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 세계관은 판타지.
있는 세계가 아니라 있는 세계를 본딴 판타지에 가깝슙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홀쭉한 얼굴에 마른 몸, 키는 훌쩍 크지만 도저히 칼을 휘두를 수 없을 것 같은,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길지만 가는 팔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선량한 얼굴로 맥없이 웃고 있었는데, 허리에 찬 화려하게 치장된 칼이 무색할 정도로 무기력한 인상이었다. 200년 전에도 300년 전에도 싸우던 숙적과의 전쟁터에 이런 전사라고도 부를 수 없는 남자가 보급품과 병사를 이끌고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허리의 칼보다는 손에 든 꽃이 훨씬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연꽃 아닌가?”
내가 손에 든 것을 묻자 그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좀 전의 무기력한 억지웃음에서 표정의 색이 바뀌자 웃음이 잔잔해지긴 했어도 오히려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혹 물웅덩이나 늪이라도 있다면 거기 심어볼까 합니다.”
“그대는 불도인가?”
“아닙니다. 무슬림입니다. 하지만 가장 더러운 곳에서도 깨끗하게 피어나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색상이 화려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렇게 은은한 것도 마음을 끄는 곳이 있어 좋아합니다. 물론 포도나 사슴뿔도 좋아하지만요.”
말투조차도 부드러워서 키도 골격도 나보다 컸지만 도저히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저 병사들을 전쟁터로 통솔해 왔다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 나라 안에서 내로라하는 정재계 거물의 둘째 아들로, 첫째 아들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보낸 자식이었다. 첫째 아들과 안면은 없었지만, 어떻게 죽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집안이 어떤 식의 교육을 하는지 손에 잡힐 듯했다. 거기다가 그들의 아버지인 아하브 대사의 아들 사랑은 소문이 자자했다. 분명 제멋대로에 방만하고 조금 배운 무예로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그런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를 매우 오해하고 있었다.
“씨앗을 넉넉히 가져왔는데 몇 개 드릴까요? 꽃은 이것 한 송이밖에 없지만 씨앗은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됐어. 가봐.”
“예..”
나의 거절에 그는 애매한 대답을 남기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의 동생이란 자가 들어와 형을 잘 부탁한다며 인사를 하는데,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풋풋한 얼굴이었지만 그 단단한 눈빛으로 밖에 대기하고 있는 그의 형이란 자가 데려왔다는 병사들은 사실 이 자가 통솔해왔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부잣집 아들들이 포진한, 일명 ‘쓸모없는 부대’였다. 도련님과 그 부대들이라고 하면 적절하겠다. 목적이라 한다면 재산과 아버지의 지위를 등에 업고 살아온 호기와 객기의 망나니들이 무작정 적에게 돌진하다 목만 돌아올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전투를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훈련과 청소와 빨래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가끔 잘나가는 집안 아들과 그렇지 않은 집안 아들로 나누어 작전을 수행했다. 대체로 없는 집 아들들로 구성된 선발조가 선두에 서면 있는 집 아들들이 뒤에 붙어서 전쟁 기분을 내고 돌아오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쓸 만해 졌다 싶은 녀석들은 본래 데려왔던 자기 군대를 이끌고 독립하거나 다른 군대와 합류하여 별개의 작전을 수행하는 식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그럼으로써 나의 아들도 전쟁터에서 용맹하게 싸우고 있노라 운운하며 머리를 높이 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이비 부대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였다.
그는 처음 닷새간은 무기력할 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엿새째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그는 훈련도 이겨내지 못하고 고열을 내며 쓰러져 사흘을 쉬더니 또 이틀 훈련했다가 사흘을 쓰러졌다가 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막사에 가봤더니 과연 그는 자리에 누워있었고, 사병 하나가 그를 보살피고 있었다.
“저 치가 왜 여길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를 보살피던 자가 말했다.
“훈련할 때마다 힘들다힘들다 노래를 부르더니, 목검으로 사람 때려보라고 하니 저렇게 골골대며 쓰러지지 뭡니까. 정작 맞은 놈은 팔팔하게 나돌아 다니고 있는데.”
“때리랬더니 쓰러졌다고?”
“예. 하도 자기는 붓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 없다고 떠들어대길래 저치가 들고 온 종이랑 화구를 줬더니 좀 나아지더라고요. 그나마도 종이가 다 떨어져서 저기다 그리고 있습죠.”
사병이 그의 머리맡을 가리켰다. 머리맡의 누런 막사 천에 푸른 바탕에 금색 패턴, 그리고 검은 포인트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아직 다 그린 것은 아닌 듯 테두리는 불분명했다. 아직 작은 부분이었지만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옆에는 종이를 가득 채운 아름다운 패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타고난 환쟁이일지도 몰랐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푸른 안료가 얼마나 하는지 아나?”
내가 뜬금없는 질문에 사병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쳐다봤다.
“저 푸른 안료는 코발트를 잘게 짓이겨 가루를 낸 것이야. 금색 안료는 금을 그렇게 해서 물에 갠 것이고. 그림에는 돈이 들지.”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측은함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보다는 창자가 꼬이는 질투심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를 바라보는 한심함이었다. 그의 동생이 한 달에 한 번씩 물자를 조달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이 남자를 집으로 내쫓았을지도 몰랐다.
“전쟁 중에 한심하긴...”
혀를 차며 돌아서려는 순간 사병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에 시선이 갔다. 칼집엔 청록색의 바탕에 푸른색과 붉은 색이 들어간 문양에 흰색으로 문구를 그려넣어 놓았다. 그의 칼을 청해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자, 원래 지극히 단순한 모양의 장식 없는 가죽 칼집이었던 것이 보였다. 아마 그것 때문에 사병이 그를 돌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난 그걸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약함이 옮을 것 같아 얼른 칼을 사병에게 돌려주었다. 나약한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종종 그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징후를 보고받았다.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전쟁터에라도 데려가 그가 마주해야 할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쟁에 예외란 없다. 심지어 아녀자와 아이들마저도 전쟁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했다. 전장에서, 심지어 코란을 필사하는 것도 아닌 그림 나부랭이를 붙잡고 있어서야 그저 짐일 뿐이다. 모두가 쓸모 있어야 한다. 그건 놀랍게도 있는 집 도련님들의 부대에서도 그랬다. 모두가 자기 역할을 한다. 그림 같은 비생산적인 것은 존재 가치가 없다. 그런 것들은 평화롭고 풍족한 때에나 가치를 가지는 법이다. 지금은 평화롭지도 풍족하지도 않은 상황이다.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불운하게라고 해야 할지, 적이 전방 방위선을 뚫고 이곳까지 침범했다. 전선에서 약간 떨어진 위치였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우린 적을 맞이하여 준비해온 대로 움직였고,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아온 도련님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잘 움직였다.
오아시스를 뒤에 두고 바닥이 단단한 사막에서 우리는 이틀을 내리 싸웠다. 상대는 금속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었고, 더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속은 내리쬐는 햇빛에 금방 달궈졌고, 그들은 짧게 치고 빠지는 식의 전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뒤에는 성이 있었고, 우리에겐 심지어 작은 오아시스도 있었다. 기온이나 날씨에 적응 같은 거야 이미 모두 끝내놓은 상태다. 전투는 오래 끌면 끌수록 유리하다. 이 전투는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규모 병력인 것으로 보아 그들 중 일부인 것 같긴 하지만, 그들이 왜 이런 어리석은 싸움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적을 욕심내다가 이리로 온 것일까, 아니면 상부 무능한 자의 지시에 따라 이리로 온 것일까?
그러나 사흘 째 되던 날은 적도 무슨 악을 냈는지 제법 맹렬하게 싸워왔다. 말발굽에 먼지가 일고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했다. 나는 전전긍긍하며 병사들을 독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일대는 모두 평지에 바닥도 단단해서 작전을 짤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 결국 용맹함과 전투력만이 승패를 가르는 싸움이었다.
혼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갑옷을 입은 자가 뭐라고 계속 외치며 주변인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큰 소리였는데, 부관이 “말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저 자를 잡으라!”
갑옷을 입은 자를 눈으로 좇다보니 의외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알 아하브(아하브의 아들), 바로 ‘그’였다. 갑옷을 입은 자는 그를 칼로 내리치려 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죽어선 안 된다. 다급하게 외칠 겨를도 없이 기사의 칼이 그의 머리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주 의외로, 기사의 목을 뚫었다. 나의 자리에선 그렇게 보였다. 나중에 보니 목을 뚫은 게 아니라 입으로 칼을 쑤셔 넣었던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쓸모 있었던, 가장 쓸모 있었던 순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혼전 탓에 빠르진 않았지만 적이 물러가고 있었다.
적들이 완전히 물러가고 난 처음으로 그에게 칭찬을 했다. 거하게 한바탕 토했는지, 옷에는 땀과 피와 토사물이 아직 묻어 있었다. 냄새가 지독함은 당연했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첫 경험이었다. 여기에 있는 누구나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누구나가 그걸 이겨냈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되고, 도태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는 여태까지의 내가 봐왔던 많은 병사들이 그랬듯이 한동안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원래 나약했던 만큼 더 요란스럽게 앓았다. 그는 또다시 고열을 내고 드러누웠다.
전투는 하루를 건너뛰고 그 다음날 또 개시되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것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노란 태양이 사정없이 이글거리고 금속 갑옷을 입은 적들이 불판 위의 고기가 된 마냥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는 맑고 더운 날이 좋았다. 그럴 때면 어설픈 구실을 붙여 땅싸움을 시작한 어리석은 자들의 천사들도 저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비는 달랐다. 미끄러운 땅과 축축하게 달라붙어 움직임을 방해하는 옷가지나 쉽게 확보되지 않는 시야가 양쪽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 조건이 공평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승리가 결정되어 있었다. 원군이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은 우리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저기 포박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림이...”
대열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홱 돌려 노려보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동안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병사들은 모두 몸을 긴장시키고 입을 다물었다. 전투 전에는 전투만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방금 그 말을 한 녀석의 목을 적 대신 내가 베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아하브 대사의 아들이라 해도 말이다.
“알다시피 저쪽에 우리의 원군이 도착해 있다. 적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일찌감치 내뺐으면 좋았을 텐데도 항복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한다. 먼저, 원군으로 도착한 알 샤마드의 군대가 적을 치고, 우리는 그보다 늦게 적의 후방을 칠 것이다. 우리는 맹렬히 싸울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전투 역시 우리의 승리가 될 것이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족을 위해 싸우라!”
연설을 끝내자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나는 ‘그’를 찾았다. 그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등을 둥글게 말고 시선은 한 군데 고정시키지 못하고 계속 움직였다. 나는 혀를 차며 그의 위치를 맨 뒤로 옮겼다. 괜찮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병력은 적의 세 배에 다다랐다. 도련님들은 무사할 것이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은 전투가 끝나고 닷새 뒤였다. 고열을 내고 드러눕고는 여태 일어나지 못했다는 보고였다.
“누워있는 것을 확인했나?”
“예.”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물어봤더니 선선히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지 않고 교관의 얼굴에 내뱉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아하브 대사의 아들이라 해도 이건 너무했다. 충격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약해빠진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난한 집의 아들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그는 보고 배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 요량으로 그의 막사를 찾았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두 명의 사병이 나를 맞이했다. 막사 천의 안쪽은 온통 파랗고 빨간 물감으로 그린 패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그렸냐고 물어보자 알 아하브가 그렸다고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해 왔다. 정말 그 다운 행동이었다. 아무리 부잣집 도련님들이 모이는 곳이라 해도 이 녀석 만큼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통솔자가 왔음에도 고개도 들어 보이지 않는 것도 화를 돋구었다. 그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씨근거리는 숨을 참지 않고 그의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들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