 로즈 파티 때 쉬겠다고 팬들에게도 공지를 제대로 했었고, 대회 이후 여태까지 쉬지도 못 할 정도로 일했잖아요. 이 정도면 열일한 거 아닌가요?”
“결과만 좋으면 무조건 다 좋다는 식으로 말 하지마! 아니면 뭐야? 실망도 하지 않았다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야?!”
카케루는 덥석 히로의 손목을 잡았다. 눈은 히로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분노로 눈앞이 하얗게 변해가는 와중에 이성이 가장자리에서 겨우 펄럭였다. 이성의 깃발에 적힌 문구는 ‘소리를 지르지 마라, 쥬오인 카케루!’가 전부였다.
“내가 차가운 사람인 것 같나요?”
카케루가 조용히 말했다. 히로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후배의 눈을 당황해서 쳐다봤다.
“외로움과 불안을 우습게 보지 마요. 그걸로 사람이 죽기도 해요.”
히로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히로 선배가 잠적했을 때 나 좀 안심했어요. 너무 몰려있던 것 같아서. 기대와 책임과 불안과 외로움에 압사당할 것 같아 보여서. 도망쳤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죽지는 않을 것 같아서! 어쩌면 이 사람은 여기까지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죠. 그럼 거기까지가 히로 선배의 프리즘쇼 인생인 거예요. 그 뒤로는 다른 인생을 살겠죠!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카케루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돌아와줬을 땐 기뻤죠! 너무 기뻐서 정신 못 차리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뭘지 필사적으로 찾을 정도로! 그리고 히로 선배가 킹이 되었을 땐 내가 한 그 무엇도 히로 선배가 나한테 준 것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될 정도였어요!”
“카케루...”
“지금 나한테 가장 가치 있는 건 히로 선배예요! 그러니 히로 선배는 내 우상으로서 나이가 들어 연골이 마르고 닳을 때까지 잘 살아줘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내 투자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지 말아줘...요...히로...선배...”
카케루는 말끝을 흐리면서 히로의 손목을 놓았다. 말을 전부 토해내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하게 되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불이 날 것 같았다. 히로도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었다. 카케루는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을 구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 식은땀 나는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시켜야 하는데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떡하지? 히로의 약간 붉어진 얼굴에 사고가 극단적으로 날뛰었다. 표정이라도 정돈하고 싶은데 얼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목에서 끄으으 하는 억눌린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때 어쩔 줄 몰라하는 카케루를 히로가 덥석 끌어안았다.
“???!!!!!”
갑자기 얼굴이 히로의 가슴팍에 묻히는 바람에 고개가 아팠다. 히로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카케루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히로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히로의 완력이 만만치 않았다.
“나를 그렇게 조... 동경해주다니, 고맙다, 카케루! 나는 기쁘다!!”
“히로선...!”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아아! 살아온 보람을 느껴!”
히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진심? 진심으로?? 카케루는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약간의 안심과 허무함과 의구심이 한데 뭉쳤다. 그래서 어쩔 거야?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한 문제였다. 상대에게 답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약간의 좌절감과 슬픔과 자괴감이 섞였다. 그 색은 체념과 닮아 있었다.
히로가 카케루를 놓아 주었다. 카케루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눈가가 붉었다. 입꼬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부분이 그의 감동 버튼을 누른 건지 당장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카케루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히로의 손이 카케루의 팔을 잡고 있었다. 셔츠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체온이 올라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는 웃었다. 갑자기 안았던 것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카케루도 덩달아 복잡한 표정으로 웃게 됐다.
“아, 나 이제 방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코우지가 오면 신곡을 맞춰보기로 했어서...”
“아, 네.”
카케루의 대답에 히로는 서둘러 손을 뗐다. 뒤로 돌아 콧물을 한 번 삼키고는 빠른 걸음으로 카케루의 방문을 향했다. 도망가는 게 명백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카케루는 안심했다. 회피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답이 없는 문제에서는 답이 나올 때까지 잠시 도망가 있는 것이 상책인 경우도 있었다. 허리에서 힘이 빠졌다. 카케루는 뒤로 풀썩 쓰러졌다.
“도망치는 것이 상책인 경우도 있다.”
카케루는 되뇌었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 선배에게 투자한 것이 아니라 에델로즈를 구한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 선배의 가능성에 걸고 에델로즈를 구했다. 이제 에델로즈에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나는 결코 선배를 위해 프라이드를 되찾아준 것이 아니다. 핑계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카케루는 히로의 옆에 남아있기 위해 히로에게서 도망치기로 했다.
히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기타를 만지고 있던 코우지가 그를 반겼다.
“어서와, 히로.”
그러나 코우지의 인사에도 대답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침대에 쓰러졌다. 그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숨죽였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코우지는 기타를 침대 옆에 세웠다.
“무슨 일 있었어?”
히로는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베개에 고개를 처박고만 있었다. 코우지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다시 기타를 손에 쥐었다. 그때 히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그렇게 감동적인 말은 처음... 아니, 코우지한테 팀 같이 하자고 들었던 거 이후로 처음이야.”
“응?”
“울 뻔했잖아. 꼴사납게. 후배 앞에서.”
“히로,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래? 알아듣게 얘기를 해봐.”
코우지는 다시 기타를 놓고 그를 향했다. 히로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이따금씩 뭔가를 깨달은 듯 뒤통수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았다. 눈은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츠토모...!”
“응?”
“이츠토모 그룹! 얼마 전에 쥬오인이랑 계약 체결했다고 그랬지?!”
“어? 어.. 쥬오인과 프리즘 관련으로 기술 협약 맺었다고...”
“으...! 투자란 게 그거였냐고!”
히로는 머리카락을 붙잡고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주먹으로 베개를 몇 번인가 치고 좌우로 데굴데굴 몸을 굴렸다.
“왜...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쥬오인이 뭐라 그래?”
“아니...”
히로는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후배 주제에 건방지게 키다리 아저씨 같은 짓이나 하고 그걸 여태까지 입 다물고 있었던 것도 그랬고, 거기에 얹어 평소의 가벼운 말투는 어디로 가고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라느니 안위를 걱정했었다느니 고백 같은 말들을 쏟아내질 않나, 손목을 잡은 손도 쳐다보는 눈도 뜨거워서 히로는 그가 전하는 것들을 그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백억...”
히로는 중얼거렸다. ‘투자’라고 했다. 프라이드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데 드는 비용. 히로의 가능성을 믿고 에델로즈에 투자했다손 치더라도 히로가 킹이 될 수 있었을지 여부는 불투명했다. 컨디션은 엉망이었고 마음은 너덜너덜했고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단순히 에델로즈를 구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자신의 순서가 오기 전에 미리 변제해둘 필요는 없었을 터였다. 겸사겸사라고 해도 좋았겠지만, 카케루가 욱해서 내뱉은 말엔 ‘내가 원한 것은 히로 선배를 위한 프라이드 사용권’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히로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솔직히 어느 쪽이라 해도 히로에겐 대단히 기쁜 선물이 되었겠지만, 에델로즈보다도 ‘프라이드’를 선택했던 자신이었다. 말하자면 게임 전에 가져다 준 음료와도 같았다.
“어쩐지...”
왜 실격 처리가 되지 않았나 했다. 히로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귀가 빨개, 히로.”
코우지가 다가와 히로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다정한 친구의 고마운 마음씨였다. 평소였다면 이걸로 마음이 안정되었을 텐데 히로의 가슴 속 동요는 사그러들 기미가 들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대고 숨 쉬기가 힘들었다. 자신의 가치를 얘기하던 카케루의 얼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히로는 베개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갔다. 베루 때도 이런 감정이었던가? 떠오르지 않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늦겨울의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는 자그만 목련꽃봉오리가 돋아나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공이 데굴데굴 굴렀다. 공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작은 결정에 부딪쳐 몇 번인가 튀어오르기도 하면서 경쾌하게 굴렀다. 놀이터의 모래도 건너 사람들이 걷는 보도를 건너, 그리고 건너 건너 고무 공은 공원 수풀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공을 놓친 아이는 검은 눈을 깜박이며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줄기차게 달린 공은 계속해서 굴러 수풀의 깊은 곳으로 아이를 유인했다. 울창하고 거대한 나무 뿌리에도 멈추지 않았던 공은 크고 검은 늑대 앞에서 의지를 갖고 마침내 멈춰 섰다. 공을 좇던 아이는 늑대를 앞에 두고 얼어 붙었다. 두 발로 서면 남자 어른 만큼은 될 법한 덩치와 두툼한 앞발, 사납게 부푼 검은 털,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카롭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위협적이었다. 아이는 숨 죽인 채 꼼짝 못 하고 늑대를 쳐다보았다. 찰나를 길게 늘인 침묵이 이어졌다. 늑대는 귀를 뒤로 바짝 넘기고 경계의 눈으로 아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긴 털은 마치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아이는 곧 늑대가 달려들 것 같아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툭 아이는 하마트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늑대가 아주 조금이지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비명 대신 공기 새는 소리를 내는 데 그쳤던 것은 비명을 지르기엔 너무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맥이 탁 풀려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아이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아이는 늑대를 올려다 봤다. 늑대는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아이의 볼을 코로 밀었다. 아이는 뒤로 넘어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늑대는 유순하게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믿을 수 없어 늑대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손을 들었다. 늑대는 아이의 손을 슬쩍 피했지만 여전히 아이의 옆에 서 있었다. 아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일어섰다. 늑대는 따라 오라는 듯 아이가 왔던 길로 걸어갔다. 몇 걸음 걷다가 아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듯 뒤로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는 늑대의 안내를 받아 공이 들어왔던 길로 무사히 돌아왔다. 수풀 너머 빛의 세계가 보였다. 아이는 가만히 서서 자신이 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늑대를 돌아보았다. 늑대는 여전히 늠름하고 잘생겼지만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늑대를 꼭 끌어안았다. 늑대는 아이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아이가 스스로 팔을 풀어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고마워, 늑대야! 안녕! 또 보자!" 아이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있는 빛의 세계로 나아갔다. 늑대는 아이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늘이 끝없이 이어지는 수풀이었다.
파앙 하고 손바닥 전체로 배구공을 때리는 파열음과 공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배구화의 고무바닥이 마룻바닥과 마찰하는 소리, 선수들의 구호 소리, 가볍게 공을 올리는 소리, 그리고 또다시 손바닥으로 배구공을 때리는 소리와 배구공 튀는 소리가 천장이 높은 체육관 안 가득 울렸다.
“나이스! 다음!”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토스가 올라가자 덩치 큰 사내 녀석이 펄쩍 뛰어 팔을 휘두른다. 나풀거리던 공은 순식간에 힘이 실려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무게가 무색하게 바닥에 날카로운 충격을 가한다. 스파이크다. 방금 때린 녀석은 그걸로 만족한 것 같았지만 토스를 올린 쪽은 그다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을 먹은 듯 찝찌름한 표정을 짓더니 대기 자리로 넘어가려는 녀석을 부른다.
“킨다이치!”
“예?”
“잠깐만, 쿠니미, 네가 스파이크 연습 마지막이지?”
갑자기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예에...”
“그럼 쿠니미 뒤로 가서 서 줄래? 쿠니미 다음에 몇 번만 더 해보자. 괜찮지?”
남자, 그것도 운동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붙임성 좋은 말투로 말을 걸어온다. 3학년이니 1학년에겐 그냥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면 될 일이지만 그는 그런 화법은 쓰지 않는다.
“예... 그렇게 할게요.”
킨다이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뒤에 와서 섰다. 복 터진 녀석.
“다음, 쿠니미!”
“예!”
그의 손끝에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솟아오른다. 놀라울 정도로 나에게 맞춘 토스였다. 학기 초에 그가 발목을 삐는 바람에 연습을 같이 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내게 토스를 맞추는 데는 시간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기분 좋게 올라오는 토스, 중학교 때의 카게야마나 그의 공석을 겨우 메꾸던 야하바 선배의 토스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나의 차례가 넘어가고 킨다이치가 다시 네트 앞에 섰다. 그가 토스를 올렸다. 평소 킨다이치의 타점보다 높은 공이었다. 당연히 킨다이치는 헛손질을 했고 공은 허무한 포물선을 그리며 킨다이치의 옆으로 날아갔다. 킨다이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안돼, 킨다이치. 무릎 더 굽혀야지. 발바닥만으로 뛰지 마. 엄지발가락까지 써봐. 자, 다시!”
그가 웃으며 말했다. 킨다이치의 얼굴은 반대로 진지해졌다. 킨다이치가 다시 뛰어올랐다. 이번엔 공이 손바닥에 확실히 닿아 기분 좋은 파열음을 내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모두의 시선이 킨다이치와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 좀 낮았네. 다시 해보자.”
이번엔 조금 더 높은 공이 올라왔다. 킨다이치는 그 높이에 잠시 긴장하는 것 같더니 공에 닿기 위해 최선을 다해 뛰었다. 몸이 탄력적으로 튀어 올랐고 공을 치는 파열음이 울렸다. 정확한 높이였다. 그는 씩 웃고는 킨다이치의 등을 툭툭 쳤다.
“잘했어. 앞으로도 키가 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자자, 수업 늦겠다! 이제 그만 스트레칭!”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박수를 치며 모두에게 아침 연습 종료를 알렸다. 하지만 부원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킨다이치와 연습한 지 얼마나 됐을까? 감독이나 코치진도 알지 못했던 킨다이치의 최고 타점이었다.
“오이카와 선배, 제가 토스 올릴까요? 선배도 한 번 치시죠.”
와타리 선배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어깨를 풀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한 번 쳐 볼까? 각자 토스와 스파이크의 위치로 갔다.
그의 다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침 햇살에 눈동자가 빛나는 듯도 했다. 그의 긴 다리가 태세를 갖추었다.
와타리 선배의 공이 올라오고 끼긱 하는 마찰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가 “날았다.”
마치 공중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깨끗한 폼, 오로지 공을 향한 순수한 눈동자,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긴 팔. 나는 그의 등에서 날개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 그는 마치 한 마리 새 같았다.
강렬한 파열음이 나고 공이 튕겨올랐다. 코스는 코트 오른쪽 아슬아슬하게 안쪽이었다. 그는 신장에 어울리지 않게 사뿐히 착지했다. 누구보다도 강렬한 한 방이었다.
“이야, 미안! 본의 아니게 스파이커들 기를 죽여 버렸네!”
마지막 한 마디만 없었다면 완벽했을 터였다.
아침 훈련을 끝내고 1학년 교실로 돌아가는 중 킨다이치는 몇 번이나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몇 번인가 점프를 하기도 했다. 그래, 그에게 관심을 받으면 대개는 이렇게 된다. 그가 특별히 유난히 구는 것은 아니었다. 나였어도 저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킨다이치는 그의 시선을 끈 것이다. 복 터진 녀석.
‘그’와는 중학교 때도 1년간 같은 팀에서 뛴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난 그에게 별다른 감흥을 받거나 하진 못했었다. 그때 나는 레귤러로 발탁되지 못 했고, 덕분에 연습은 대부분 카게야마, 킨다이치와 함께했었다. 그때 난 카게야마의 재능과 열정에 놀랐고, 그럼에도 3학년에게 이길 수 없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중학시절 그는 인터하이 직전까지 왠지 모르게 조급해하고 필사적이었다. 1학년 따위와 말을 섞을 여유 따윈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겨우 여유가 생겼을 때는 밉살맞은 레귤러 3학년이었을 뿐이었다. 구름 너머의 존재, 중학 시절 절대적이었던 2년의 나이차. 그래서 어디까지나 벽 너머의 사람을 보듯 그렇게 관망했었다.
‘그러고 보니 카게야마는 1학년 주제에 저돌적으로 들러붙었지. 눈치 없는 녀석.’
서브를 가르쳐달라며 그를 끈질기게 쫓아다녔던 카게야마를 생각하자 위가 따끔거려왔다. 지금 카게야마의 서브는 중3 때의 그와 똑같았다. 중학시절, 카게야마는 커다란 눈을 번득이며 그의 모습을 남김없이 그 머릿속에 담았을 것이다. 만난 시기는 같았지만 기억의 출발점이 달랐다.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나는 책상을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후 수업이 되자 책상에 앉은 애들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늦봄의 뜨끈한 햇살이 교실을 졸음의 세계로 인도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로 눈꺼풀도 고개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감도는 먼지마저도 최면을 거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선생은 꿋꿋하게 칠판에 필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헤이케 가에 불만을 품은 호족들을 수습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봉기했죠. 미나모토 요시츠네도 곧바로 거기 합류합니다.”
오늘은 졸지 않기 위해 나는 필기 옆에 조그만 낙서를 시작했다. 배구공, 아니, 농구공? 스파이크 하는 모습을 그리려고 했지만 완성된 모습은 영락없이 어설픈 리바운드를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눈을 감으면 등번호 1번이 멋지게 스파이크를 치는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걸 종이 위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유니폼의 1 옆에 2를 더 적었다. 12번, 내 번호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엔 좀 더 잘 그리기로 다짐하며 토스하는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도 그리지 못하고 나는 낙서를 때려치울 수밖에 없었다.
“에... 이치노타니 전투, 야시마 전투 등에서의 승리를 거뒀지만, 요시츠네는 형인 요리토모에게 숙청당합니다. 이때 무사시보 벤케이가 요시츠네를 지키기 위해 화살방패가 됐던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겠죠.”
지루하게 선생의 목소리가 흘렀다. 나는 수업에 집중하려 했지만 또 생각이 멋대로 튄다. “믿고 있어.” 평소와 달리 진중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가장 믿고 있는 건 누구일까? 어쨌거나 나는 아닐 게 분명했다.
갑자기 앞자리 녀석의 의자를 걷어차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대신 나는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불만을 벤케이에게 쏟았다. 어쩌라고? 역사 속에서 유행했던 남색 이야기의 일면을 영웅담으로 미화해서 구전한 거 아냐? 주군에 대한 복종을 세뇌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유행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가식적인 것임엔 변함이 없었다. 화살방패가 되어 남의 목숨을 지켜준다니, 말이 돼? 전쟁만큼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전우애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는 ‘스포츠’라는 것을 하고 있지만 목숨을 바칠 만큼 장절한 애정이나 존경심 같은 건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감정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따져보면 더욱 그렇다. 애당초 벤케이는 요시츠네에게 아내를 잃었다. 그 증오는 전부 어디로 간 것일까? 어쩌다 그렇게 된 걸까?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촌놈이었던 벤케이를 세상으로 끌어낸 것도 요시츠네였죠...”
선생이 대신 대답을 선사해줬다. 그 대답은 내 사고를 회의와 의문에서 수긍과 납득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어주었다.
그랬다. 요시츠네는 벤케이를 알아준 것이다. 벤케이에게 그는 아마 자신을 알아준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거창한 감정으로 전이된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적당히 하는 거 안 들키도록 해. 미조구치한테 걸리면 큰일 난다?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연습 시합에서 미끼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았던 것을 들켰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그 말이 너무 의외였기 때문에 난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냉철, 침착, 효율적인 게 쿠니미의 무기니까. 대신 다들 지치는 종반엔 그만큼 열심히 뛰어줘야 해.
여태까지 별 의미 없이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들은 대충 넘겨왔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에 체력을 소모하는 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면 일찍 지친다. 일찍 지친 팀이 일찍 진다. 누구나가 카게야마처럼 괴물 같은 체력을 타고나지 않는다. 지쳐서 이길 수 있는 팀에게 지고 싶진 않았다. 이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다. 지도자나 주장, 세터는 누구나가 ‘읽히더라도, 안 되더라도 기백으로 최선을 다해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따위를 요구해왔다. 솔직히 나에게 그런 기백도 체력도 없었다. 나는 주전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런 나를 처음으로 이해해준 사람이었다. 모두가 내게 단점이라고 말해왔던 것을 장점이라고 말해줬다. 그것을 칭찬해주고 인정해줬다. 실제 연습시합 때도종반이 되면 내게 토스를 몰아줬다. 인정받는 기쁨이란 것은 여태까지 막연히 생각해왔던 것보다도 훨씬 컸다. 덕분에 나는 여태까지 해왔던 것이 배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구는 여섯 명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가 내게 가르쳐줬다. 중학교 때까지 해왔던 건 단순히 여섯 명이 혼자서 하는 공놀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제야 내가 외로웠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모두 그의 덕분이었다.
만약 내가 벤케이고 그가 요시츠네였다면 나는 그를 목숨을 버려가며 지킬 수 있었을까? 나는 아마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가 다른 이의 화살에 죽기 전에 내 손에 그를 틀어쥐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온기와 생명력이 손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함께했겠지.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가 날 이해해줄 테니까.
나는 아침의 새처럼 날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째 네 여친이 연습 기다려주는 꼴을 한 번도 못 보냐?”
오후 연습 중 잠시 쉬는 시간을 틈타 이와이즈미 선배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물을 마시다 말고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야, 오후 연습은 길잖아. 기다리는 게 이상하잖아?”
그의 반박에 이와이즈미 선배는 체육관 2층의 스탠드를 가리켰다. 거기엔 몇 명인가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창밖은 벌써 해가 져 어둑어둑했다. 제법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들은, 난간에 기대서라곤 해도, 용케 연습 시작 때부터 지금까지 서 있었다. 언젠가 3학년 선배 중 하나가 “우리학교 체육관 난간이 쓰러져 2층에서 누군가 떨어진다면 그건 오이카와 네 책임”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나마키 선배였던가?
“저기 갸륵하게도 너만 보며 꺅꺅대는 애들이 있는데 왜 하필 그런 박정한 애랑 사귀냐? 별로 걔 좋아해서 사귄 것도 아니잖아.”
“으음, 이와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진 않은데...”
아마 그는 이와이즈미 선배가 자신과 오랫동안 친구인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 늘 자기 자랑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치곤 묘한 자기평가였다.
“저기 왼쪽부터 네 명은 날 좋아하기보단 쟤네들끼리 내 이야기를 하고 노는 게 좋은 거고, 그 다음 애랑 제일 오른 쪽 애는 내 얼굴과 이름밖에 몰라.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애는...”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저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그 모습에 여자애들은 비명을 질러대며 좋아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
“쟨 너무 무거워.”
그가 말하며 일어났다. 체중이나 덩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화사한 얼굴이나 차림새로 봐선 분위기나 성격의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감정의 무게를 말하는 것 같았다.
“뭘 다 아는 것처럼 그러냐?”
이와이즈미 선배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괜한 걸 물어봤나 하는 후회가 묻어나고 있었다.
“후후후, 이와랑 달리 이 오이카와 씨는 통찰력이란 게 있거든요.”
“뭐 인마?”
“그건 물론 이와랑 달리 태생적으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기 때문에 생긴 능력이지!”
이와이즈미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와이즈미 선배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려 했고 나는 순간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만! 이제 휴식 끝! 이제 다시 연습 시작!”
감독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이와이즈미 선배도 오이카와 선배도 여기저기 산개해 있던 녀석들도 포지션대로 모여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나는 스파이크 순서를 기다리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에서 재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한 번 ‘난 어차피 남자의 적이니 굳이 동성에게 사랑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잖아?’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인상적이었다. 워낙 붙임성 있는 말투로 이야기를 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통찰력이 좋았다. 주변을 끊임없이 살폈고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마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곧잘 냉정한 판단을 내리면서도 그 자신이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동성에게 그의 표정이, 그의 몸짓이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자각이 없었다. 저렇게 공을 띄우고, 몸을 낮추고, 성큼성큼 다가가 훌쩍 날아올라 공을 치면, 저것 봐, 킨다이치가 돌아본다. 야하바 선배도 와타리 선배도, 모두가 그를 돌아본다. 그러면 그는 헤실헤실 웃으며, 마치 새가 이리 앉았다 저리 앉았다 하듯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건다.
그러면 난 그의 둥지가 어디인지 생각해본다. 일견 이와이즈미 선배인가도 싶지만, 그건 아니다. 여자 친구는 더욱 아니다. 그가 내게 의지해준다면 좋겠지만, 그가 날 둥지로 삼지 않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왜냐면, 여태까지 친해지고 아니고 신뢰관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내 시선을 눈치 채지 못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는 데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연습이 끝나자 거리는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교무실에 체육관 열쇠를 걸어놓고 나오자 시간이 이미 늦어서인지 강당에도 운동장에도 이미 아무도 없었다.
약간 썰렁함을 안고 운동장을 건너가자 교문에서 그가 서 있었다. 혹시 날 기다렸을까?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아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쿠니미, 오늘은 집에 같이 가자.”
특유의 붙임성 좋은 말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봤자 세 블록 다음엔 반대방향이잖아요.”
설렘을 진정시킬 수 없어 오히려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그는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미소였지만, 어쨌거나 좋았다. 그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기회는 지극히 드물었다.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와 나란히 하굣길을 걸었다.
도로변에 차가 드문드문 곁을 지나갔다. 그는 횡단보도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 없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파란불이었던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조금 숨이 막혔다. 멈춰서는 순간 손등이 스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 그랬다. 이제 동복을 입기엔 날이 많이 따뜻해졌는지 얼굴로 열이 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기도 해서 말없이 손가락으로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가는 게 싫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을 정도였다.
함께 가는 길은 여기서 길을 건너 골목으로 들어간 후 두 블록을 더 걸으면 애완동물전문 숍이 나온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쿠니미.”
그가 나를 불렀다. 나는 긴장했는지 대답이 조금 늦었다.
“예?”
그는 신호등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콧날이 날카롭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니 잘생긴 얼굴은 그렇게 땀을 흘렸는데도 여전하다.
“나한테 뭐 신경 쓰이는 일 있어?”
그가 물어왔다. 나는 순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떤 걸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떠보는 것인지, 오늘 내가 뭔가 잘못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내게 ‘부담스러우니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찔리는 게 너무 많아서 “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는 내 얼굴을 똑바로 봤다.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었다. 그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나도 그를 따라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조금 더 걸은 다음 오른쪽으로 꺾이는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그렇게 밝은 대로에서 이어지는 길인데도 이상하리만치 어두워 마치 터널 안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 날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보면 아무리 나라도 신경 쓰인단 말이지.”
그가 말했다. 왠지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괜히 손끝이 찌릿찌릿해져 오는 것이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새가 내 손등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잡으면 잡힐 것처럼. 어둠 속에서 가로등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 이유도 모른 채 조바심이 났다.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요?”
내가 물었다.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단어를 조금 고르는 것 같았다.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 벌써 골목의 끄트머리, 애완동물 숍이 보이고 있었다.
“토비오 같은 눈으로 보고 있달까.”
그의 대답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도 나를 따라 멈췄다. 그 한 마디에 머리로 피가 몰렸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애완동물 숍의 새장에서 새가 울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골목은 어두웠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고 집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듯했다. 골목엔 우리 둘밖에 없었다. 난 지금 새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가 둥지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비틀고 새가 발버둥을 멈추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를 틀어쥐고 독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목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그는 온전히 자신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나머지 손 하나가 그의 재킷 칼라를 잡았다. 마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눈이 날 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한 얼굴이었다.
나는 손에서 힘을 뺐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는 나보다 덩치도 힘도 좋았다. 내가 그를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그는 그저 잠시 내 손등에 앉아 내게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는 힘이 빠진 내 손을 잡았다.
“나한테 뭐 신경 쓰이는 일 있어?”
그가 다시 물었다.
“아뇨, 오이카와 선배...”
나는 대답했다.
“아뇨...”
나는 고개를 숙였다. 점점 어깨가 가라앉는 것을 그가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자, 쿠니미.”
그가 손을 내밀었다. 화해의 의미일까 이끌어 주겠다는 의미일까. 어느 쪽이었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골목 끝에서 손을 놓았다. 그는 웃으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발걸음은 학교를 나올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나는 골목 끝에서 멀어져가는 그의 등을 바라봤다.
나는 라만 알 아하브. 아하브 대사의 둘째 아들로, 병사다. 네 살 때부터 붓을 잡았고 3년 전부터 돈을 받고 그림을 팔았으며 언제나 그림을 칭찬받았지만, 병사다.
사막의 달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단단하던 땅은 어느 새 기질이 바뀌어 푹푹 발바닥을 끌어들였다. 차가운 공기에 입김이 맴돌고 몸이 으슬거렸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구름마저도 없었다. 벌레 소리조차도 없었고, 오로지 나 혼자만이 있었다. 들리는 소리는 오직 모래 사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고독이 시리게 사무쳤다.
어쩌다가 나는 이곳에 온 것일까.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이젠 속이 쓰리다 못해 무감각해졌다. 이따금씩 피를 토해내라고 채근하듯 조여대는 감각이 돌아올 뿐이었다. 배고픔에 번득이던 머리도 이제는 갈증으로 둔중해졌다. 더 걸을까. 더 걷든 그렇지 않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차라리 드러누워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낮에 태양을 받은 모래가 한밤의 차가운 공기보다는 따뜻할 것이었다. 바닥에 누워 아래로 아래로 침전하면 오히려 따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모래가 발목을 잡아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힘들었다. 겨우 몸을 뒤집자 별이 쏟아졌다.
왜 나는 이곳에 있는 걸까.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걸까. “정신 차리고 앞을 똑바로 봐라!”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형이 죽었으니 네가 너의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왜 아직도 그걸 모르느냐?! 넌 언제까지 그렇게 한심하게 살 거냐? 내가 천년만년 너의 뒤를 봐줄 거라 생각하느냐?” 아버지의 풍성하고 흰 수염이 말을 할 때마다 움직였다. 짙고 어두운 갈색 옷감에 석양 색의 문양을 수놓은 옷이 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지금 이대로 내가 늙어 더 일할 수 없게 됐을 때 네가 네 어미, 네 아내, 네 동생과 제부를 돌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아버지가 말했다. “그게 전쟁터에 나가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그림은 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소리쳤다. 아버지는 물건을 집어던졌다. 동생이 인도에서 가져온 연꽃과 코끼리가 새겨진 목제 필통이 깨졌다. 내가 무척 좋아하던 것이라 아버지와 반목하던 것만큼이나 그것이 애석했다.
전쟁터에 갔던 형이 죽었다. 형도 아버지만큼이나 책임감이 강한 인종이었다. “가족을 위해서”란 말이 언제나 입에 붙어 있었다. 그렇지 않을 땐 “형제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전쟁터에 갈 땐 “가족과 형제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이거나 그거나. 그 말을 들을 때면 항상 그런 생각을 했었다.
형은 전쟁에서 도망치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친분이 있는 연장자에 전쟁의 경험이 있는 알 샤마드와 함께 하겠다며 그의 군대에 합류했다. 형은 몇 차례 전투를 훌륭히 수행해냈고, 아버지는 형을 자랑스러워했다. 그 동안은 좋았다. 나는 형이 잘 해주는 만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누군가에겐 돈을 받고 그림을 그려줬고, 돈이 없다고 하는 누군가의 집 벽면엔 그냥 그림을 그려줬다. 문양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람들도 좋아했고 나도 좋았다. 하지만 형이 그런 식으로 죽어버렸다.
집안은 죽음의 슬픔으로 가득 찼고, 심지어 우리 집 개조차도 고개를 낮게 두고 소리를 삼갔다. 아버지는 며칠이나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눈물로 히잡을 적셨다. 동생조차도 충격으로 입을 거의 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림조차도 그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방 밖으로 나왔다. 다시 출근을 했고 돌아와서 내게 형 대신 전쟁터에 가라고 했다. 나는 사람은 죽일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와 나의 갈등이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힘들겠다.”
아버지와 말싸움을 하고 나오는데 정원에서 동생이 말을 걸었다. 언제나 날 싫어하고 피하던 아이였기 때문에 상당히 놀랐었다.
“불효하는 것도 힘들지 않아? 가는 게 맞지 않겠어?”
동생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마 눈을 휘둥그레 떴을 것이다. 잠시 동안 말을 잊은 채 충격으로 멀거니 서 있었다. 동생은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우린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정원의 작은 물줄기 흐르는 소리만이 반증이 되어 주었다.
“무슨... 소리야?”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동생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서 일하지 않는 남자는 형님뿐이야. 아버지도 나도 돈을 벌고 있어. 하지만 형님은 쓰기 바쁘지.”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코발트를 뭉개어 쓰고 금가루를 치덕치덕 바르고 몇 푼을 벌어오지. 그나마도 상대가 돈이 없다고 하면 무료로 그려주고. 그나마 돈이 좀 되는 것들은 모두 아버지를 보고 돈을 내는 것들이지 형의 실력이 대단해서가 아니야. 형이 여태까지 쓴 재료값을 생각해보면 그 돈도 턱도 없지. 하루 종일 안료를 쓰고 또 쓰고, 쓰고 또 쓰는데 무슨 돈이 남겠어?”
“내가 그림을 그려서 얼마나 벌었는지 알아?!”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형에게 일이 생길까?”
동생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것은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일을 감당하지 못해 손목이 고장 날 때까지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들개처럼 굶어 죽을 수도 있다. 혹은 행상을 다니는 동생에게 얹혀 재산이나 축내는 못난 형이 될 수도 있겠지. 일을 맡긴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아버지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것으로 이별의 인사말을 대신했다. 그들은 내게 무엇을 원해서 일을 맡겼던 것일까?
“가족이 없으면 형도 없어.”
동생이 차갑게 말했다. 나는 낙담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죄어왔다.
“가. 가서 장남의 의무를 다하고 와.”
동생의 말이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난, 죽을지도 몰라...”
“그럼 죽기 전에 죽여.”
동생의 말이 목덜미에 박혔다.
“쉽게 말하는구나...”
내 중얼거림에 동생은 잠시 숨을 멈췄다.
“내가 몇 명이나 죽였을 거라 생각해?”
동생이 말했다. 이번엔 내가 숨을 멈췄다.
“전쟁 중이라 행상을 끌고 가는 길엔 패잔병이며 전쟁으로 인해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종종 있어. 그들은 쉽게 도둑패들이 되지. 나는 그런 도둑패들과 몇 번이고 전투를 했어.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사람을 많이 죽였을 거야. 어떻게 생각해?”
그 말을 하는 동생은 침착했다. 나는 충격으로 눈물이 왈칵 났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열이 났다.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어깨며 목구멍으로 치미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세상이 조각나는 것 같았다. 깨진 거울처럼 조각난 우리 집 정원에서 동생의 검은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때서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여태까지 나 혼자만이 완전한 세상에 있었고, 그런 듯이 굴었던 것이다. 나는 동생이 나를 얼마나 미워했을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별이 보이는 숫자만큼 추웠다. 바닥의 모래들은 기대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달빛처럼 고요한 추위가 나를 죽이고 있었다.
문득 사라진 사람들이 생각났다. 밤이면 타닥타닥 타들어가던 모닥불 옆에서 화살촉을 손질하던 사내도, 건너의 건너 막사에서 저녁을 먹고 흥이 오르면 노래를 부르던 뚱뚱한 사내도, 이유 없이 욕을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사내도 갑자기 사라졌다. 나도 사라질 뻔했었다. 불운이었는지 다행이었는지 살아남는 대신 누군가를 죽였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이국의 갑옷을 입은 머리색과 눈 색이 옅은 남자를 기억해냈다. 막연히 그에게 칼을 꽂을 때의 감각과 그가 자신에게 토해냈던 피의 온도를 기억해냈다. 뜨겁고 비릿하고 미끌미끌했던 그의 생명이었다.
나는 그의 생명과 나의 생명을 저울로 달아보았다. 그의 생명을 대가로 고작 나흘을 더 살았다. 이렇게 먼지 같은 생명인데 그것을 위해 누군가를 죽였다.
파리하게 갈라진 입술로 눈물이 닿아 따가웠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더 둥글게 말아 안았다. 긴장, 두려움, 구토, 발열, 혼란, 오열, 기도, 그리고 기도... 마음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싶어 울었고, 기도는 붓 끝에서, 막대 끝에서 형태를 갖추었다. 물감을 붓에 묻힐 때마다 절을 했고 획을 그을 때마다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내 깃털 같은 염원은 병사들의 야만의 발자국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나는 무력했다. 누군가가 또 죽었고, 누군가를 죽였다. 이 이상은 없을 야만의 현장에서. 그에 비하자면 여기는 얼마나 고요하고 또 고독한가.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건 오히려 괜찮은 죽음이었다.
바람이 또 사락거렸다. 사막으로 하얀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이젠 정말로 죽음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리 위로 정적이 내려앉고 있었다.
눈을 뜨자 화롯불이 보였다. 사물들이 어른거리고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움직여보자 의외로 간단히 스르륵 하고 미끄러졌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뜨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마침 눈을 뜨셨군요. 이 차를 드시면 몸이 많이 따뜻해질 겁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내게 찻잔을 내밀었다. 나는 멍한 정신에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초점이 맞을 때까지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내가 먹일 테니 이제 나가도 돼.”
뒤통수가 동그란, 목이 다소 긴 남자가 딱딱한 어투로 말을 하자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남은 남자는 말없이 서 있었다. 멍하니 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날 보지 않았다. 나는 그의 등을 계속 바라보았다.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하지만 이젠 제법 청년 티가 나는 등이었다.
“자밀.”
그를 부르자 그가 대답을 해왔다.
“왜 부르십니까, 형님.”
여전히 시선은 주지 않은 채 노골적으로 빈정대고 있었다. 억누른 목소리엔 분노가 담겨 있었다. 희미하게 참담한 마음과 짜증이 함께 밀려들었다. 그는 아마 나의 나약함에 화내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다가 구출된 것일까? 왜 하필 그에게 구출된 것일까? 차라리 그때 죽게 내버려뒀으면 좋았을 것을.
불러놓고 말이 없자 동생이 먼저 나를 곁눈질로 힐끔 보고선 찻잔을 가리켰다.
“드시죠.”
예의바르지만 고압적인 말투였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디야?”
나의 물음에 그가 몸을 홱 돌려 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화가 나 있었다. 평소에는 조소하듯 차갑게 내려앉은 검은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그는 언성을 높였다. 아직 조금 덜 여문 목소리가 뒤집혔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대체 어떻게 된 일로 왜 거기에 있었는지, 자기가 뭘 하는 지나 알고 거기 자빠져 있었는지!!”
그는 일갈하곤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불규칙적인 박자로 서성거렸다.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가 멈춰서 눈두덩을 눌렀다가 머리를 다시 쥐어뜯으며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얼굴을 쓸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했다. 아직 어린 티가 남은 아몬드 모양의 눈을 찌푸렸다가 깜박거렸다가 했다. 동생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저 멀거니 그의 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형은 꼭 이딴 식으로 자기주장을 해야겠어?”
다소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공격적인 말투로 쏘아붙이곤 끙 소리를 내며 팔을 털었다.
“왜 아직 안 마셔? 마셔!”
동생은 다시 찻잔을 가리켰다.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히며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따스한 기운이 목구멍을 통해 안으로 전달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내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신 찻잔을 기울여 차를 들이켰다.
찻잔은 눈 깜짝할 새 비워졌다. 동생은 빈 찻잔을 채워주었고 나는 다시 차를 들이켰다. 온기가 손끝까지 전달되었고 등이 후끈해져왔다. 짙은 안개가 껴있던 것 같은 머리가 맑아졌고 몸은 가뿐해졌다. 찻주전자는 눈 깜짝할 새에 비워졌다. 그때서야 한숨이 나왔다. 마치 생명이 돌아오는 것 같은 한숨이었다. 동생은 온기를 탐하는 내 모습을 보자 화가 누그러졌는지 옆에 와 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딱딱한 어투로 동생이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잔을 내밀었다. 동생은 물을 채워주었다.
“형 부대가 적들과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난 이번엔 차 대신 물을 들이켰다. 뜨끔했다.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탈영한 거야?”
정곡을 찔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두려움에 팔을 안았다. 정직하게 그렇다고 대답하면 다시 그곳으로 끌려갈까? 또다시 죽이거나 죽거나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는 걸까? 긴장에 폐부까지 따끔거렸다. 동생은 나를 그곳으로 내몬 장본인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필사적으로 대답을 찾아봤지만 적당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따뜻하진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동생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살아서 다행이야.”
동생이 말했다. 난 그의 너무나도 의외인 한 마디에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뭔가를 떨쳐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깨어나서 별로 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자둬. 내일 또 출발해야 하니까. 형은 우리 행상과 같이 가지.”
그는 천막 문을 열었다. 싸늘한 기운이 대번에 코끝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어디로 가는 건데?!”
불안한 듯 물었지만, 동생은 나머지는 내일 얘기하자고만 했다.
천막이 닫히고 나 혼자만이 남았다.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자 크지 않은 천막 가장자리로 꾸러미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발갛게 타는 화롯불 주변엔 아까 마신 찻주전자와 찻잔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바닥은 흙바닥이었다. 나는 이불을 끌어올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밖에서 낙타들이 쌔근거리는 소리와 드문드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이곳이 어딘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혼자는 아니었다. 동생은 내게 내일 당장 다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의무를 운하지도 않았다. 화롯불은 따뜻했다. 점점 몸에서 힘이 빠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순간순간 의식이 깜빡거리고, 곧 나는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 같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러이 흩어지고 땀내와 진창 냄새, 금속의 비릿한 냄새, 오물냄새가 먼지와 함께 뒤섞였다. 따가운 햇볕에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빛이 번쩍이고 사내들의 함성이 공중을 울렸다. 나는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도 못 하고 저 검은 정수리들 너머 전장을 초조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사막은 장정들의 땀으로 먼저 젖고 그들이 흘리는 피로 웅덩이가 생겼다. 누군가의 팔이 잘리고 누군가의 머리가 갈라졌다. 전장은 공포와, 그를 덮기 위한 광기로 휩싸였고, 그건 후위에 있는 우리에게도 전염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대검에 머리가 찍혀 뇌수가 튀는 사람의 옆에 있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기분일까. 그 대검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리고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 걸까. 왜 여기 오는 것일까. 여기는 이미 지옥이었다.
누군가가 맹렬한 기세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거대하고 날카로운 도끼로 병사들을 찍어내고 절단내며 사자처럼 포효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병사들이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혹은 그가 지나고 나서야 잃어버린 육체의 단면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 광경에 압도되어 그저 간절히 그가 내 쪽으로 오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내 앞에 서 있던 자가 도끼로 목을 찍히고 쓰러졌다. 도끼가 자른 단면이 먼저 보이고 그 후에야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까부터 얼어붙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마치 죽음을 내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쓰러졌고, 이렇게 얼어붙어있기만 하면 나 역시 그들과 같이 죽어 쓰러질 것이었다.
식은땀이 나고 몸이 덜덜 떨렸다. 숨쉬기가 힘들어져 어깨로 겨우 숨을 이어갔다. 발끝에서부터 턱 끝까지 두려움이 서늘하고 저릿저릿한 감각으로차올랐다.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어떻게든 빼든 칼을 쥐고 서 있었다. 목뒤부터 뒤통수가 아플 정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눈 한 번 깜박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나의 앞으로 왔다. 그의 도끼가 높이 올랐다. 도끼에 더덕더덕 붙은 피와 살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날카롭게 벼린 도끼날이 공기를 베며 나의 어깨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헉!”
눈이 번쩍 뜨였다. 어둠 속이었다. 아직 오싹한 기운이 어깨며 등골을 휘감고 있었다. 나는 눈을 두어 번 더 깜박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천장이 보였다. 아름다움이나 문양이라곤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익숙한 부대 막사의 천장이었다. 양옆으로 사람들 자는 숨소리가 들렸다. 손으로 만져보자 목이 멀쩡히 몸에 붙어 있었다. 도끼로 몸이 갈라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그건 꿈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때서야 안심이 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악몽을 꿨나보지?”
옆 침대에서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첫날부터 나를 영 마뜩찮게 보던 살람이라는 사내였다.
“전쟁터에서 악몽을 꾸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해. 하지만 그건 전쟁터에 나가보기나 하고서 하라고. 형씨 기가 약한 건 알겠는데, 벌써부터 그러면 진짜 전쟁터에 나가게 되면 어쩔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잠시 숨이 막혀왔다. 밤의 어둠이 몽땅 내 위에 올라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에게도 나와 같은, 혹은 그보다 더 큰 어둠이 올라타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그의 눈이 젖어있음이 보였다.
“형님은 진짜 전쟁터에 나간 적이 있습니까?”
그가 나보다 연상임은 확실했기에 그렇게 물어보았다.
“다섯 번 정도...”
그는 그렇게 말하곤 맞은 편 옆의 침대를 보았다. 거기엔 그의 고용주의 침대가 있었다. 그는 이브라힘이라는 이름이었다. 살람은 다섯 번이나 전쟁터에서 살아남았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이브라힘의 아버지가 살람의 처자에게 생활비 10년분을 주는 것을 조건으로 이브라힘의 시종이자 경호원으로 고용되어 왔다고 했다. 나에게 그의 경력은 마치 까마득한 선지자의 이력처럼 들렸다. 나로서는 도저히 그처럼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왜 이 시간에 깨어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악몽을 꾸셨습니까?”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도 악몽을 꿨으리라.
“쓰지도 못할 칼이 더럽게 화려하네.”
배수대에서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코피와 흙먼지를 닦아내고 있자 그가 지나가며 한 마디 했다. 나는 언제나 허리에서 덜렁거리던 무겁고 화려하기만 한 애물단지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이런 건 나에게 필요 없었다. 그저 무겁기만 했다. 아무리 좋은 금속으로 아무리 잘 갈아놨어도 내겐 그저 흉측한 것일 뿐이었다.
“형님 칼도 화려하게 만들어 드릴까요?”
“왜?거기 형씨 칼에 박힌 보석이라도 떼서 박아주려고?”
“그런 것보다 훨씬 가벼운 걸로 해드릴 게요.”
“허허, 실없게...”
살람은 그렇게 말했지만 막사로 돌아가자 내 옷을 잡아끌어 자신의 칼집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옷을 보았다. 전반적으로 미색의 옷을 입고 있으니 어떤 색이든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붓을 꺼냈다.
붓이 가죽 칼집에 닿았다. 붓끝이 폭신하게 탄력을 갖고 마치 손의 일부처럼 가죽의 질감을 손가락 끝으로전해줬다. 검붉고 밋밋한 가죽이었던 것이 점점 색을 띠어감에 따라 나의 의식도 그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물감은 청록색에서 푸른색으로, 그리고 붉은 색으로 바뀌어갔다. 살람은 숨죽여 색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마치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 밖에선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명령을 하고 싸워댔지만, 이곳은 물감으로 그려진 물속이었다. 욕설하는 소리, 칼날끼리 부딪치는 소리, 싸워대는 소리는 멀어지고 오로지 내면의 소리만이 형태가 되었다.
“예쁘다!”
살람이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형씨 솜씨가 보통이 아닐세! 굉장허이! 이건 낙타 백 마리와도 안 바꾸겠어!”
“빈 소리 하지 마세요.”
“아니, 진짜로! 여긴 다들 번쩍번쩍 하는 화려한 칼들을 차고 다니니 내심 좀 부러웠는데, 지금은 내가 제일 예쁜 칼을 들게 됐네!”
“그 정도까진...”
“형씨, 또 누가 괴롭히면 말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살람은 순박한 얼굴로 웃었다. 전쟁터를 다섯 번이나 경험했는데 어떻게 그런 얼굴로 웃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기뻤다. 부대에 오고 처음으로 내가 나인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그것이 다행이라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형님.”
왠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람은 여전히 순박하게 웃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말이 달리는 소리가 났다. 덜그럭거리며 가문의 문장을 입은 기사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두려움에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기사는 길고 거대한 검을 휘둘렀고, 살람의 목이 떨어졌다.
“살람!!”
나는 그의 이름을 외쳤다. 기사는 나를 내버려둔 채 다시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살람!!!”
나는 다시 외쳤다. 허물어진 그의 몸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의 머리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살람!!!”
그에게로 달려가는데 그가 계속 멀어졌다. 눈물이 왈칵 났다. 팔을 허우적거리는데 팔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팔을 꽉 잡고 놓지 않는 것 같았다. 울음이 터졌다. 불안함과 답답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떴다.
그를 처음 봤을 때, 홀쭉한 얼굴에 마른 몸, 키는 훌쩍 크지만 도저히 칼을 휘두를 수 없을 것 같은,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길지만 가는 팔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선량한 얼굴로 맥없이 웃고 있었는데, 허리에 찬 화려하게 치장된 칼이 무색할 정도로 무기력한 인상이었다. 200년 전에도 300년 전에도 싸우던 숙적과의 전쟁터에 이런 전사라고도 부를 수 없는 남자가 보급품과 병사를 이끌고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허리의 칼보다는 손에 든 꽃이 훨씬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연꽃 아닌가?”
내가 손에 든 것을 묻자 그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좀 전의 무기력한 억지웃음에서 표정의 색이 바뀌자 웃음이 잔잔해지긴 했어도 오히려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혹 물웅덩이나 늪이라도 있다면 거기 심어볼까 합니다.”
“그대는 불도인가?”
“아닙니다. 무슬림입니다. 하지만 가장 더러운 곳에서도 깨끗하게 피어나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색상이 화려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렇게 은은한 것도 마음을 끄는 곳이 있어 좋아합니다. 물론 포도나 사슴뿔도 좋아하지만요.”
말투조차도 부드러워서 키도 골격도 나보다 컸지만 도저히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저 병사들을 전쟁터로 통솔해 왔다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 나라 안에서 내로라하는 정재계 거물의 둘째 아들로, 첫째 아들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보낸 자식이었다. 첫째 아들과 안면은 없었지만, 어떻게 죽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집안이 어떤 식의 교육을 하는지 손에 잡힐 듯했다. 거기다가 그들의 아버지인 아하브 대사의 아들 사랑은 소문이 자자했다. 분명 제멋대로에 방만하고 조금 배운 무예로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그런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를 매우 오해하고 있었다.
“씨앗을 넉넉히 가져왔는데 몇 개 드릴까요? 꽃은 이것 한 송이밖에 없지만 씨앗은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됐어. 가봐.”
“예..”
나의 거절에 그는 애매한 대답을 남기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의 동생이란 자가 들어와 형을 잘 부탁한다며 인사를 하는데,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풋풋한 얼굴이었지만 그 단단한 눈빛으로 밖에 대기하고 있는 그의 형이란 자가 데려왔다는 병사들은 사실 이 자가 통솔해왔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부잣집 아들들이 포진한, 일명 ‘쓸모없는 부대’였다. 도련님과 그 부대들이라고 하면 적절하겠다. 목적이라 한다면 재산과 아버지의 지위를 등에 업고 살아온 호기와 객기의 망나니들이 무작정 적에게 돌진하다 목만 돌아올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전투를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훈련과 청소와 빨래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가끔 잘나가는 집안 아들과 그렇지 않은 집안 아들로 나누어 작전을 수행했다. 대체로 없는 집 아들들로 구성된 선발조가 선두에 서면 있는 집 아들들이 뒤에 붙어서 전쟁 기분을 내고 돌아오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쓸 만해 졌다 싶은 녀석들은 본래 데려왔던 자기 군대를 이끌고 독립하거나 다른 군대와 합류하여 별개의 작전을 수행하는 식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그럼으로써 나의 아들도 전쟁터에서 용맹하게 싸우고 있노라 운운하며 머리를 높이 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이비 부대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였다.
그는 처음 닷새간은 무기력할 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엿새째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그는 훈련도 이겨내지 못하고 고열을 내며 쓰러져 사흘을 쉬더니 또 이틀 훈련했다가 사흘을 쓰러졌다가 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막사에 가봤더니 과연 그는 자리에 누워있었고, 사병 하나가 그를 보살피고 있었다.
“저 치가 왜 여길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를 보살피던 자가 말했다.
“훈련할 때마다 힘들다힘들다 노래를 부르더니, 목검으로 사람 때려보라고 하니 저렇게 골골대며 쓰러지지 뭡니까. 정작 맞은 놈은 팔팔하게 나돌아 다니고 있는데.”
“때리랬더니 쓰러졌다고?”
“예. 하도 자기는 붓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 없다고 떠들어대길래 저치가 들고 온 종이랑 화구를 줬더니 좀 나아지더라고요. 그나마도 종이가 다 떨어져서 저기다 그리고 있습죠.”
사병이 그의 머리맡을 가리켰다. 머리맡의 누런 막사 천에 푸른 바탕에 금색 패턴, 그리고 검은 포인트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아직 다 그린 것은 아닌 듯 테두리는 불분명했다. 아직 작은 부분이었지만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옆에는 종이를 가득 채운 아름다운 패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타고난 환쟁이일지도 몰랐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푸른 안료가 얼마나 하는지 아나?”
내가 뜬금없는 질문에 사병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쳐다봤다.
“저 푸른 안료는 코발트를 잘게 짓이겨 가루를 낸 것이야. 금색 안료는 금을 그렇게 해서 물에 갠 것이고. 그림에는 돈이 들지.”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측은함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보다는 창자가 꼬이는 질투심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를 바라보는 한심함이었다. 그의 동생이 한 달에 한 번씩 물자를 조달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이 남자를 집으로 내쫓았을지도 몰랐다.
“전쟁 중에 한심하긴...”
혀를 차며 돌아서려는 순간 사병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에 시선이 갔다. 칼집엔 청록색의 바탕에 푸른색과 붉은 색이 들어간 문양에 흰색으로 문구를 그려넣어 놓았다. 그의 칼을 청해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자, 원래 지극히 단순한 모양의 장식 없는 가죽 칼집이었던 것이 보였다. 아마 그것 때문에 사병이 그를 돌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난 그걸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약함이 옮을 것 같아 얼른 칼을 사병에게 돌려주었다. 나약한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종종 그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징후를 보고받았다.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전쟁터에라도 데려가 그가 마주해야 할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쟁에 예외란 없다. 심지어 아녀자와 아이들마저도 전쟁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했다. 전장에서, 심지어 코란을 필사하는 것도 아닌 그림 나부랭이를 붙잡고 있어서야 그저 짐일 뿐이다. 모두가 쓸모 있어야 한다. 그건 놀랍게도 있는 집 도련님들의 부대에서도 그랬다. 모두가 자기 역할을 한다. 그림 같은 비생산적인 것은 존재 가치가 없다. 그런 것들은 평화롭고 풍족한 때에나 가치를 가지는 법이다. 지금은 평화롭지도 풍족하지도 않은 상황이다.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불운하게라고 해야 할지, 적이 전방 방위선을 뚫고 이곳까지 침범했다. 전선에서 약간 떨어진 위치였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우린 적을 맞이하여 준비해온 대로 움직였고,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아온 도련님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잘 움직였다.
오아시스를 뒤에 두고 바닥이 단단한 사막에서 우리는 이틀을 내리 싸웠다. 상대는 금속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었고, 더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속은 내리쬐는 햇빛에 금방 달궈졌고, 그들은 짧게 치고 빠지는 식의 전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뒤에는 성이 있었고, 우리에겐 심지어 작은 오아시스도 있었다. 기온이나 날씨에 적응 같은 거야 이미 모두 끝내놓은 상태다. 전투는 오래 끌면 끌수록 유리하다. 이 전투는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규모 병력인 것으로 보아 그들 중 일부인 것 같긴 하지만, 그들이 왜 이런 어리석은 싸움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적을 욕심내다가 이리로 온 것일까, 아니면 상부 무능한 자의 지시에 따라 이리로 온 것일까?
그러나 사흘 째 되던 날은 적도 무슨 악을 냈는지 제법 맹렬하게 싸워왔다. 말발굽에 먼지가 일고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했다. 나는 전전긍긍하며 병사들을 독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일대는 모두 평지에 바닥도 단단해서 작전을 짤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 결국 용맹함과 전투력만이 승패를 가르는 싸움이었다.
혼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갑옷을 입은 자가 뭐라고 계속 외치며 주변인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큰 소리였는데, 부관이 “말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저 자를 잡으라!”
갑옷을 입은 자를 눈으로 좇다보니 의외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알 아하브(아하브의 아들), 바로 ‘그’였다. 갑옷을 입은 자는 그를 칼로 내리치려 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죽어선 안 된다. 다급하게 외칠 겨를도 없이 기사의 칼이 그의 머리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주 의외로, 기사의 목을 뚫었다. 나의 자리에선 그렇게 보였다. 나중에 보니 목을 뚫은 게 아니라 입으로 칼을 쑤셔 넣었던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쓸모 있었던, 가장 쓸모 있었던 순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혼전 탓에 빠르진 않았지만 적이 물러가고 있었다.
적들이 완전히 물러가고 난 처음으로 그에게 칭찬을 했다. 거하게 한바탕 토했는지, 옷에는 땀과 피와 토사물이 아직 묻어 있었다. 냄새가 지독함은 당연했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첫 경험이었다. 여기에 있는 누구나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누구나가 그걸 이겨냈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되고, 도태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는 여태까지의 내가 봐왔던 많은 병사들이 그랬듯이 한동안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원래 나약했던 만큼 더 요란스럽게 앓았다. 그는 또다시 고열을 내고 드러누웠다.
전투는 하루를 건너뛰고 그 다음날 또 개시되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것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노란 태양이 사정없이 이글거리고 금속 갑옷을 입은 적들이 불판 위의 고기가 된 마냥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는 맑고 더운 날이 좋았다. 그럴 때면 어설픈 구실을 붙여 땅싸움을 시작한 어리석은 자들의 천사들도 저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비는 달랐다. 미끄러운 땅과 축축하게 달라붙어 움직임을 방해하는 옷가지나 쉽게 확보되지 않는 시야가 양쪽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 조건이 공평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승리가 결정되어 있었다. 원군이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은 우리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저기 포박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림이...”
대열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홱 돌려 노려보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동안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병사들은 모두 몸을 긴장시키고 입을 다물었다. 전투 전에는 전투만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방금 그 말을 한 녀석의 목을 적 대신 내가 베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아하브 대사의 아들이라 해도 말이다.
“알다시피 저쪽에 우리의 원군이 도착해 있다. 적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일찌감치 내뺐으면 좋았을 텐데도 항복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한다. 먼저, 원군으로 도착한 알 샤마드의 군대가 적을 치고, 우리는 그보다 늦게 적의 후방을 칠 것이다. 우리는 맹렬히 싸울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전투 역시 우리의 승리가 될 것이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족을 위해 싸우라!”
연설을 끝내자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나는 ‘그’를 찾았다. 그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등을 둥글게 말고 시선은 한 군데 고정시키지 못하고 계속 움직였다. 나는 혀를 차며 그의 위치를 맨 뒤로 옮겼다. 괜찮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병력은 적의 세 배에 다다랐다. 도련님들은 무사할 것이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은 전투가 끝나고 닷새 뒤였다. 고열을 내고 드러눕고는 여태 일어나지 못했다는 보고였다.
“누워있는 것을 확인했나?”
“예.”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물어봤더니 선선히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지 않고 교관의 얼굴에 내뱉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아하브 대사의 아들이라 해도 이건 너무했다. 충격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약해빠진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난한 집의 아들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그는 보고 배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 요량으로 그의 막사를 찾았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두 명의 사병이 나를 맞이했다. 막사 천의 안쪽은 온통 파랗고 빨간 물감으로 그린 패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그렸냐고 물어보자 알 아하브가 그렸다고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해 왔다. 정말 그 다운 행동이었다. 아무리 부잣집 도련님들이 모이는 곳이라 해도 이 녀석 만큼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통솔자가 왔음에도 고개도 들어 보이지 않는 것도 화를 돋구었다. 그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씨근거리는 숨을 참지 않고 그의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들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