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에 가까운 투명한 빛이 가게의 통유리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평일 낮, 시계는 시침이 3을, 분침이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님은 모두 돌아가고 가게 안은 구식 목제 인테리어만이 안락한 빛을 내고 있었다. 윤이 나도록 닦인 갈색 카운터와 그 위에 놓인 오래된 나침반 역시 태양빛을 반사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하고 따스한 손길이 볼을 감쌌다. 그리고 익숙한 여자애가 눈을 감고 자신의 입술을 겹쳐왔다. 여자애의 입술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짧은 순간,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여자애의 입술은 곧 내게서 떨어졌다.
"피하지 않는구나, 카즈키."
토오미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댔다. 진열된 컵과 접시가 화창한 햇볕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토오미 역시 화사하게 웃었다.
"고마워, 카즈키 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앞치마를 벗어 늘 두던 곳에 걸었다. 진초록색의 앞치마는 토오미의 성격을 반영하듯 오래된 얼룩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기며 멍하니 그녀가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내일 봐."
토오미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 문이 흔들리며 청명한 종소리가 그녀의 자취처럼 남았다. 나는 멍하니 토오미가 나간 쪽을 바라봤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토오미 마야는 편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곁에 있으면 언제나 안심할 수 있었다. 혹시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아마 매일 밤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가 섬을 지킬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마 그 안에서 나는 안락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우시가 그것을 용인해준다면.
그래,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다. 여태까지 그는 내게 토오미의 존재를 용인해줬다. 하지만 어느 날 내게 토오미와 떨어지라고 한다면?
그건 그때 생각할 일이다.
생각하는 사이 배달 나갔던 미조구치 씨가 돌아왔다. 이제 문을 잠그고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내 볼일을 보고 돌아오면 됐다. 시침이 3을, 분침이 1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분명 소우시의 최적화를 위한 모의전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그 상대를 해야했다. 여기서의 결과에 따라 소우시와 트윈 독 포지션으로 출격하게 될 수도 있었다. 16시를 기해 한 시간동안 테스트를 이행한 후 간단한 메디컬 체크를 거친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예정이었다. 난 왠지 당장 그와 크로싱을 하고 싶었다. 2년이나 연결되어 있던 존재를 되찾음과 동시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이상한 허전함을 느끼게 했다.
"카즈키."
미조구치 씨가 불렀다. "예?"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내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버릇, 이제 그만 고쳐."
또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퉁기고 있었다. 예. 순종적인 대답을 하며 앞치마를 벗었다.
오늘은 전에 없이 날이 화창했다. 어제까지 흐린 날이 계속되었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날씨란 이렇게 일순간에 변하는 것이었나. 예전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일은 또 날씨가 어떻게 될지. 그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바닷가에서 소우시를 발견했다. 시계를 보니 3시 20분이었다.
"소우시!"
불렀지만 못 들은 것 같았다. 난 다소 거친 방법으로 언덕길을 최단코스로 단축해 그에게로 다가갔다. 제법 큰 소리가 났을텐데도 그는 내게 곁눈질조차 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돌아오고나서 가끔 이랬다. 이럴 때면 그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늘 그랬듯 얌전에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바다는 전에 없이 푸르게, 백사장은 눈부시도록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하늘이 시야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한 조각 구름조차 없이, 신기하리만치 파랗고 깊게, 그 위에 있을 우주를 투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이 이상 불쾌해지기 힘들 때까지 침묵이 계속되었다. 시침과 분침은 아직 3과 6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슬슬 가자고 말해야 할까 싶을 때 소우시가 말을 걸어왔다.
"일찍 나왔군."
"식당 일이 좀 일찍 끝나서..."
사실 별로 일찍 나온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대답했다.
"갈까?"
그가 겨우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난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소우시가 선행하고 내가 뒤를 따랐다. 이제 하늘이 아름답다든가 하는 소리는 안 해? 그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난 이제 쿠루스 미사오의 이야기는 지긋지긋했다.
「풍향은 남남동 2m/s, 습도 68%, 시계는 더할나위 없이 선명합니다. 테스트 하기 좋은 날이네요.」
「좋은 날을 골랐네, 미나시로 군. 기본 조작법이나 룰은 다들 숙지하고 있겠지? 카즈키 군과 미나시로 군은 장착된 탄환이 페인트탄임을 확인해 줘.」
「페인트 탄 확인했습니다.」
"페인트 탄 확인했습니다."
「미나시로 군이 출발하고 15초 뒤에 카즈키 군이 출발, 미나시로 군은 카즈키 군에게 잡히지 않도록 15분간 움직인 후 사이렌이 울리면 20분간 휴식. 그 뒤엔 공수 교대해서 같은 테스트를 반복하면 돼. 카즈키 군, 미나시로 군은 실제로 탑승해서 파프너 움직이는 건 처음이니까 살살 해줘.」
"예."
살살. 난 아마 소우시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움직이지 말라고 생각하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게 될 터였다. 왠지 반항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소우시의 기체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손을 흔들었다. 크로싱 시스템 때문에 내 생각이 흘러들어갔는지 '다치지 않는 선에서 실전처럼 해달라'는 의지가 흘러왔다. 기우다. 절대 다치게 할 리가 없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난 그의 왼쪽 눈을 빼앗고 그의 육신을 무(無)에 이르게 했다. 이미 차고 넘칠만큼 충분했다. 차라리 인간이 아니라 그의 도구가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언제나 그의 의도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생각해야만 했다.
사이렌이 울리고 소우시가 달리기 시작했다. 과연 코요나 사쿠라 때와는 달랐다. 그는 8초만에 언덕을 넘어 모습을 숨겼다. 나는 15초가 가득 차길 초조히 기다렸다. 기다림은 마치 바늘의 떨림 같았다. 그건 나침반의 침 같기도 했고 고장난 은색 라디오의 주파수계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계기판의 바늘일지도 몰랐다.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가 나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그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7년 반 전의 그 때와 비슷했다.
4년 전 해가 쨍하던 날, 쿠라마에가 우리반 반장이 되었다. 난 별로 되길 바란 것도 아니면서 켄지에게 표를 던졌다. 쿠라마에는 불편했다. 그녀는 늘 소우시와 붙어 다녔다. 뭔가 비밀이 있는 것처럼 속삭이고 집에 갈 때도 자주 같이 다녔다. 소우시는 벌써 3년 이상 내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나는 소우시를 피했다. 우린 3년동안 내내 반이 갈렸고 무슨 행사로든 같이 활동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복도에서나 교문에서, 운동장에서 가끔이라도 마주칠 때면 심장이 조여드는 서늘한 죄악감과 긴장감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아무 말 없이 스쳐지나 갈 때면 실망과 고통이 온몸을 지배하는 감각을 맛봐야만 했다. 쿠라마에는 그 파편이었다. 아마도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그녀와 마주칠 때면 항상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카즈키, 쿠라마에를 좋아해?"
코요가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조금 황당해 했던 걸로 기억한다. 코요는 "자주 보고 있길래..."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자주 보고 있었나? 의식하지 못 하고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마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미나시로 소우시를 피하기 위해 어디 있는지 항상 확인하는 버릇을 가지게 된 것처럼. 그가 누군가와 이야기 할 때면 항상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처럼. 아마 그녀에게도 그런 것이 붙어버렸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소우시의 대리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절대 혼내지 않는 소우시를 대신해 폭로하고 비난하고 힐책하고 몰아세워 죗값을 치르게 해주기를. 3년 반 전, 소중한 눈을 잃어버리게 한 대가를.
하지만 쿠라마에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우시는 내게 유리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시각 정보 공유를 의식해서인지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고, 나도 대충의 위치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소우시를 향해 달려가고 소우시는 견제사격을 가하며 서쪽으로 이동했다. 몸을 굴려 피한 후 나도 소우시를 향해 사격했다. 그는 재빠르게 움직여 탄환을 피했고 나도 그를 따라잡기 위해 움직였다.
몇 번의 위협사격이 있은 후 거의 따라잡은 나를 쏘기 위해 그가 총을 들어 겨눴고, 나는 익숙한 움직임으로 총신을 위로 쳐내며 어깨로 그를 밀어 넘어뜨렸다. 두 대의 파프너가 동시에 쓰러졌다. 나는 아래에 깔린 소우시의 어깨를 왼손으로 누르며 그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댔다.
몇 초간의 정적이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길었는지는 알 수 없다. 쏘았다면 아마 금방 휴식시간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쏠 수 없었다. 소우시 역시 움직임이 굳은 채 가만 있었다. 보다 못한 카나메 선생님이 "1라운드 종료! 잠시 휴식!"을 외치고서야 사이렌이 울렸다.
"나한텐 페인트탄 하나 못 쏘겠다는 거냐, 카즈키!"
그는 조용히 쏘아붙였다.
"미안..."
이번만은 미안해 하지 않으면서 사과했다. 나는 그가 테스트 중에 하늘을 보고 있었던 것을 생각했다. 뭐든 그의 기대에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가 빤히 쳐다보자 난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실망했다면, 예전처럼 돌아가게 된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휘저었다. 손가락 끝이 저릿해져 주먹을 쥐자 식은땀이 나 있었다.
"됐어."
옅은 한숨과 함께 용서의 말이 흘러나왔다. 안도감에 어깨와 허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대기실 의자에 앉은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주저앉았을 터였다.
그리고 수 분간 서로 말이 없었다. 소우시도 나도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같이 놀 때도 이렇게 종종 침묵하곤 했다. 침묵은 오히려 괜찮았다. 말보다도 공기를 통해서 전달될 때가 오해가 적을 때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소우시는 날 좋아했다. 그게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기 때문인지 내가 파프너의 파일럿이어서인지 섬을 지키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쿠라마에가 살아있었다면 이 자리에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쿠라마에였을 것이다. 슬쩍 들여다본 적성 성적은 쿠라마에 쪽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쿠라마에가 살아 있었다면.
나는 소우시를 훔쳐보았다. 시나제틱 수츠는 온몸의 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깨, 허리, 허벅지와 둔부 측면은 아예 직접적으로 피부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수츠의 색상은 그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흰 피부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난 왠지 토오미 마야가 생각났다.
"소우시, 토오미와 사귀어도 괜찮을까?"
내 질문에 소우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날 돌아보는 얼굴은 조금 질린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는 왜 그런 걸 자신에게 묻는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판단해, 카즈키."
소우시의 대답에 난 왠지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바닷가에서 우연히 나침반을 주운 적이 있었다. 우린 나침반을 사용하는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나침반이란 건 그저 지식으로서 갖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신기한 마음에 그걸 들고 걸어보았다. 붉은 쪽이 북쪽, 파란 쪽이 남쪽. 하지만 태양을 기준으로 방향을 재어봤을 때 남쪽과 북쪽이 맞지 않았다. 태양은 틀리지 않는다. 나침반은 항상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나는 나침반이 고장난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도 소우시는 바닷가에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었다. 쿠루스 미사오인가? 코요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말을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소우시의 목소리에 안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5년만에 말을 걸어 내게 파프너에 타 적과 싸우라고 했을 때 내가 안심했던 것처럼.
소우시는 사실 좋은 녀석이다. 다정하고, 마음 속에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마음을 맞대어 보면 그정도 사실은 금방 알 수 있다. 어떤 과정에서였든 자신의 한쪽 눈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장본인을 용서하다 못해 고맙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는 녀석이다. 적이었던 페스툼을 축복하고 그들의 축복을 받아 무의 세계로 돌아갔으면서도 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의지가 있는 녀석이었다. 누구라도 그를 좋아하고 그는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한쪽 눈을 빼앗고 손안에서 그의 육체를 잃었던 나만이 그의 앞에서 죄인이 되었다. 목숨으로밖에 갚지 못할 부채는 내 모든 나침반이 그에게로 향하게끔 만들었다. 내 세계는 그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모든 세계가 섬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사내를 중심으로. 그가 미나시로 츠바키를 숭배하였듯 나도 그를 숭배하고 그가 지키려는 섬을 나도 지킨다. 모든 것들은 그의 바람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풍족하게, 그리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의 안에는 많은 존재들이 있다. 쇼코, 코요, 쿠르스, 마모루, 미치오 형,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스테프들. 섬에서 죽어간 많은 생명들. 그리고 페스툼. 그것들은 모두 내것이 되어간다. 싫어하면서, 또 사랑하면서.
"카즈키."
그가 이름을 불러주었다. 마음의 침이 가늘게 떨렸다.
"응, 소우시."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더 말이 없었다. 계속해서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소우시가 불편했다. 그가 눈앞에 없을 때도 난 그를 계속해서 생각해야만 했다. 그의 목소리가 날 움직였다. 날 주눅들게 만들고 움츠러들게 만들며 다른 것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날 향할 리가 없는 나침반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그의 말에만 귀기울이게 만들었다.
"소우시."
그를 불렀다.
"응, 카즈키."
그가 대답했다.
오늘은 왠지 어제와 같은 불쾌한 기분을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제처럼 높고 맑은 하늘이었다. 마치 쿠루스 미사오가 보여줬던 그 기억 속의 하늘과 비슷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미나시로 소우시가 보고 있는 하늘이었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어쩌면 난 사람으로서 인격보다는 그에게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나 그의 집에 묶인 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 '어쩌면 코요에게 말을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바다에, 하늘에 말을 거는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가끔 옆에 내가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언제 왔냐는 듯 툭 말을 걸어온다.' 같은 문장을 연습장에다가 썼지만 흐름상 빠졌어요.
카즈키와 소우시는 서로 부를 때 대답을 "응?"이라든가 "왜?"라든가 하는 말을 하기보다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껴서 이런 식으로 쓰긴 했는데... 사실은 최애는 카스가이 코요와 쿠루스 미사오라는 점이 함정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소하게 해설하자면 시나제틱 수츠를 입은 걸 보고 마야를 떠올린 건 '엇, 야해' => 키스하고 싶당 -> 그러고보니 마야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것으로, 별 뜻은 없습니다.
사실은 쿠라마에를 비롯한 소우시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것에 질투하는 것을 써보고 싶었는데 안 됐어요... 극장판 카즈키는 정말 그래줄 것 같았는데 안 됐어요.. 평소보다 좀 섬세한 것을 써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안됐어요.. 괜찮아요, 그냥 하룻동안 의식의 흐름을 따라 줄줄 써내려간 것 치곤 괜찮은 편일 거라고 생각...을... 해야하는데...
누구라도 좋아요. 제게 가르마를 주세요... 전 이제 샤아가르마든 가르마샤아든 샤아가르마샤아든 상관하지 않아요 일단 가르마를 제게 주세요(시름시름)
사실 양쪽이 거의 적절하게 믹스된 입장이라 일단 가르마X샤아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쪽이라고 말하기에도 저쪽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이 포지션입니다. 정신적으로는 확실히 샤아X가르마고 육체적으로는 가르마X샤아를 표방하고 있지만 적절히... 사실 리버스 상관 없어요. 가르마가 여자가 되지만 않으면... (......)
스티브는 당황했다. 그는 냅킨으로 서둘러 셔츠에 묻은 붉은 점들을 닦아냈다. 이게 뭐라고 했더라. 고추장 소스랬던가? 잔뜩 헤집어놓은 그릇 안에는 아직 반도 먹지 못한 면발과 야채들이 들어 있었다. 입안은 얼얼하고 벌써 물만 네 컵째 들이킨지라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았다.
"오웃, 절경이로군. 어딜 여행해도 이같은 광경을 볼 수 있을까!"
맞은편에서 스타크가 이죽거렸다. 스티브는 그를 쏘아보곤 다시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들기가 무섭게 젓가락 한 쪽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토니 스타크는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티브는 한숨을 쉬었다. 점심 초대에 응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긴 속눈썹을 내리고 잠시 화를 참았다.
2시간 전, 막 잡은 범죄자를 경찰에게 넘겨준 스티브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토니 스타크였다. 그는 평소처럼 가볍기 짝이 없는 말투로 그에게 앞으로의 스케줄을 물었다. 하던 일 계속 하고 있을 거라고 얘기했더니 "별 스케줄 없네. 점심이나 먹지."라며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해왔다. 거절의 말을 하기도 전에 연락을 끊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티브는 이국적인 이름의 식당을 약속 시간에 맞춰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단이다.
"캡, 결식아동을 생각하며 이 음식을 낭비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음식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주제에 잘도 복지를 논하는군."
스티브는 베시시 웃는 토니의 얼굴을 한 번 흘겨보곤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몹시 매운 듯 얼굴이 붉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쫄면에 젓가락을 박았다. 고아로 자랐고 군인으로 40년대를 보낸 그가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쇠젓가락을 사용하는 한식 - 그 중에서도 메뉴가 쫄면정도 되어서야, 그가 고전하는 것도 당연했다. 붉은 소스로 미끌거리는 면발을 가까스로 집은 스티브는 신중하게 그것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면발이 미끄러지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는 손가락에 힘을 줬다.
우그럭.
토니는 순간 먹고있던 불고기를 내뿜을 뻔 했다. 그것은 마치 스티브 로저스가 캡틴 아메리카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피터 파커가 캡틴 아메리카의 움직임에 대해 표현한 '부드럽고, 빠르고, 치명적이고 민첩한 발레. 그리고 강력하기도 한' 구절 그대로 부드럽고 빠르고 치명적이고 민첩하며 우아하고 강력한 손길로 그는 쫄면을 집어든 젓가락을 우그러뜨렸다. 물론 쫄면은 그릇 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 젓가락 값은 변상해야겠지."
토니 스타크는 그의 미간 사이의 주름을 보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그를 흘끔흘끔 쳐다봤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와중에 스티브의 '젓가락' 발음이 너무나도 훌륭해서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젓가락 발음만큼 젓가락질을 좀 잘 해봐! 천하의 수퍼솔저가!"
"그래, 자네 체술만큼 내 젓가락질이 엉망이란 건 인정하지."
그는 식탁 구석에서 새 젓가락 한 쌍을 꺼냈다. 토니는 낄낄 웃으며 그의 젓가락을 낚아챘다.
"이러다 점심이 저녁 되겠어. 내가 먹여주지."
"...... 새 메뉴를 시키는 게 낫지 않겠나?"
"음식쓰레기가 환경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거야, 캡?"
토니의 정론 아닌 정론에 스티브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입을 벌렸다. 토니는 능숙한 젓가락질로 쫄면을 들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스티브는 면발을 빨아들인 다음 어색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토니는 그의 입술에 묻은 붉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리고 나의 체술이 그렇게 엉망인지는 침대에서 가늠해보는 게 어때?"
스티브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며 켈록거렸다. 콜? 대답을 재촉하는 토니의 눈빛을 외면한 채 스티브는 아주머니를 불러 포크를 달라 주문했다.
덕분에 그는 어색한 젓가락질에서는 해방될 수 있었으나 정색하는 토니를 달래느라 3시간을 쇼핑에 동참해준 다음 양쪽 팔에 백을 주렁주렁 매단 채 자신의 방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토니는 다음번에 중식당으로 스티브를 불렀을 때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하는 그를 발견하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긴 속눈썹이 꿈결처럼 내려앉았다. 쌉싸름한 맥주의 잔향이 타액과 함께 섞여들었다. 긴장된 호흡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심장이 떨려오고 손가락 끝으로 짜르르한 감각이 흘렀다. 토니는 그 감각에 상대의 팔을 더욱 세게 잡았다. 스티브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허리에 손을 둘렀을 뿐이었다. 말은 필요없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캡, 그게 사실입니까?"
뜬금없이 날아온 호크아이의 질문에 스티브는 고개를 들었다. 뭐가? 스티브는 보던 쉴드의 리포트와 호크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도저히 맥락을 읽을 수가 없었다.
"고백 받았다고 들었는데."
스티브는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짚히는 곳이 없었다.
"그런 적 없는데."
호크아이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을 했다. 이상했다. 보통 고백 받았냐는 질문을 이런 식으로 하나?
"혹시 내가 요즘식의 고백을 못 알아듣거나 한 일이 있었나?"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던 거였어요. 난 잠시 냇과 콜슨 요원이랑 볼일이 있어서... 그럼 수고하세요."
그렇게 호크아이와의 짤막한 대화가 끝났다. 스티브는 떠나가는 호크아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스티브는 잠깐 생각을 해봤지만 군인답게 당면한 과제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토니는 상당히 유쾌한 기분으로 테이블 주변을 둘러보았다. 헬리케리어의 회의실 안에선 닉 퓨리의 호출에 모인 멤버들-스티브 로저스를 제외한 멤버들-이 스티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언제나 스티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토니는 그 사실에 항상 불만을 느꼈다. 첫 번째는 시선을 즐기는 토니 스타크의 기질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모두들 스티브를 지나치게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항상 토니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스티브는 지나치게 섹시한 몸매를 하고 있고 고전적인 단정함이 지나친 나머지 섹시하기까지 한 얼굴을 갖고 있으며 지나치게 성실한 성격때문에 외형에 대한 자각 없이 누구에게나 성실한 자세로 임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주변 인물들을 매료시키는 단점이 있었다. 심지어 그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토니는 그가 평소 입고 다니는 촌스럽고 풍덩한 체크무늬 남방을 들고 쫓아다니며 저 지나치게 매력적인 허리라인과 탱글한 엉덩이를 꽁꽁 싸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싶은 욕구와 그의 핫한 몸매를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동시에 드는 이상한 현상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러고보니 스티브는 연애 안 하나요? 인기 있을 것 같은데."
배너박사가 말했다. 토니는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것을 손가락으로 숨겨야만 했다. 호크아이는 아주 잠깐 못마땅한 눈으로 토니를 흘겨본 다음 배너박사에게 대답했다.
"뭐 워낙 성격이 그러니까요. 바른 파트너를 찾아서 신중하게 연애하겠죠."
토니의 입이 이젠 숨길 수도 없이 찢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래, 그게 바로 나야! 그 바른 파트너가 나라고! 자랑하고싶어 입술이 근질거렸다. 실은 호크아이에게 은근슬쩍 말을 흘린 적이 있었다. 아니, 그걸 과연 은근슬쩍이라 표현해도 좋을 것인가-
"꼭 연애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있으니 외로움을 덜 수 있을 겁니다."
뒤에서 콜슨이 끼어들었다. 그 때 토니는 손뼉을 한 번 쳤다. 자신을 향해 모여든 시선을 확인하며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아냐, '나'지."
결국 말했다. 말해버리고 말았다. 토니는 두근거리는 눈빛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정작 놀란 얼굴을 한 건 스타크 타워에서 함께 일하는 배너 박사 정도였을 뿐, 모두들 시니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캡이랑 나랑..."
"아니지 않아요?"
설명이 부족했나, 실망스러운 리액션에 부연설명을 붙이려는 토니의 말을 나타샤가 잘라냈다.
"말하기도 전에 부정하는 행동은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지만 듣고 싶지 않아요'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가 가졌음을 알고 있는 것을 시인하는 행동이지."
"아뇨, 그녀는 당신이 더이상 헛소리 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은 겁니다."
콜슨이 끼어들었다. 나탸사는 고개를 까딱이며 호크아이를 가리켰다.
"바튼이 말해줬어요."
아하, 팀이다 이거지? 뭐 그래, 좋아.
"헛소리가 아냐, 우린 마음이 통했어! 화요일엔 키스도 했다고!"
"화요일이면 다같이 펍에 간 날 아녜요? 그런 광경 보지도 못 했는데?"
"당연하지, 남자 화장실에서 했는데 자네가 볼 수 있을 리가......!"
말을 하던 토니는 입을 다물었다. 유압식 자동문이 열리고 화제의 사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더 설명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으니 잘 보라고."
토니는 나타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타샤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어서와요, 캡. 수고했어요. 미션에서 돌아오자마자 미안하지만 곧바로 회의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안 괜찮잖아! 걸음걸이 왜 그래?"
토니가 스티브의 걸음걸이를 지적했다. 사실 그는 웬지 좀 어기적거리고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의 유니폼은 조금 먼지가 묻은 정도로, 별로 지저분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추격전이 좀 있었는데 잡히는 게 하필 꽃마차더군."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연분홍 꽃과 금실 자수 놓인 천으로 치장된 말을 타고 도심을 달리는 파란 쫄쫄이의 남자가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혹시 다쳤을까 걱정했던 사람들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캡, 기마 자세는 우리집에서나 보여줘."
특히나 이 사람이 말이다. 곧 여유를 찾은 토니가 유들유들한 말투로 위험한 발언을 던졌다. 뭐 키스만 했다면서 이딴 섹드립 어디서 꺼내냐 싶은 멤버들은 경악한 눈으로 토니를 돌아다 보았다. 하지만 스티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앉으며 파란 눈동자로 토니를 쳐다보았다.
"자네 집에 말이 있었나? 어쨌든 됐네. 전속력으로 한 시간을 넘게 탔더니 엉덩이가 아파."
"아니, 아무리 아크원자로 파워로도 전속력으로 한 시간 이상은 무리야. 그래도 엉덩이 안쪽이 좀 아파질 수는 있겠지만 끝내주게 기분이 좋을 거란 건 장담할 수 있어. 다들 반응이 좋았거든. 걱정된다면 세이프워드를 정해두고 하면 되고."
토니는 재빠르게 대꾸했다. 콜슨은 총을 꺼내 들었고 호크아이는 경악했으며 나타샤는 몹시 불쾌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이 대화의 당사자인 스티브는 콜슨 요원이 꺼내든 총에 몸을 긴장시켰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토니의 말에 뭔가 큰 문제가 있는 듯 했다. 그는 진지하고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토니의 말을 탈 일은 없을테니 그만해. 회의를 시작하지."
그리고 그는 토니가 얼마나 깊이 말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음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스티브는 아크원자로를 단 말이 대체 뭐길래 저러는 걸까 싶어 후일 다른 멤버들 몰래 그의 말을 구경하러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날의 작은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토니 스타크는 몇 통의 문자를 받을 수 있었다.
From. Romanov pm07 : 28
ㅋ
From. Bartton pm07 : 29
ㅋ
발신자표시제한 pm07 : 29
혼자 있을 때를 조심하십시오.
From. Fury pm07 : 32
상담사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알아봐 주겠네. 물론 자네가 알아서 할테지만.
From. Stieve Rogers pm07 : 35
로데오 머신에 아크원자로를 달아놓는 건 조금 오버가 아닌가 생각하네. 하지만 자네가 말을 무척 좋
전용 헬기 안에서 문자를 확인하던 토니는 무척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쓸쓸한 감정은 아홉 살 생일날, 밤 열시까지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방으로 잠들러 갔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배너 박사가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그나마 토르가 아스가르드에서 와 있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토니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쓸쓸히 휴대전화를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파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터운 근육질의 팔뚝이 다시 돌아와 남은 위스키를 입 속에 털어넣었다. 두툼한 입술이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 끝엔 하임달이 차원의 문을 지키고 있었지. 하임달의 허가만 있으면 우린 어디로든 갈 수 있어. 지금은 부서지고 없지만. 그건 나 때문인가 로키 때문인가... 아무래도 좋아. 거기 이외에도 아스가르드에는 아름다운 곳들이 많으니까. 아버지 오딘의 왕좌에 앉으면 7개의 세계를 모두 볼 수 있어. 아버지는 외눈이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내려다보고 계시지... 그래서... 아스가르드는 풍요롭고 아름답고... 아버지께서 마법을 건 맥주는... 하계의 그 어떤 맥주보다 맛있지."
허스키한 목소리가 꿈을 꾸듯 말을 이었다. 옆에 앉아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스티브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모두가 잠든 밤, 고층 타워의 전면유리로 비치는 달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 보였다. 나지막히 '자네도 그 맛을 봐야해' 하고 읊조리던 토르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스티브를 기분 좋게 했다. 완벽하지 않은 정적이 그를 감상적인 기분에 젖게 했다.
"내 세계는 평화롭지도 풍요롭지도 않았지만"
스티브는 토르가 어깨에 기대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토르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얼굴 위로 늘어진 머리칼을 걷자 긴 속눈썹과 조각같은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곳은 내가 속해있는 곳이었기에, 퇴색할 일 없이 항상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을 거야. 그리고 그건 토르 자네에게도 그렇겠지."
스티브는 토르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안았다. 어깨 위로 닿는 체온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다.
스타크 타워의 전면유리로 둥그런 달이 가리거나 왜곡되는 일 없이 비쳤다. 마치 이전의 그때처럼.
어디서 리퀘로 썼던 스티브 왼쪽 토르 오른쪽. 스티브가 왼쪽으로 갈 수 있는 상대는 토르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토르는 술에 안 취한단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인가요?
그리고 비프뢰스트라고 적어놓은 건 미국식으로는 바이프로스트라고 읽지만 북유럽신화 기반이니까 비프뢰스트라고 적었습니다. 랄까 저는 당연히 비프뢰스트인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ㅋㅋ 신화 쪽만 제대로 봤으니까요. 바이프로스트 말 나오는 걸 보고 깜놀. 생각해보면 미국엔 O 위에 점땡땡 붙어있는 그게 없으니 그렇게 읽는구나 싶었습니다. 새로운 발견.
석양이 지고 있었다. 매끈하기 그지없는 빌딩들이 모두 한 가지 색으로 빛나고, 그 사이로 보랏빛 땅거미가 슬금슬금 지평선을 물들이고 있었다. 빌딩의 머리 위에 얹힌 가뿐한 새털구름이 한결 풍취를 더했다.
하얀 식탁보 위엔 두툼한 스테이크가 셋팅되어 있었다. 구운 당근이며 브로콜리며 모든 것들이 생각했던 대로 놓여져 있었다.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는 자신이 차린 식탁에 만족했다.
"상대가 당신만 아니었다면 딱 좋았을텐데 말이야."
토니는 포크를 들어 맞은 편에 앉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짧은 금발을 단정하게 정리한 미남이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포크와 나이프를 든 손엔 팔꿈치 근처까지 오는 투박한 붉은 장갑을 끼고 전반적으로 비비드 블루의 타이츠를 입고 있었다. 가슴팍엔 흰 별dl 박혀 있었고 복부엔 붉은 색과 흰 색의 스트라이프가 교차되고 있었다. 다만 그런 촌스러운 디자인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미남이었고 썩 몸매가 좋았다.
"난 버거 세트 하나면 충분했어."
"나도 벌써 콜레스테롤 걱정하는데 노인네는 더 신경써야지. 안 그래?"
토니는 그에게 와인을 더 따라주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와인이 잔 속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봤다. 토니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았다. 긴 속눈썹과 투명하리만치 파란 눈동자는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할만 했다.
"맛있군. 고마워."
우아한 솜씨로 고기를 자르며 그는 말했다.
"말이야 말이지, 이건 내 비장의 무기인데 맞은 편에 앉아있는 게 파란 쫄쫄이 입은 덩치 좋은 남자라니, 말이 돼?"
그 말을 하자 토니는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식탁, 딱 두 개만 셋팅된 의자, 전에없이 아름다운 바깥 전경, 그리고 맞은 편에 앉은 것은 페퍼도 아리따운 아가씨도 아닌 글래머러스한 남자라니, 이 참을 수 없는 간극에 터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토니는 소리내서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전염된 것인지 맞은 편의 남자도 작게 웃었다. 그러자 토니는 웃음을 멈췄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 스타크, 내 얼굴에 뭐라도...?"
토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술을 퍼마시다가 아크리액터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증명식이 생각나 다이어리 여백에 적다가 공백이 모자라 나머지는 생략했는데 실은 아무래도 그걸 까먹은 것 같아. 알콜로 인한 단기기억상실이 치매의 일종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치매의 일종이 맞는 것 같단 말이지. 물론 내가 치매에 걸려도 닉 퓨리보단 똑똑할 거란 자신이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잔에 따라놓은 와인을 급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눈동자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커다란 눈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사실 그는 당황했다. 맞은 편에 앉은 남자의 용모가 준수해서라거나 뭔가 못 볼 것을 봤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놀랐기 때문이었다. 캡틴 아메리카 - 맞은 편의 남자가 살짝 웃은 것으로 그는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그를 만난 지 대략 2개월째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에서야 알았다. 맞은 편의 남자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아니, 토니 스타크는 그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웃긴 웃었겠지, 그가 보지 않는 곳에서.
"캡, 사람이 웃지 않고도 지낼 수 있나?"
토니가 물었다.
"?? 글쎄, 지낼 수는 있겠지만 불편하겠지."
스티브는 대답을 하곤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들고있던 포크와 나이프가 아래로 쳐졌다. 그는 토니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챘다.
"나도 웃는 걸 싫어해서 그러는 건 아냐. 다만 아직은 적응이 필요할 뿐이야."
"그런 소릴 자주 들었나봐?"
"닉 퓨리와 블랙 위도우와 아파트 주민들과 방금 자네까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토니는 당황하며 손사래질을 쳤다.
"아니아니, 굳이 억지로 웃으라는 건 아니야. 난 그저..."
토니는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정리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다시 그가 알던 평소의 스티브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닉 퓨리도 블랙 위도우도 아파트 주민들도 그의 웃는 얼굴을 보지 못 했다니 왠지 모를 만족감이 들었다. 그들은 보지 못했을 그의 미소는 우아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었다.
"그저 웃는 얼굴이 더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토니는 그 정확한 표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더... 뭐랄까, 더 아름다운 느낌을 줘."
토니는 말하고선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내가 뭐라고 한 거야? 말해놓고 스스로 당황하는 토니의 모습을 보고선 스티브는 피식하고 웃었다. 이번엔 고른 치아까지 드러냈다. 토니는 그제서야 자신이 찾던 표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사랑스러웠다. 이 모든 감정은 사랑스러움이었다. 그는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먹고있는 접시를 비울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봐주시면 감사하고 그렇지 않아도 사실은 상관은 없습니다. 아마 이쪽 관련 이야기가 앞으로 종종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해요.
뭐 그런 물건입니다!!!
보구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남빛 하늘에 유성우처럼 궤적을 그리며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무기들을 피하여 경찰들과 마법사들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부서지는 소리, 부딪치는 소리, 뛰어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매캐한 먼지 사이로 퍼졌다. 경찰차가 고철처럼 찌그러지고 아스팔트가 움푹 파였으며 온통 피와 고깃덩이가 튀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꼼짝도 않고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검은 라이더자켓을 입은 금발 적안의 남자였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앞에 쓰러진 한 남자에게 못박혀 있었다. 신부복을 입은 장신의 남자였다. 남자는 무릎을 굽혀 시신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피가 낭자하게 흘러 죽은 얼굴이 파리해져 있었다.
"얄궂은 일이다. 무수히 많은 세계에서 네 죽음을 느껴왔건만, 그것은 쓸쓸했을지언정 이런 슬픔과 분노를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과연 보고 듣는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것은, 죽음의 비명소리만큼이나 끔찍한 현실감을 갖게 한다."
슬픈 것도 같고 호기심이 어려있는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그는 고개를 약간 꺾어 시신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시신의 얼굴은 여전히 파리하니 무표정했다. 볼을 붙잡은 두 손으로 전해지는 체온은 계속해서 차가워져가기만 했다.
"죽은 자에게 집착하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군, 길가메쉬. 너답지 않다."
장신의 신부복을 입은 자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다가온 자는 시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마치 최고의 미주를 마시듯 그는 주변 상황을 음미하고 있었다. 길가메쉬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올려다보는 눈동자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기가 신부의 몸통을 뚫었을 뿐이었다. 그는 울컥 피를 토했다. 그러나 무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몇 차례 무기가 그의 몸을 뚫고 그는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길가메쉬는 다시 시선을 시신으로 돌렸다.
"키레..."
길가메쉬의 손길이 다시금 파리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보구의 비는 한동안 그칠 줄 몰랐다.
제목이 뭔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서번트 키레.
길가메쉬X키레
루비를 녹인 물이 완벽한 원을 형성했다. 두 겹으로 되어 그 사이에 룬어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안쪽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그려진,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마법진이었다. 토오사카 아유무는 일어서서 전체적으로 쓱 한 번 훑어본 후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캐스터를 그녀는 불러낼 참이었다. 평행세계를 오가는 스케일의 캐스터를. 그녀는 가보로 내려오던 아조트 검을 마법진 중앙에 올려놓았다. 얄쌍한 입술로 주문을 외자 마법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나오기 시작했다. 바람은 주문이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점점 속도가 늘었고 몸 속에 내재된 모든 마법회로들이 개방되어 거침없이 마력이 바람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토오사카는 계속해서 기어를 올렸다. 호리호리한 몸이 바람에 흔들릴 법도 한데 주문자는 꿈쩍도 않았다. 입술은 쉬지않고 주문을 외웠고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바람이 빛을 몰아내듯 어둠이 마법진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그런 어둠 속에서도 마법진은 불길한 붉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문이 막바지에 이르러 모여든 어둠이 완전해졌을 때 폭발하듯 어둠과 바람이 터져나왔다. 토오사카가 비틀거리며 몸의 중심을 잡고 있는 사이 바람이 다시 중앙으로 모여들며 마법진 위에 선 인물의 옷자락과 머리칼을 어지럽혔다. 아직 어둠이 남아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큰 키에,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쌌지만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는 탄탄한 몸을 보며 그녀는 감탄했다. 과연 완벽한 마법사란 심신을 모두 완벽하게 단련하는 것인가! 오로지 마법 기술에만 의존하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던 그녀에게 어둠 속의 인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묻겠다. 그대가 내 마스터인가?"
이 순간 토오사카 아유무는 승리를 확신했다. 전설적인 마법사의 전성시대와 조우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 했다. 어둠이 걷혀 위대한 마법사의 얼굴이 드러나자, 한 순간 그녀의 얼굴에 불안의 빛이 스쳤다. 그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긴 했지만, 상당히 동양적인 인상이었다. 혼혈인인 듯도 보였다.
"진명이 뭐지?"
토오사카는 대답 대신 소환된 서번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서번트는 심드렁한 얼굴로 평가하듯 그녀의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훑어보았다. 토오사카는 몸을 긴장시켰다. 죽은 듯 탁한 그의 눈동자가 향했을 때 그녀는 숨도 쉴 수 없었다. 무심하게 풀어내는 살기가 온 몸을 죄여왔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느껴본 적이 없던 압박감이었다. 그러나 곧 그의 시선이 아조트 검으로 향하고 그녀는 자신을 옥죄어오던 압박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정돈된 호흡을 내쉬려 애쓰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 남자의 입술이 완만한 호를 그리고 있었다.
"그래, 통성명을 해두는 게 서로에게 좋겠군."
그는 낮고 남자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토오사카는 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그가 말한 그의 진명은 토오사카 아유무를 경악케 하기 충분한 이름이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칼을 가진 어린 청년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고성의 서쪽 탑에서 그는 자신과 같은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한 여인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하얀 피부처럼 흰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게 치장된 붉은 벨벳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소 힘겨운 듯 비스듬히 앉아 불규칙적적인 호흡을 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하얀 속눈썹이나 창백한 입술은 마치 눈꽃이 그녀의 피부며 온몸에 달라붙어 그녀의 생기를 모조리 빼앗아가고 있는 듯 했다. 청년은 그녀의 모습이 보기가 괴로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율리안 C. 아인츠베른."
청년은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조심스레 그녀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가는 손가락을 들어 고개 숙인 청년의 머리칼을 찬찬히 헝클었다. 창밖으로 소리없이 북쪽의 눈발이 날렸다. 방에 비치된 벽난로에서 나오는 온기가 청년의 얼굴에 훅 끼쳤다. 하지만 방의 온기는 오로지 청년만의 것인 듯, 그녀의 얼굴은 흩날리는 눈발같은 얼어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년은 자신의 홍조를 그녀에게 나눠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누님..."
청년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성배의 그릇은 누님인데 저만 따뜻한 곳으로 가는 것은 안될 말입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갔다.
"누님도 같이 갈 수 있도록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크게 벌려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다시 불렀다.
"율리안, C. 아인츠베른"
청년은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거렸다. 주저하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그녀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 쪽으로 향했다. 손가락을 구부려 자켓과 셔츠를 후크처럼 걸어 당기자, 그의 하얀 목덜미 뒤로 붉은 흔적이 나타났다. 령주였다. 오른쪽 견갑골보다 약간 안으로 위쪽에 자리한 붉은 자국은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어떻게 보자면 방파제 같기도 했고 어찌 보자면 꽃무늬 같기도 했다.
"성배의 선택을 받은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그녀는 또렷하게 말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가서 싸워 성배를 쟁취하고 오세요. 그것이 당신이 아인츠베른의 이름을 이어받은 의미입니다."
그녀의 말에 청년은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곧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짓에 따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한 그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바닥에 깔린 동물의 모피를 밟고 소리없이 방을 걸어나왔다. 시중 드는 호문쿨루스가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키자, 그는 그녀를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눈 하나 깜짝 않는 호문쿨루스를 거기 두고 그는 복도를 걸었다. 발치에 걸리는 장식물을 걷어차고 거칠게 소리질렀다. 문 밖에서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던 호문쿨루스에게도 이런 식으로 뒤에서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아인츠베른의 인간들에게도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도 그저 소리없이 흩날리는 눈발에도 화가 치밀었다. 가슴에 쌓인 분노가 임계치를 향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곧 성배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분노를 풀 무대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율리안은 그때까지는 참아주기로 했다. 남은 것은 무대를 얼마나 즐기며 장악하느냐 뿐이었다.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소리없이 밟으며 걸었다. 그것은 마치 늑대의 걸음걸이 같았다.
윌리엄 그레이 아치볼트는 아버지에게서 냄비를 받았다. 냄비에는 수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치볼트는 냄비의 무게에 휘청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콧잔등에 간신히 걸터앉아 있던 뿔테 안경이 미끄러졌다. 아직 선이 가는 소년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이제 열 여섯이나 되었을까. 그는 아직 가는 팔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그리는 호의 중앙엔 거의 썩다시피 한 나무조각과 녹슨 은조각이 놓여 있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는 원을 찌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옆에선 아버지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하고 싶다만... "
아버지의 한숨 섞인 말에 원이 조금 찌그러졌다. 그는 아버지가 눈썹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마술각인을 모두 이양해버렸으니 이 집안은 이제 네가 책임져야만 한다."
아치볼트는 또다시 실수를 했다. 그는 재빨리 틀린 부분을 지워냈다. 손에 쥔 냄비는 어째선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 이식받은 마술각인이 몰입을 방해하고 있었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욕지기를 지껄였다.
케이네스 아치볼트는 아치볼트가의 종손이었다. 그리고 그는 4차 성배전쟁 때 자신에게 이어진 모든 마술각인을 끌어안고 죽어버렸다. 덕분에 아치볼트 가의 마술각인은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고, 그의 사촌이 갖고 있던 소량의 마술각인을 이어받은 육촌 조카가 아치볼트 가의 이름을 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당주가 되었고, 그 당주의 손자가 성배의 선택을 받게 된 것이다.
"네 어깨에 아치볼트 가의 재부흥이 달려있다."
아버지의 무거운 목소리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냄비의 무게만으로도 이미 그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윌리엄은 잠시 허리를 펴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무거워지는 수은으로 마법진을 계속 그렸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작업이 수 시간에 걸쳐 끝이 나고, 이상적인 형태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치볼트는 그제서야 무거웠던 냄비를 내려놓고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허리를 펴지 못 했기에 목구멍으로 공기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눈물이 비죽 나올 것 같았다.
"잘했다, 빌리. 주문은 다 외고 있겠지?"
"예, 예에...!"
"그럼 됐다. 빨리 주문을 외거라."
윌리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장 그의 자질을 평가받는 시간이 돌아왔다. 아버지가 준비해준 성유물을 매개로 아버지가 준비한 영령을 부를 준비는 이제 끝난 것이다. 영창 중간에 그가 혀를 깨물거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주문을 까먹는 일만 없으면 된다. 그는 한쪽 팔을 어깨높이로 들었다. 그의 아버지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마냥 새하얀 병실이었다. 세월의 때나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병실에 깡마른 소년이 누워 있었다. 움푹 꺼진 눈두덩이 아래로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와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가는 팔목과 손가락은 힘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창백한 안색에 하얀 환자복을 입고 흰 이불을 덮고 있는 방과 일체화된 소년. 그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이질적인 여자가 있었다. 오렌지색으로 염색하여 짧게 자른 머리, 반토막난 눈썹, 눈썹이며 귀며 코며 입술에 피어스를 주렁주렁 달고 검은 가죽 재킷에 가죽 핫팬츠를 입고 그 아래로는 찢어진 망사스타킹에 워커를 신은 여자였다.
그녀는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감회라고 해야할지 모를 피로와 닮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거대한 통유리를 더듬었다. 그것은 그저 차갑고 딱딱했다.
"웃기지 마."
그녀의 입술 한 쪽이 올라갔다. 한 손에 쥐고 있던 금속 클립보드가 구겨졌다. 꽂혀있는 종이와 클립보드가 마치 꽃의 모양처럼 될 때까지 그녀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시선을 내려 원래 종이에 적혀있던 '안락사 동의서'란 글씨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만족한 듯 클립보드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깡깡거리는 가볍게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그녀는 다시 시선을 소년에게로 돌렸다. 그녀의 마른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거기엔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죽지 않아."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년은 호흡을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여전히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죽이지 않아."
나직하게 읊조렸다. 소년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병실 앞에서 걸어 나갔다.
그녀가 내던지고 간 금속 클립이 형광등에 반짝였다. 참혹하게 우그러진 금속 사이로 종이 끄트머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곳에 적힌 날인은 '에미야 리츠'였다.
어둠의 내린 항구의 한 구석, 캐리어를 끌고 가는 한 여자가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굴러가는 캐리어에선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12cm 힐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걱정 마. 잘 할 수 있을 거라니까. 그런 걱정 하는 건 너 뿐이야."
그녀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짜증을 부렸다.
"내가 누구야.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있어. 이젠 가서 소환만 하면 돼. 성유물... 내가 그런 걸 구할 돈이 어디 있어? 재산은 오빠가 전부 가져갔다니까. ......... 괜찮아. 전략은 이미 다 짜놨어. 제대로 소환만 하면 돼. ............ 아니, 괜찮아. 내가 부를 수 있는 최선의 인선을 벌써 생각해놨어. 네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으니까 제발 걱정은 그만해. 끊어."
그녀는 귀에 꽂은 이어포드(ear pod)를 톡톡 두드렸다. 다시 정적을 되찾은 항구엔 스키니 진이 스치는 소리와 힐의 또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드문드문 설치된 조명 아래로 거침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은 46번 컨테이너 앞에서 멈췄다. 지문 인식 단말기에 손가락을 대자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풀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컨테이너 안은 텅 비어있었고, 오로지 마법진이 중앙에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캐리어를 끌어다 한쪽 구석에 놓고 주머니에서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꺼냈다. 날을 꺼내자 열려있는 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예리하게 빛이 났다. 사이즈는 작았지만 그 예리함만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마법진 앞으로 다가가 왼쪽 소매를 걷었다. 길고 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꽉 다문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얇아졌다. 그리고 나이프가 거침없이 왼쪽 팔뚝을 그었다. 선명한 붉은 피가 하얀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팔에 힘을 줬다. 피는 멈추지 않고 흘렀고, 그녀의 입술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닫아라(채워라), 닫아라(채워라), 닫아라(채워라), 닫아라(채워라), 닫아라(채워라), 되풀이 될 때마다 다섯 번. 그저 채워지는 각을 파각하라."
주문이 진행되며 마력회로가 대거 개방되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일 때면 마력의 소용돌이는 그 흐름을 더욱 격해져 그녀의 앞머리며 잔머리들을 거칠게 잡아 흔들어댔다. 왼팔에선 계속해서 피가 흘렀고 걷어낸 왼팔이나 그녀의 옷깃 사이로 마술각인이 빛나고 있었다.
"강림하는 바람에는 벽을. 사방의 문을 닫고, 왕관에서 나와 왕국에 이르는 삼차로는 순환하라!"
그녀의 목소리는 극적으로 변해갔고 주문은 절정을 맞이했다. 그리고 마력의 소용돌이가 물러났을 때, 그곳엔 진홍색 시스루 드레스를 몸에 두른 유달리 흰 피부의 여인이 서 있었다. 속이 비치는 드레스와는 대조적으로 선해보이는 큰 눈망울에 단정하게 올린 백금발은 묘하게 언밸런스한 느낌을 주었다.
"그대가 나의 마스터인가?"
붉고 작은 입술이 움직여 술사에게 물었다. 오싹할 정도의 미인인 그녀를 앞에 두고 술사는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나는 이성현. 당신의 마스터예요."
술사-성현은 손을 내밀었다. 서번트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마력으로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피ㅡ 처녀의 피로 성현은 의도하던 서번트를 의도하던 클래스로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에르제베트 바토리,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쇄살인마이자 마술사. 그리고 캐스터로서의 현계 강림.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 악수는 그 시작을 고하는 악수였다. 그리고 에르제베트는 군소리 없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병을 왼손으로 옮겨 그녀와의 악수에 응했다.
"마지막 서번트의 소환이 확인됐습니다."
묘하게 천진함을 띤 남자의 목소리가 사제실에 울렸다. 푸른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린 사내는 도색잡지를 펼쳐들었다. 귀에는 이어포드가 꽂혀 있었다.
"그런 말씀 하셔도 저는 일렉트로닉 브레인을 장치하지 않았으니까요. 교단에서 그렇게 냅두질 않았잖습니까. 제가 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있나요."
그는 도색잡지의 페이지를 넘겼다. 몇 살인지 모를 일본 아가씨들의 큰 가슴과 매끈한 엉덩이들이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마술협회에 제가 무슨 인맥이 있겠어요. 하루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었으니 제가 뭘 했으면 금방 알아챌 것을 무슨 짓을 하겠냐고요. 그냥 마술협회에선 전통 지키기를 좋아하나보죠. 핏줄이니 가문이니 하며 감독역으로 코토미네 가의 사람을 우겨대는 걸 보니 그런 모양이죠. 제가 출발할 때도 이 이야기를 했었고 똑같은 과정을 거쳐 똑같은 결과를 낼 거라 생각치 않으십니까?"
도색 잡지에 알 수 없는 경고문과 함께 "TOUCH!"라고 적힌 부분을 남자는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았다. 페이지 구석에서 3D 홀로그램이 튀어나와 남자와 여자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앙! 아! 아!"같은 일본 특유의 과장된 신음을 내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한 손으로 금발 고수머리를 쓸어넘겼다.
"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남자는 그 광경에 질린 듯 도색 잡지를 덮어 소파 바깥으로 내던졌다. 이어포드로 노성이 전해졌다. 남자는 심드렁한 얼굴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예, 예. 붙여주신 감시인은 잘 있어요. 목소리라도 들려드릴까요?"
그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검소한 신부복을 입고 목엔 묵주를 건 신부는 차분한 눈동자로 금발의 남자의 행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옙! 니콜라스 드 올텐시아, 임무 완수하겠습니다!"
그는 장난스레 경례 자세로 팔을 올려붙이며 과장된 톤으로 말했다. 하지만 곧 이어포드를 탁자에 내던지고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명백히 반감을 드러낸 얼굴로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렸다. 3인승 소파를 꽉 채우고도 모자라 몸을 웅크려 누운 그를 짙은 갈색 머리칼의 신부는 차분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도색잡지는 어디있지?"
금발의 신부는 아무렇게나 소파 바깥쪽을 가리켰다. 갈색 머리의 신부는 땅에 떨어진 도색잡지를 주워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넣었다.
"그 이야기는 왜 하지 않았지?"
갈색 머리 신부가 물었다.
"필요 없으니까."
금발의 신부가 답했다.
"주교님께는 다 보고해야 해."
"마음대로 해. 난 널 죽이고 도망칠테니까."
"네가? 날?"
갈색머리 신부는 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금발의 신부는 그를 잠시 돌아다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원래 자리로 돌렸다.
"잊고 있나본데, 계약한 건 나야. 영주라도 써서 널 죽이라고 명령하면 그만이라고."
금발의 신부가 손을 흔들흔들 흔들었다. 그의 손등엔 소용돌이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다른 신부의 눈에 혐오감이 깃들었다.
"세상을 위해 반드시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니키, 내가 널 죽일 수도 있다."
"어련하겠소. 잠이나 주무시지, 브랜."
브랜은 도색잡지를 휴지통에 쳐박고 니콜의 등을 발로 찼다. 니콜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가 침대를 향해 엉거주춤 걸어갔다. 그가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브랜은 책을 펴들고 소파에 앉았다. 침대 속에서 니콜이 박수를 세 번 치자 방 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