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저 블로그에 뭐 ~2 이렇게 적는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아니, 분명 건담 할 때는 이것저것 적긴 했지만, 그땐 너무 좋아서 초 하이텐션으로 거의 이성을 잃다시피 했었던 그런 나날들이었기 때문에 그랬었지만, 지금은 이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라 이게 좀 부끄럽기도 하네요. 그래도 일단은 한 번 올려봅니다.
요- 요요 앞에 어딘가에 1편이 있을 거예요. 앞부분이 약간 수정이 되었으니 앞부분까지 같이 올려볼까 생각은 했었지만, 지금 이게 끝이 난 것도 아니고 길이도 애매하게 길어서 부담스럽더라고요? 제 글은 아무래도 빽빽하고 엔터도 거의 없고 해서 가독성이 좀 떨어지는 편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문단마다 엔터를 집어넣고 대사 앞뒤로 엔터를 넣자니 그것도 제 스타일엔 참 안 맞더라고요. 무척 불친절한 타입입니다. 그래도 "엔터를 조금 넣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면 넣겠습니다! 그러니 보기 불편하시면 말씀해주세요.
토요일 오전, 머리 위로 무거운 구름이 턱을 걸친 날이었다. 키레는 안나의 집을 향해 뛰었다. 마음이 급했다. 소년이 발견한 거대한 할퀸 상처의 흔적은 아직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기억에도 없는 상처는 그를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날까지 그 상처를 어떻게든 메워야만 했다. 무엇으로, 무엇으로 메워야만 한단 말인가. 어쨌거나 그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야만 했다. 소년은 힘 닿는 데까지 뛰었다. 그의 조바심을 비웃듯 어디나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 그의 감각을 흩트렸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호흡을 정리하고 감각을 재정비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섰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목에 걸려있던 십자가 팬던트를 뒤에서 잡아당겼다.
"니콜!"
"너같은 게 무슨 로자리오야?!"
분명 그를 '애비 없는 자식' '불장난'이라 불렀던 그 니콜이었다. 니콜은 마구잡이로 팬던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키레의 목에 걸려있던 가는 금속 체인은 사정없이 그의 목과 턱에 붉은 줄을 그었고 어린 키레는 괴로워했다.
"난 다 알아! 이 후레자식! 악마의 자식아!"
"무슨 소리야!!"
키레는 악에 받쳐 소리치며 니콜의 얼굴을 할퀴었다. 니콜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로자리오는 가느다란 체인이 끊어져 땅에 떨어졌다. 키레와 니콜은 잠시 떨어져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로의 얼굴을 노려봤다. 니콜은 키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소매로 코를 훔쳤다. 커다랗고 파란 눈망울엔 수치심과 고집과 옅은 경멸이 섞여 있었다.
"평소엔 저런 거 하고 다니지도 않았으면서!"
저런 거란 땅에 떨어진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저거 너네 엄마 꺼지? 너네 엄마는 더러워! 아무한테나 다리 벌리는 창녀야!"
니콜은 소리쳤다.
"너도 그렇게 태어났잖아! 안 그래? 너네 아빠가 누군지 알 게 뭐야!"
"아냐!!"
키레도 소리쳤다.
"엄마는 10년이나 수절했어! 아빠만 기다렸다고 했어! 우리 아빠는 코토미네 리세야!"
그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소리쳤다. 키레는 니콜에게 덤벼들어 주먹을 날렸다. 키레보다 5cm는 더 큰 니콜은 덩칫값도 못 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어딘가에서 어른이 나와 말릴 때까지 싸움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입술 한 쪽이 부르터서 키레는 안나의 집에 도착했다. 한쪽 손엔 줄이 끊어진 로자리오가 들려 있었다. 안나는 남편의 눈치를 보며 집에서 나왔다.
"보름 전이나 일주일 전에?"
그녀는 되물었다. 키레는 그녀에게 자신이 보름 전과 열흘 전, 일주일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주로 했던 말이 '나쁜 짓을 했어요'와 '정말 나쁜 짓을 했어요'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녀는 잠시 더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신부님 이야기도 했고 너네 엄마 얘기도 했고..."
"신부님요?"
키레가 성급하게 물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내려다봤다.
"그 기억 굳이 찾아서 뭐 하게? 없어도 상관 없잖아."
"신부님이 뭐라고 했는데요?"
키레는 다시금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신부님은 다 알고 있었다고 했어. 하지만 야단치지 않았다고 했고."
안나의 말에 키레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설마 신부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 했다.
"그리고요?"
"엄마의 사과를 나눠먹었다는 이야기도 했지."
안나의 이야기에서 키레는 당최 전체적인 형태를 잡을 수 없었다.
"제가 다른 이야기는 안 했어요?"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탁한 눈으로 키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기다려보라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티슈 한 장과 루즈처럼 생긴 뭔가를 가져왔다. 티슈로 키레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루즈처럼 생긴 것을 돌려 그의 입가에 묻혔다. 찢어진 부분을 자극해서 아팠지만 키레는 참고 서 있었다. 그녀는 키레의 입가가 훨씬 멀쩡해 보이는 것을 보며 씩 웃었다.
"보이는 건 중요한 거야, 키레."
그녀는 컨실러를 돌려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키레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어쨌거나 자신을 위해 해준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안나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건 더 없을 것 같았다. 키레는 다시 성당을 향해 뛰었다.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니콜이 말했던 것처럼 오늘 떨어진 로자리오는 그가 원래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받은 기억도 없는 물건을 며칠간이나 자연스레 목에 걸고 있었다. 8일 전의 기억을 5일 전에 잃어버렸다. 교과서와 노트가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답을 신부님은 해줄 것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고해소에서 키레가 울었다고 했다. 키레는 뛰었다. 기대와 불안이 그의 발걸음을 위태할 정도로 가볍게 만들었다. 지독하게 좁고 경사진 골목길이 끝나고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정수리 위로 십자가가 매달린 첩탑 지붕도 나타났다. 그 답이 어떤 것이든 키레는 기억의 결락을 메울 수 있을 것이었다. 관광객들의 발길 사이를 뛰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자 사람들 사이로 신부가 보였다.
"신부님!"
키레는 뛰어갔다. 신부는 고개를 돌려 키레를 보았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그는 키레를 맞이했다.
"어서와라, 키레."
신부의 옆에는 신부복을 입은 또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때를 잘못 맞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는 말없이 서 있는 두 사람의 신부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살폈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건장한 몸을 하고 어딘지 모르게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동양인 신부가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키레라면, 이 아이가...?"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레는 어색함에 몸을 뒤로 뺐다. 원래 알고 지내던 신부가 그의 등을 팔로 받쳤다.
"인사하렴."
신부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키레에게 말했다. 하지만 키레는 그의 입가가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키레는 불안해졌다. 땀이 난 손을 바지에 비볐다. 동양인 신부는 계속해서 자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원래 있던 신부님은 망설이는 손길로 동양인 신부를 가리켰다.
"네 부친되시는 코토미네 리세 형제님이시다."
예정보다 이틀이나 당겨서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 사실이 키레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손이 자꾸만 바지춤으로 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신부에게서 만족스러운 대답은 커녕 물어보지도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돌아온 그는 소녀처럼 들뜬 어머니를 앞에 두고 전에없이 깨끗해진 소파에 앉아 둘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앞에 두고 지극히 냉정했고 어머니는 하고 싶었던 말을 두서없이 내뱉아댔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관심이 없고 어머니가 키레에게 관심이 없는 기묘한 상황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전에없이 화려하게 차려진 저녁 식탁 앞에서, 생부는 키레의 생모가 하는 말을 교묘히 미끄러뜨리며 "응" 내지는 "그렇군", "수고했소"같은 말을 했고, 키레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신부님의 아내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는 적당히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키레에게 머물러 있었고, 키레는 속이 거북했다. 키레는 생부가 때때로 걸어오는 말에 대답은 했지만, 기억이 사라진 것을 들킬 것 같아 긴 대화는 부러 피했다. 마치 기억이 없어진 것을 들키면 그때 했던 나쁜 짓도 같이 들통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아버지 앞에 완벽한 아들로 있고 싶었다. 숨막히는 어색한 공기는 자러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평소보다 늦게 들어온 키레는 불을 끄고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엎드려 잠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갈망이 채워짐과 동시에 무언가가 어깨에 잔뜩 매달렸다. 오한과도 비슷한 그 감각을 키레는 애써 무시했다.
아침에 일어나보자 어머니가 머리를 헝클고 네글리제만 입은 채 바깥에 나와 있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던 키레를 향해 "잘 잤니?"라고 말해줬다. 키레는 방으로 향하던 몸을 다시 돌렸다.
"아빠가 할일이 있다고 오늘 좀 늦게 돌아온다고 하더구나. 미사는 오늘은 둘이서만 가야겠다."
키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선지 셋이 같이 있는 게 키레는 불편했다. 그들은 적당히 준비를 마치고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에 리세의 모습은 없었다.
아버지가 왔든 그렇지 않았든 아마도 리세와 재회하게 된 것에 신에게 감사하고 싶은 심정인지, 어머니는 가장 앞 줄에 가 앉았다. 오늘만큼은 신 앞에 떳떳치 못한 느낌이 들어 키레는 뒷자리 구석으로 숨었다. 어머니는 그의 허벅지를 잡았지만, 몇 마디 하다가 그냥 보내줬다. 그녀는 면사포를 쓰고 미사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열렬히 기도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과장되어 보여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키레의 눈에도 그것은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야, 너네 엄마 왜 저러냐?"
뒤에 있던 안토니오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대략 18세 정도의 소년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우체부로 일하고 있었다. 키가 크지만 호리호리한 체격에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사람들에게 온갖 가쉽들을 떠벌리고 다니는 경박한 녀석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극적이고 나쁜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키레는 눈을 감고 그를 무시했다.
"너네 엄마 요즘 남자 만들었지?"
안토니오는 계속 말했다. 신부님이 들어오고 모두 일어서자 그 입을 잠시 다물었지만, 착석하기 무섭게 또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요새 편지 안 보내던데 그거 남자 생겨서 그런 거 아니냐, 응? 누구랑 붙어먹고 있는데?"
키레는 눈을 꾹 감고 그를 무시하려 애를 썼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제발 누구든 저녀석이 입을 다물게 해주길 바랐다.
"너네 엄마 사흘에 한 번은 편지 보냈거든? 우리 애 아빠를 빨리 돌려주세요. 하이구, 뭐 있어야 보내주든지. 그렇게 줄창 보내다가 벌써 2주째 안 보내고 있거든? 분명히 남자가 생긴 거거든. 야, 너 너네 엄마 빠구리 뜨는 거 봤냐? 듣기론 미켈 아저씨랑 바람 났다고 하긴 하더라만, 하긴 뭐, 너네 엄마는 벌써 염문 상대만 열이 넘었구만. 이제와서 새삼... 너하고 붙어먹지 않은 것만 해도 용치."
분노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떨리는 어깨를 억지로 붙잡았다. 미사 중에 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분했다. 저런 소릴 하는 녀석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녀석을 엉엉 울리고 싶었다. 거칠게 바닥에 쓰러뜨리고 옷을 벗기고 그 위에 올라타 녀석의 성기를 강제로 꺼내 만지는 거다. 녀석이 울면서 그만 하라고 사정해도 계속해서 끈질기게 만져서 성기의 모양이 변해 커지고 딱딱해지게 만드는 거다. 그래서 적당한 때가 오면 그걸 자신의 엉덩이에 넣고 흔들어주는 것이다. 상상 속에서 안토니오는 울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마치 손 안의 새처럼 퍼덕거렸다. 그에 상관없이 키레는 그의 성기를 범하고 또 범했다. 하얀 물이 나올 때까지. 안토니오가 축 처지면 키레는 만족스레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키스를 하며 "입을 함부로 놀린 벌이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키레는 욕지기가 일었다. 자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단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속에서 구토가 일어났다. 여러가지가 머릿속에서 한데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죽은 새, 안나, 안토니오를 쓰러뜨리는 자신, 미로같은 담벼락, 사료를 얻어먹는 치즈색 고양이, 박스 안에 담긴 사과,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니콜, 그리고 순수한 선의로 내미는 아이스크림.
그는 견디지 못하고 입을 막고 성당을 뛰쳐나갔다. 사람들은 웅성거렸지만 상관 없었다. 그는 정신없이 뛰었다. 뭔가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머니가 뒤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학교에 도착한 그는 운동장 구석의 흙을, 마치 홀린 듯 파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서 도착한 어머니가 그를 말렸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흙을 팠다. 작은 새의 시체가 나왔음에도 그는 계속 했다. 그도 어머니도 망연자실해졌다. 그 아래서 나온 건 치즈색 털의 고양이 시체였다.
키레는 목놓아 울었다. 그는 기억에 없는 자신이 고양이를 죽여 여기다 묻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의 노트에 쓰인 ---TO가 무엇인지 알았다. GATTO, 이탈리아어로 '고양이' 였다. 눈물이 끝없이 흘렀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끌어안고 허벅지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린 키레는 계속 울었다.
"어떻게 저런 품종도 없고 무게는 3키로나 나가는, 10살이나 먹은 늙어빠진 토끼를 보고 귀엽다고 할 수 있는 거지?!"
"히스테리 부리지 마시오, 케선생."
"하지만 말이오, 신부!"
"별 볼일 없는 체격과 각력을 가진 토끼를 포식자들이 왜 번번이놓치고 마는지 아시오? 생존을 위한 귀여움. 그것은 생물 본연에 각인된 저항할 수 없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포식자의 감각을 흩트러뜨리기 때문이라오."
코토미네 신부는 말했다. 눈이 유난히 큰 갈색 얼룩무늬 토끼를 안고 있던 아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맹수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의 토끼 사냥 성공률은 고작 1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과연 그것이 순발력 차이에 의한 것 뿐일까요? 이들은 천성적으로 귀여움을 타고 납니다. 보는 순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렇게 귀여운 녀석만은 먹고싶지 않다!'라고생각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그것이 이들의 생존 비밀인 것입니다. 아무리 종이 없는 집토끼라 한들 그 특성이 사라질 리 없는 것입니다."
아처의 말에 케이네스 엘멜로이 아치볼트 2세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눈은 토끼에게서 떼어낼 수 없었다.
이상, 90년대 초중반 번역소설투를 따라한 개드립이었습니다. 저는 재미있었어요, 저는...
와, 이런 제목으로 올리려니 제법 부끄럽네요 ㅎㅎㅎ
먼저 올렸던 것을 내리고 앞부분의 거식한 부분을 빼고 올려봅니다. 신부님 어릴 적 나옵니다. 별 재미는 없는데 어쨌거나 앞으로 한동안은 원고만 하고 있을 것 같아서 일단 쓴 곳까지 올려봅니다.
언덕길에 소년이 서 있었다. 성인 두 명이 나란히 걸으면 빠듯할 법한 좁은 언덕길은 양 옆에 성벽과 5미터 높이의 건물을 두고 소년을 위압하고 있었다. 길을 한가지 색으로 물들인 누런 벽돌은 풍화되어 갈비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벽에 묻은 모레를 훑으며 소년의 볼도 함께 긁었다. 소년은 개의치 않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개를 올리자 좁다란 하늘이 이어졌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소년은 마치 세상이 그곳만으로 고정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의 행동반경도 그랬다. 학교와 성당과 그의 집을 오가는 길만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 소년은 생전 웃는 법이 없었다. 길을 장식한 꽃이나 올리브의 향기도 그를 즐겁게 하지 못 했다. 그의 인생은 마치 이곳,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벽 안쪽에 고정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새삼스레 이 길에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본 것마저도 일종의 변덕에 가까운 것이었다.
"키레!"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불렀다. 화장을 진하게 한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마른 여자였다.
"안나."
소년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웃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소년은 익숙한 듯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어때?"
때가 묻은 식탁에 소년은 앉았다. 잔꽃무늬의 식탁보는 색이 바래있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싱크대에서 안나는 접시를 꺼내 음식을 담으며 소년에게 물었다. 하지만 소년은 창가로 비치는 햇볕에 감도는 먼지를 쳐다보며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때?"
안나는 다시 물으며 음식을 내밀었다. 소년은 그제야 스푼을 들며 대답했다.
"여전해요."
안나는 그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몫을 떠 식탁 앞에 앉아 손을 모았다. 소년 역시 재빨리 두 손을 모았다. 잠시간의 기도가 끝나고 소년은 안나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숟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안나 역시 자신의 몫을 입 안으로 넣었다.
"아얏."
음식을 씹으려던 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입가에 손가락을 댔다. 키레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살살 입 안 쪽으로 혓바닥을 굴리는 듯 하더니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키레는 물었다.
"아프지 않아요?"
그녀는 대답했다.
"괴롭지 않아. 좀 불편할 뿐이야."
둘은 다시 묵묵히 식사를 재개했다. 안나는 밥을 먹는 동안 키레에게 자기가 심은 꽃이 얼마나 완벽하게 자랐는지, 이번에 한 바느질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따위를 키레에게 자랑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좋을 것들을 일관성 없이 나열했다. 다림질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세계나 냉장고의 위대함 같은 것들에 키레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보름 전의 일을 기억할 수 없어요."
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열흘 전의 일도 기억할 수 없어요."
키레는 이어서 말했다. 그녀는 말했다.
"넌 날 기억하잖니."
"예."
"네 어머니도 기억하잖니."
"예."
"신부님도 기억하잖니."
"예."
"그럼 문제될 게 뭐가 있니?"
그녀가 말했다. 그래, 문제될 것은 없었다. 기억에 약간의 빈 공간이 생기는 것은 언제나 생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키레는 며칠씩이나 되는 날짜의 기억이 날아가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것에 신경쓰는 것이 이상한 것일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쪽은 안나였다. 사람들은 안나에 대해 '너무 맞아서 정신이 이상해졌다'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그녀는 조금 이상하긴 했다. 그녀에겐 친구가 없었고, 덕분에 키레는 이렇게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그녀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됐다.
"일주일 전 기억은 하니?"
안나가 물었다. 키레는 "안나가 했던 말은 기억해요."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은 "쓸데없는 생각과 감정을 잘라내면 어떤 일에도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였다. 그녀는 또한 '감성을 버리고 판단을 포기하면 어떤 일이든 버틸 수 있다'라고도 했다. 그녀는 해사하게 웃었다. 그때 잇몸 안쪽에서 피가 나고 있었던 것을 아마 그녀는 모르고 있었을 것이었다. 키레는 그때 그녀의 얼굴을 무척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도 어린 그에게 그 얼굴은 몹시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와 마찬가지인 얼굴로 웃으며 "그럼 됐네."라고 말했다. 키레는 그녀와 비슷하게나마 입꼬리를 올리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해가 성벽 너머 서쪽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움브리아 평원 쪽은 아직 해가 중천일테지만 여긴 이탈리아 대다수의 도시가 그렇듯이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고, 중세도시 특유의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덕분에 그림자는 너무 빠르게 도시 안으로 침투하여 여기저기에 드리워져 있었다. 소년은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언제나 그렇듯 엉망인 거실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벗어내던진 옷가지와 치우지 않은 그릇들과 위스키 병들이 거실을 꾸미고 있었다. 언제 치웠는지 모를 음식쓰레기 냄새에 술냄새까지 섞여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키레는 익숙한지 거실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고 가방 안에서 숙제거리를 꺼내 책상 앞에 앉았다. 그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상 앞에 앉아 숙제를 하는 정도였다.
어머니가 말하길 아버지가 신부님이라고 했다.
키레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코토미네 리세라고 하는 일본인의 이름이었다. 그는 아직 소년의 존재를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가 돌아오면 이 고생이 끝날 거라고 했다. 매일 주문처럼 되뇌였고, 소년은 속으로 그녀를 조소했다. 재산은 어머니의 수입만으로도 살림을 꾸려나가기는 충분할 것이다. 그녀는 식료품점을 운영하였는데, 남들보다 조금 더 벌고 있을 터였다. 다만 문제는 그녀는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받고 있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늘 편지를 썼고, 주말마다 성당에다가 편지를 가져다 날랐다. 그러다가 항상 '그런 사람은 없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니 이젠 직접 주소를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마치 주말에 복권을 하듯 편지를 쓰는 것이 그녀의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우울했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감당하지 못했고, 아들은 그런 그녀의 이중적인 태도(어느 때는 지나치게 사랑하고 어느 때는 지나치게 냉대하는)에 익숙해져 갔다. 소년은 어머니가 퇴근할 때까지 숙제를 하다가 어머니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나가서 그녀를 맞이하고, 그녀와 이야기를 몇 마디 하다가 쥐죽은 듯이 방에 들어가 있는 게 보통이었다. 소년에겐 읽을만한 책도 없었고 TV도 없었다. 거실은 소년의 공간이 아닌 어머니의 공간이었다. 거실에 비치된 TV는 어머니의 것이었고 소파도 탁자도 위스키도 어머니의 것이었다. 소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숙제를 끝내고나면 성서를 읽는 것이다. 닳고 닳도록 읽는 것이다. 소년은 이제 언제 어느 때 아버지를 만나더라도 대화를 할 자신이 있었다. 누가 누구의 아들인지, 누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소년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키레!!"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키레는 방에서 나갔다. 어머니였다. 시계를 보자 벌써 10시였다. 아마 누군가의 집에서 한 잔 걸치고 온 듯 했다. 그녀는 무릎을 구부려 키레를 끌어안고 등을 쓸었다. 소년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팡팡 치고 엉덩이를 팡팡 쳤다. 소년은 어색하게 서서 그녀가 하는대로 스킨쉽을 받아들였다. 진한 술냄새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겼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중앙으로 갔다.
"거실이 왜이렇게 어지러워?!"
그녀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짜증을 냈다. 그리고 찬장에서 새 술을 하나 꺼냈다. 소파 위에 대충 앉을 자리를 만든 다음 엉덩이를 걸치고 술을 잔에 따른다. 잔은 어제 그녀가 술을 마시던 잔이다. 그녀는 TV를 틀었다. 이제부터 소년은 필요 없는 존재였다. 소년은 발소리를 죽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아직 못 먹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성경책을 펼쳤다. 그는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다시 책을 덮었다. 차라리 이제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소년은 불을 끄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온전한 어둠 속에서도 그는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눈알을 굴리며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태양을 받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아름다운 색채를 바닥에 그리고 있었다. 오래된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아름다운 성당엔 케케묵은 의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성자가 잠들어 있었던가, 아니면 그저 성자의 이름을 따서 만든 성당일 뿐인가. 때가 되면 신부가 진자처럼 흔들며 걸었을 향의 잔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소년은 발걸음이 차갑게 울리는 성당 안을 걸어 고해소 안으로 들어갔다.
"닷새만입니다."
소년은 나무로 된 창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나무벽 너머 인자한 목소리가 말했다. 키레는 무릎 위로 손을 모았다. 가슴에 걸린 십자가는 잡지 않았다.
"오늘 학교에서 부끄러운 행위를 했습니다."
소년은 말을 하고 잠시 쉬었다. 건너편에서 당황한 듯 움직이는 기색이 났다. 소년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저께 뒤에서 아는 애가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불장난'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무시했습니다."
소년은 말했다. 그리고 곧,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하굣길에 다친 새를 보았습니다. 깃털은 하나도 빠지지 않았는데 땅에서 날개만 퍼덕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새를 주웠습니다. 새는 격렬하게 퍼덕이며 제 손을 빠져나가려고 했었지만 저는 놔주지 않았습니다. 새는 곧 힘이 다하여 죽었습니다. 새를 묻어주는데 제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소년은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오늘 제가 저를 놀린 아이를 울렸습니다. 그리고 학교 화장실에서 부끄러운 행위를 했습니다. 저는 저의 죄를 뉘우칩니다."
소년은 말을 마쳤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격자로 가려진 창문 너머에서 인자한 목소리가 그의 죄를 사하여주었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소년은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고 고해소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신자님?" 맞은 편에서 부르는 소리에도 소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곧
"보름 전부터 일주일 전까지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신부님."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던 고민을 말했다. 어쩌면 고해보다는 이쪽이 원래의 목적이었을지도 몰랐다. 신부는 그의 말에 적잖이 놀라는 것 같았다. 그는 한 번 성호를 긋고 소년에게 그때의 기억이 전혀 없는지 물었다. 소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기억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봤더니 곧바로 없어져 있었는지 물었다. 소년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기억은 분명 닷새 전까지만 해도 거기 존재하고 있었다. 정확히 뭐라고 생각했었는지는 몰라도 닷새 전, 그 때 있었던 일로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은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 고작 닷새 전의 일이었는데. 기억이 희미하고 둔탁했다. 그런 기억이 이어져 나흘 전의 아침부터는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일주일 전에 와서 울었던 것도 기억나지 않습니까?"
신부는 물었다. 전혀 기억이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지극히 드문 소년으로서는 더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신경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행동하다보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죠. 굳이 무리해서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소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단 한 톨의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이었다. 차라리 일기라도 적었다면. 그는 일기를 적지 않았다. 기록같은 것을 하기에 그의 인생에 적을만한 것이 너무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멘."
소년은 무릎을 펴고 고해소를 나섰다. 그때였다. 신부가 고해소의 문을 열고 나와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소년은 뒤돌아보았다. 신부는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쓰다듬는 손길은 소년의 머리에서 쉬이 떨어지지 못하고 그의 눈동자는 소년의 눈동자와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머니께 사과 고맙다고 전해드려라."
신부는 그의 머리를 헝클고는 예배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키레는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아무렇게나 긴 머리는 쉬이 정리되지 않았다.
성당 밖으로 나오자 다시금 햇살이 그의 눈을 찔렀다. 이곳의 건물들은 대체적으로 한 가지 색으로 지어져 있었지만, 이 근처만은 형형색색으로 단장되어 있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상가들이 즐비해 있었던 것이다. 아마 성당이 유명한 덕분이겠지. 그리고 그 중에 유독 작은 벽돌집에서 누군가가 소년을 불렀다.
"어이, 소년!"
퉁퉁한 팔이 소년을 향해 움직였다. 가까이 오라는 신호였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종종 인사를 건네오던 아저씨였다. 소년은 가까이로 갔다.
"이 동네에 다니던 고양이 못 봤냐? 팔뚝만한 크기에 치즈색 줄무늬 고양이였는데..."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는 한숨을 쉬며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콘에 얹어 소년에게 건넸다. 소년은 영문도 모르고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그는 가끔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주곤 했다.
"찾아오면 육포나 사료를 좀 주곤 했는데 요 며칠간 안 보이는구나. 시체라도 찾으면 말해다오."
아저씨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키레는 그의 그런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태도는 소년에게 어떤 울림을 만들었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소년도 이 남자가 그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고양이를 키우냐고 했더니 그렇진 않다고 대답하며 고양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가르릉거리며 남자의 손에 머리를 부볐고 남자는 기뻐했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작고 보잘것 없는 고양이를 위해 그는 일부러 필요도 없는 고양이용 사료를 사서 그릇에 부어줬다. 그것은 소년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켰었다. 일종의 분노와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남자가 자신에게 아이스크림을 주는 것은 신부처럼 그의 정수리를 쓰다듬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년은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스크림 받았으면 가라, 가."
그는 다시 손을 휘휘 바깥을 향해 저었다. 소년은 뒤로 돌았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가던 소년을 남자는 다시 불러세웠다.
"뭐든 열심히 해라. 그럼 사람들이 널 인정하게 될 거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무엇에 관해 그렇게 말을 한 것일까. 동양인 피가 섞인 것에 대해서? 아버지가 없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머니의 도덕관념을 의심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에 대해 말을 하고 있든, 그에게 소년은 길거리의 고양이와 동급이었다. 이 언덕을 내려가면 잊혀지는 그런 존재였다. 가끔 사람들끼리 모여서 어머니나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할 때면 잠깐씩 떠올리곤 하겠지. 소년은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똘똘 뭉쳐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언덕을 내려갔다. 안나의 집에서 늦은 점심이나 얻어먹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안나의 집에 남편이 와 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키레는 숙제를 펴들었다. 노트와 책을 펴고 자세를 잡았지만 더 진행하기는 힘들었다. 오늘은 아이스크림을 제외하곤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 언제나 저녁나절이면 배가 고파오긴 했지만 오늘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나가 소년에게 밥을 주는 것을 그녀의 남편에게 들켰다간 다음날 팔이라도 부러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녀와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다. 하루 배를 곯는 것과 한 달을 아픈 것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을 선택해야할지는 자명했다. 키레는 사과를 가져왔다. 냉장고는 가득 차 있었다. 다만 그 중에 반은 썩어있었다. 오이며 샐러리며 감자같은 것들이 들어있었지만, 야채는 썩었고 감자는 싹이 나 있었다. 먹으려면 그 안에서 먹을만한 것을 골라야 했는데 도저히 9살인 키레가 먹을 수 있을만한 것이 없었다. 결국 그래서 고른 것이 냉장고 바깥에 나와있던 사과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숙제로 시선을 돌렸다.
노트엔 오늘 검사를 맡은 부분에 선생님의 사인이 멋진 필체로 그려져 있었다. 소년은 사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매일 하던 것. 어쩌면 이것은 그의 일기라 봐도 무방할 것이었다. 소년은 노트를 앞으로 넘겼다. 대체적으로 노트는 나이에 비해 깨끗한 글씨로 빽빽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빽빽한 글씨가 끝나는 곳엔 어김없이 담임의 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 8일 전 날짜의 숙제가 덜 되어 있었다. 담임의 사인도 없었다. 몇 줄인가 쓰다 만 글씨와 공백. 그 페이지는 그것으로 끝나 반 이상이 비어있었다. 키레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계속해서 앞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10일 전의 숙제가 덜 되어 있었다. 금요일로부터 열흘 전, 숙제가 없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 적으려다 만 듯한 흔적이 몇 군데 있었고 곧바로 보름 전의 날짜가 나왔다. 중간중간 무언가를 적다가 지운 흔적이 있었다. 연필로 새까맣게 칠해진 그것들은 종이를 뒤집어 비춰봐도 뭐라고 적혀져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몇 개나 뒤집어 비춰보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TO로 끝난다는 것 정도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교과서를 들었다. 일주일 전에 배웠을 부분을 찾아보았다. 내용이 기억에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는 분명 학교에서 교과서를 펼쳤을 것이다. 국어, 수학, 사회, 음악, 과학, 미술... 그는 책가방에서 무작위로 교과서를 꺼내 들춰보았다. 수학 교과서와 과학 교과서에 무언가를 썼다가 지운 흔적이 있었다. 연필로 페이지 전체를 칠하려 했던 흔적도 있었다. 군데군데 뾰족한 연필 끝으로 찢어진 그 책들은 희미하게 구겨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국어와 사회 교과서는 군데군데 찢겨있었다. 보름 전, 그리고 그 뒤로 몇 번씩이나 그는 교과서를 찢어놨다.
그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울렁거리는 것이 끼니를 걸렀기 때문인지 생리적 혐오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방바닥 전체에 펼쳐놓은 노트며 교과서 중앙에서 키레는 널부러진 것들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키레!"
바깥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그녀가 돌아오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이상했다. 소년은 방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빠와 연락이 됐어!"
아빠? 누구 아빠? 소년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소년의 양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네 아빠! 코토미네 키레가 사흘 뒤면 온다고 연락이 왔단다! 이게 왠일이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소년을 끌어안고 소년의 등을 쓸었다. 소년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아버지와 조우하는 것은 안 된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를 만나는 건 보다 완전무결한 상태의 자신이 아니면 안 됐다. 소년은 혼란스러웠다. 그런 소년의 마음을 모르고 소년의 엄마는 마냥 들떠있었다.
"청소를 해야겠다, 키레! 그보다도 외식을 먼저 하는 게 나으려나. 일단은 거실 청소는 하고 나가자! 아직 해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해두는 거야!"
그녀의 눈이 마치 소녀처럼 빛났다. 키레는 극명한 온도차에 속이 거북해졌다. 결국 청소는 하는둥 마는둥 반쯤 치우다 만 채로 다음 날을 기약하고선 키레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나섰다. 접시는 다 비웠지만 키레는 그날 거하게 체했다.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기억을 찾아둬야만 한다.
잘 때까지 그 생각이 소년을 괴롭히고 있었다.
제가 어디를 쓰기 싫어했을지 단박에 보이는 뭐 그런...
퇴고도 없이 부끄럽습니다. 나중에 또 더 쓰면 올리겠습니다.
원래는 우연히 발견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방향을 많이 수정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말씀에 수정을 했다가 컷 연출은 소년만화지만 감성은 순정만화인 뭔가의 번데기같은 것이 나와버리는 바람에 ㅠㅠㅠㅠㅠㅠㅠㅠ
이건 뭐 어덯게 하지도 못하고, 근데 이렇게 연애를 소재로 하면 저는 순정만화밖에 안 나와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사실은 스토리 정리하는 시간(과 결혼식 방문과 친목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론 이틀만에 완성한 콘티를 한 번 올려봅니다. 사실 저도 이거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아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