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앙 하고 손바닥 전체로 배구공을 때리는 파열음과 공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배구화의 고무바닥이 마룻바닥과 마찰하는 소리, 선수들의 구호 소리, 가볍게 공을 올리는 소리, 그리고 또다시 손바닥으로 배구공을 때리는 소리와 배구공 튀는 소리가 천장이 높은 체육관 안 가득 울렸다.
“나이스! 다음!”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토스가 올라가자 덩치 큰 사내 녀석이 펄쩍 뛰어 팔을 휘두른다. 나풀거리던 공은 순식간에 힘이 실려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무게가 무색하게 바닥에 날카로운 충격을 가한다. 스파이크다. 방금 때린 녀석은 그걸로 만족한 것 같았지만 토스를 올린 쪽은 그다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을 먹은 듯 찝찌름한 표정을 짓더니 대기 자리로 넘어가려는 녀석을 부른다.
“킨다이치!”
“예?”
“잠깐만, 쿠니미, 네가 스파이크 연습 마지막이지?”
갑자기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예에...”
“그럼 쿠니미 뒤로 가서 서 줄래? 쿠니미 다음에 몇 번만 더 해보자. 괜찮지?”
남자, 그것도 운동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붙임성 좋은 말투로 말을 걸어온다. 3학년이니 1학년에겐 그냥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면 될 일이지만 그는 그런 화법은 쓰지 않는다.
“예... 그렇게 할게요.”
킨다이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뒤에 와서 섰다. 복 터진 녀석.
“다음, 쿠니미!”
“예!”
그의 손끝에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솟아오른다. 놀라울 정도로 나에게 맞춘 토스였다. 학기 초에 그가 발목을 삐는 바람에 연습을 같이 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내게 토스를 맞추는 데는 시간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기분 좋게 올라오는 토스, 중학교 때의 카게야마나 그의 공석을 겨우 메꾸던 야하바 선배의 토스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나의 차례가 넘어가고 킨다이치가 다시 네트 앞에 섰다. 그가 토스를 올렸다. 평소 킨다이치의 타점보다 높은 공이었다. 당연히 킨다이치는 헛손질을 했고 공은 허무한 포물선을 그리며 킨다이치의 옆으로 날아갔다. 킨다이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안돼, 킨다이치. 무릎 더 굽혀야지. 발바닥만으로 뛰지 마. 엄지발가락까지 써봐. 자, 다시!”
그가 웃으며 말했다. 킨다이치의 얼굴은 반대로 진지해졌다. 킨다이치가 다시 뛰어올랐다. 이번엔 공이 손바닥에 확실히 닿아 기분 좋은 파열음을 내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모두의 시선이 킨다이치와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 좀 낮았네. 다시 해보자.”
이번엔 조금 더 높은 공이 올라왔다. 킨다이치는 그 높이에 잠시 긴장하는 것 같더니 공에 닿기 위해 최선을 다해 뛰었다. 몸이 탄력적으로 튀어 올랐고 공을 치는 파열음이 울렸다. 정확한 높이였다. 그는 씩 웃고는 킨다이치의 등을 툭툭 쳤다.
“잘했어. 앞으로도 키가 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자자, 수업 늦겠다! 이제 그만 스트레칭!”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박수를 치며 모두에게 아침 연습 종료를 알렸다. 하지만 부원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킨다이치와 연습한 지 얼마나 됐을까? 감독이나 코치진도 알지 못했던 킨다이치의 최고 타점이었다.
“오이카와 선배, 제가 토스 올릴까요? 선배도 한 번 치시죠.”
와타리 선배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어깨를 풀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한 번 쳐 볼까? 각자 토스와 스파이크의 위치로 갔다.
그의 다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침 햇살에 눈동자가 빛나는 듯도 했다. 그의 긴 다리가 태세를 갖추었다.
와타리 선배의 공이 올라오고 끼긱 하는 마찰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가 “날았다.”
마치 공중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깨끗한 폼, 오로지 공을 향한 순수한 눈동자,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긴 팔. 나는 그의 등에서 날개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 그는 마치 한 마리 새 같았다.
강렬한 파열음이 나고 공이 튕겨올랐다. 코스는 코트 오른쪽 아슬아슬하게 안쪽이었다. 그는 신장에 어울리지 않게 사뿐히 착지했다. 누구보다도 강렬한 한 방이었다.
“이야, 미안! 본의 아니게 스파이커들 기를 죽여 버렸네!”
마지막 한 마디만 없었다면 완벽했을 터였다.
아침 훈련을 끝내고 1학년 교실로 돌아가는 중 킨다이치는 몇 번이나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몇 번인가 점프를 하기도 했다. 그래, 그에게 관심을 받으면 대개는 이렇게 된다. 그가 특별히 유난히 구는 것은 아니었다. 나였어도 저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킨다이치는 그의 시선을 끈 것이다. 복 터진 녀석.
‘그’와는 중학교 때도 1년간 같은 팀에서 뛴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난 그에게 별다른 감흥을 받거나 하진 못했었다. 그때 나는 레귤러로 발탁되지 못 했고, 덕분에 연습은 대부분 카게야마, 킨다이치와 함께했었다. 그때 난 카게야마의 재능과 열정에 놀랐고, 그럼에도 3학년에게 이길 수 없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중학시절 그는 인터하이 직전까지 왠지 모르게 조급해하고 필사적이었다. 1학년 따위와 말을 섞을 여유 따윈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겨우 여유가 생겼을 때는 밉살맞은 레귤러 3학년이었을 뿐이었다. 구름 너머의 존재, 중학 시절 절대적이었던 2년의 나이차. 그래서 어디까지나 벽 너머의 사람을 보듯 그렇게 관망했었다.
‘그러고 보니 카게야마는 1학년 주제에 저돌적으로 들러붙었지. 눈치 없는 녀석.’
서브를 가르쳐달라며 그를 끈질기게 쫓아다녔던 카게야마를 생각하자 위가 따끔거려왔다. 지금 카게야마의 서브는 중3 때의 그와 똑같았다. 중학시절, 카게야마는 커다란 눈을 번득이며 그의 모습을 남김없이 그 머릿속에 담았을 것이다. 만난 시기는 같았지만 기억의 출발점이 달랐다.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나는 책상을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후 수업이 되자 책상에 앉은 애들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늦봄의 뜨끈한 햇살이 교실을 졸음의 세계로 인도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로 눈꺼풀도 고개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감도는 먼지마저도 최면을 거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선생은 꿋꿋하게 칠판에 필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헤이케 가에 불만을 품은 호족들을 수습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봉기했죠. 미나모토 요시츠네도 곧바로 거기 합류합니다.”
오늘은 졸지 않기 위해 나는 필기 옆에 조그만 낙서를 시작했다. 배구공, 아니, 농구공? 스파이크 하는 모습을 그리려고 했지만 완성된 모습은 영락없이 어설픈 리바운드를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눈을 감으면 등번호 1번이 멋지게 스파이크를 치는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걸 종이 위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유니폼의 1 옆에 2를 더 적었다. 12번, 내 번호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엔 좀 더 잘 그리기로 다짐하며 토스하는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도 그리지 못하고 나는 낙서를 때려치울 수밖에 없었다.
“에... 이치노타니 전투, 야시마 전투 등에서의 승리를 거뒀지만, 요시츠네는 형인 요리토모에게 숙청당합니다. 이때 무사시보 벤케이가 요시츠네를 지키기 위해 화살방패가 됐던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겠죠.”
지루하게 선생의 목소리가 흘렀다. 나는 수업에 집중하려 했지만 또 생각이 멋대로 튄다. “믿고 있어.” 평소와 달리 진중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가장 믿고 있는 건 누구일까? 어쨌거나 나는 아닐 게 분명했다.
갑자기 앞자리 녀석의 의자를 걷어차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대신 나는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불만을 벤케이에게 쏟았다. 어쩌라고? 역사 속에서 유행했던 남색 이야기의 일면을 영웅담으로 미화해서 구전한 거 아냐? 주군에 대한 복종을 세뇌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유행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가식적인 것임엔 변함이 없었다. 화살방패가 되어 남의 목숨을 지켜준다니, 말이 돼? 전쟁만큼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전우애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는 ‘스포츠’라는 것을 하고 있지만 목숨을 바칠 만큼 장절한 애정이나 존경심 같은 건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감정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따져보면 더욱 그렇다. 애당초 벤케이는 요시츠네에게 아내를 잃었다. 그 증오는 전부 어디로 간 것일까? 어쩌다 그렇게 된 걸까?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촌놈이었던 벤케이를 세상으로 끌어낸 것도 요시츠네였죠...”
선생이 대신 대답을 선사해줬다. 그 대답은 내 사고를 회의와 의문에서 수긍과 납득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어주었다.
그랬다. 요시츠네는 벤케이를 알아준 것이다. 벤케이에게 그는 아마 자신을 알아준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거창한 감정으로 전이된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적당히 하는 거 안 들키도록 해. 미조구치한테 걸리면 큰일 난다?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연습 시합에서 미끼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았던 것을 들켰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그 말이 너무 의외였기 때문에 난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냉철, 침착, 효율적인 게 쿠니미의 무기니까. 대신 다들 지치는 종반엔 그만큼 열심히 뛰어줘야 해.
여태까지 별 의미 없이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들은 대충 넘겨왔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에 체력을 소모하는 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면 일찍 지친다. 일찍 지친 팀이 일찍 진다. 누구나가 카게야마처럼 괴물 같은 체력을 타고나지 않는다. 지쳐서 이길 수 있는 팀에게 지고 싶진 않았다. 이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다. 지도자나 주장, 세터는 누구나가 ‘읽히더라도, 안 되더라도 기백으로 최선을 다해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따위를 요구해왔다. 솔직히 나에게 그런 기백도 체력도 없었다. 나는 주전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런 나를 처음으로 이해해준 사람이었다. 모두가 내게 단점이라고 말해왔던 것을 장점이라고 말해줬다. 그것을 칭찬해주고 인정해줬다. 실제 연습시합 때도종반이 되면 내게 토스를 몰아줬다. 인정받는 기쁨이란 것은 여태까지 막연히 생각해왔던 것보다도 훨씬 컸다. 덕분에 나는 여태까지 해왔던 것이 배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구는 여섯 명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가 내게 가르쳐줬다. 중학교 때까지 해왔던 건 단순히 여섯 명이 혼자서 하는 공놀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제야 내가 외로웠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모두 그의 덕분이었다.
만약 내가 벤케이고 그가 요시츠네였다면 나는 그를 목숨을 버려가며 지킬 수 있었을까? 나는 아마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가 다른 이의 화살에 죽기 전에 내 손에 그를 틀어쥐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온기와 생명력이 손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함께했겠지.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가 날 이해해줄 테니까.
나는 아침의 새처럼 날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째 네 여친이 연습 기다려주는 꼴을 한 번도 못 보냐?”
오후 연습 중 잠시 쉬는 시간을 틈타 이와이즈미 선배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물을 마시다 말고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야, 오후 연습은 길잖아. 기다리는 게 이상하잖아?”
그의 반박에 이와이즈미 선배는 체육관 2층의 스탠드를 가리켰다. 거기엔 몇 명인가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창밖은 벌써 해가 져 어둑어둑했다. 제법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들은, 난간에 기대서라곤 해도, 용케 연습 시작 때부터 지금까지 서 있었다. 언젠가 3학년 선배 중 하나가 “우리학교 체육관 난간이 쓰러져 2층에서 누군가 떨어진다면 그건 오이카와 네 책임”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나마키 선배였던가?
“저기 갸륵하게도 너만 보며 꺅꺅대는 애들이 있는데 왜 하필 그런 박정한 애랑 사귀냐? 별로 걔 좋아해서 사귄 것도 아니잖아.”
“으음, 이와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진 않은데...”
아마 그는 이와이즈미 선배가 자신과 오랫동안 친구인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 늘 자기 자랑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치곤 묘한 자기평가였다.
“저기 왼쪽부터 네 명은 날 좋아하기보단 쟤네들끼리 내 이야기를 하고 노는 게 좋은 거고, 그 다음 애랑 제일 오른 쪽 애는 내 얼굴과 이름밖에 몰라.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애는...”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저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그 모습에 여자애들은 비명을 질러대며 좋아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
“쟨 너무 무거워.”
그가 말하며 일어났다. 체중이나 덩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화사한 얼굴이나 차림새로 봐선 분위기나 성격의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감정의 무게를 말하는 것 같았다.
“뭘 다 아는 것처럼 그러냐?”
이와이즈미 선배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괜한 걸 물어봤나 하는 후회가 묻어나고 있었다.
“후후후, 이와랑 달리 이 오이카와 씨는 통찰력이란 게 있거든요.”
“뭐 인마?”
“그건 물론 이와랑 달리 태생적으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기 때문에 생긴 능력이지!”
이와이즈미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와이즈미 선배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려 했고 나는 순간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만! 이제 휴식 끝! 이제 다시 연습 시작!”
감독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이와이즈미 선배도 오이카와 선배도 여기저기 산개해 있던 녀석들도 포지션대로 모여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나는 스파이크 순서를 기다리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에서 재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한 번 ‘난 어차피 남자의 적이니 굳이 동성에게 사랑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잖아?’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인상적이었다. 워낙 붙임성 있는 말투로 이야기를 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통찰력이 좋았다. 주변을 끊임없이 살폈고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마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곧잘 냉정한 판단을 내리면서도 그 자신이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동성에게 그의 표정이, 그의 몸짓이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자각이 없었다. 저렇게 공을 띄우고, 몸을 낮추고, 성큼성큼 다가가 훌쩍 날아올라 공을 치면, 저것 봐, 킨다이치가 돌아본다. 야하바 선배도 와타리 선배도, 모두가 그를 돌아본다. 그러면 그는 헤실헤실 웃으며, 마치 새가 이리 앉았다 저리 앉았다 하듯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건다.
그러면 난 그의 둥지가 어디인지 생각해본다. 일견 이와이즈미 선배인가도 싶지만, 그건 아니다. 여자 친구는 더욱 아니다. 그가 내게 의지해준다면 좋겠지만, 그가 날 둥지로 삼지 않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왜냐면, 여태까지 친해지고 아니고 신뢰관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내 시선을 눈치 채지 못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는 데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연습이 끝나자 거리는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교무실에 체육관 열쇠를 걸어놓고 나오자 시간이 이미 늦어서인지 강당에도 운동장에도 이미 아무도 없었다.
약간 썰렁함을 안고 운동장을 건너가자 교문에서 그가 서 있었다. 혹시 날 기다렸을까?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아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쿠니미, 오늘은 집에 같이 가자.”
특유의 붙임성 좋은 말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봤자 세 블록 다음엔 반대방향이잖아요.”
설렘을 진정시킬 수 없어 오히려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그는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미소였지만, 어쨌거나 좋았다. 그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기회는 지극히 드물었다.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와 나란히 하굣길을 걸었다.
도로변에 차가 드문드문 곁을 지나갔다. 그는 횡단보도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 없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파란불이었던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조금 숨이 막혔다. 멈춰서는 순간 손등이 스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 그랬다. 이제 동복을 입기엔 날이 많이 따뜻해졌는지 얼굴로 열이 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기도 해서 말없이 손가락으로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가는 게 싫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을 정도였다.
함께 가는 길은 여기서 길을 건너 골목으로 들어간 후 두 블록을 더 걸으면 애완동물전문 숍이 나온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쿠니미.”
그가 나를 불렀다. 나는 긴장했는지 대답이 조금 늦었다.
“예?”
그는 신호등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콧날이 날카롭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니 잘생긴 얼굴은 그렇게 땀을 흘렸는데도 여전하다.
“나한테 뭐 신경 쓰이는 일 있어?”
그가 물어왔다. 나는 순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떤 걸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떠보는 것인지, 오늘 내가 뭔가 잘못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내게 ‘부담스러우니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찔리는 게 너무 많아서 “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는 내 얼굴을 똑바로 봤다.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었다. 그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나도 그를 따라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조금 더 걸은 다음 오른쪽으로 꺾이는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그렇게 밝은 대로에서 이어지는 길인데도 이상하리만치 어두워 마치 터널 안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 날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보면 아무리 나라도 신경 쓰인단 말이지.”
그가 말했다. 왠지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괜히 손끝이 찌릿찌릿해져 오는 것이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새가 내 손등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잡으면 잡힐 것처럼. 어둠 속에서 가로등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 이유도 모른 채 조바심이 났다.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요?”
내가 물었다.
그로서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단어를 조금 고르는 것 같았다.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 벌써 골목의 끄트머리, 애완동물 숍이 보이고 있었다.
“토비오 같은 눈으로 보고 있달까.”
그의 대답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도 나를 따라 멈췄다. 그 한 마디에 머리로 피가 몰렸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애완동물 숍의 새장에서 새가 울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골목은 어두웠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고 집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듯했다. 골목엔 우리 둘밖에 없었다. 난 지금 새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가 둥지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비틀고 새가 발버둥을 멈추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를 틀어쥐고 독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목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그는 온전히 자신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나머지 손 하나가 그의 재킷 칼라를 잡았다. 마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눈이 날 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한 얼굴이었다.
나는 손에서 힘을 뺐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는 나보다 덩치도 힘도 좋았다. 내가 그를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그는 그저 잠시 내 손등에 앉아 내게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는 힘이 빠진 내 손을 잡았다.
“나한테 뭐 신경 쓰이는 일 있어?”
그가 다시 물었다.
“아뇨, 오이카와 선배...”
나는 대답했다.
“아뇨...”
나는 고개를 숙였다. 점점 어깨가 가라앉는 것을 그가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자, 쿠니미.”
그가 손을 내밀었다. 화해의 의미일까 이끌어 주겠다는 의미일까. 어느 쪽이었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골목 끝에서 손을 놓았다. 그는 웃으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발걸음은 학교를 나올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나는 골목 끝에서 멀어져가는 그의 등을 바라봤다.
나는 라만 알 아하브. 아하브 대사의 둘째 아들로, 병사다. 네 살 때부터 붓을 잡았고 3년 전부터 돈을 받고 그림을 팔았으며 언제나 그림을 칭찬받았지만, 병사다.
사막의 달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단단하던 땅은 어느 새 기질이 바뀌어 푹푹 발바닥을 끌어들였다. 차가운 공기에 입김이 맴돌고 몸이 으슬거렸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구름마저도 없었다. 벌레 소리조차도 없었고, 오로지 나 혼자만이 있었다. 들리는 소리는 오직 모래 사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고독이 시리게 사무쳤다.
어쩌다가 나는 이곳에 온 것일까.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이젠 속이 쓰리다 못해 무감각해졌다. 이따금씩 피를 토해내라고 채근하듯 조여대는 감각이 돌아올 뿐이었다. 배고픔에 번득이던 머리도 이제는 갈증으로 둔중해졌다. 더 걸을까. 더 걷든 그렇지 않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차라리 드러누워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낮에 태양을 받은 모래가 한밤의 차가운 공기보다는 따뜻할 것이었다. 바닥에 누워 아래로 아래로 침전하면 오히려 따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모래가 발목을 잡아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힘들었다. 겨우 몸을 뒤집자 별이 쏟아졌다.
왜 나는 이곳에 있는 걸까.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걸까. “정신 차리고 앞을 똑바로 봐라!”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형이 죽었으니 네가 너의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왜 아직도 그걸 모르느냐?! 넌 언제까지 그렇게 한심하게 살 거냐? 내가 천년만년 너의 뒤를 봐줄 거라 생각하느냐?” 아버지의 풍성하고 흰 수염이 말을 할 때마다 움직였다. 짙고 어두운 갈색 옷감에 석양 색의 문양을 수놓은 옷이 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지금 이대로 내가 늙어 더 일할 수 없게 됐을 때 네가 네 어미, 네 아내, 네 동생과 제부를 돌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아버지가 말했다. “그게 전쟁터에 나가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그림은 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소리쳤다. 아버지는 물건을 집어던졌다. 동생이 인도에서 가져온 연꽃과 코끼리가 새겨진 목제 필통이 깨졌다. 내가 무척 좋아하던 것이라 아버지와 반목하던 것만큼이나 그것이 애석했다.
전쟁터에 갔던 형이 죽었다. 형도 아버지만큼이나 책임감이 강한 인종이었다. “가족을 위해서”란 말이 언제나 입에 붙어 있었다. 그렇지 않을 땐 “형제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전쟁터에 갈 땐 “가족과 형제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이거나 그거나. 그 말을 들을 때면 항상 그런 생각을 했었다.
형은 전쟁에서 도망치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친분이 있는 연장자에 전쟁의 경험이 있는 알 샤마드와 함께 하겠다며 그의 군대에 합류했다. 형은 몇 차례 전투를 훌륭히 수행해냈고, 아버지는 형을 자랑스러워했다. 그 동안은 좋았다. 나는 형이 잘 해주는 만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누군가에겐 돈을 받고 그림을 그려줬고, 돈이 없다고 하는 누군가의 집 벽면엔 그냥 그림을 그려줬다. 문양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람들도 좋아했고 나도 좋았다. 하지만 형이 그런 식으로 죽어버렸다.
집안은 죽음의 슬픔으로 가득 찼고, 심지어 우리 집 개조차도 고개를 낮게 두고 소리를 삼갔다. 아버지는 며칠이나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눈물로 히잡을 적셨다. 동생조차도 충격으로 입을 거의 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림조차도 그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방 밖으로 나왔다. 다시 출근을 했고 돌아와서 내게 형 대신 전쟁터에 가라고 했다. 나는 사람은 죽일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와 나의 갈등이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힘들겠다.”
아버지와 말싸움을 하고 나오는데 정원에서 동생이 말을 걸었다. 언제나 날 싫어하고 피하던 아이였기 때문에 상당히 놀랐었다.
“불효하는 것도 힘들지 않아? 가는 게 맞지 않겠어?”
동생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마 눈을 휘둥그레 떴을 것이다. 잠시 동안 말을 잊은 채 충격으로 멀거니 서 있었다. 동생은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우린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정원의 작은 물줄기 흐르는 소리만이 반증이 되어 주었다.
“무슨... 소리야?”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동생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서 일하지 않는 남자는 형님뿐이야. 아버지도 나도 돈을 벌고 있어. 하지만 형님은 쓰기 바쁘지.”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코발트를 뭉개어 쓰고 금가루를 치덕치덕 바르고 몇 푼을 벌어오지. 그나마도 상대가 돈이 없다고 하면 무료로 그려주고. 그나마 돈이 좀 되는 것들은 모두 아버지를 보고 돈을 내는 것들이지 형의 실력이 대단해서가 아니야. 형이 여태까지 쓴 재료값을 생각해보면 그 돈도 턱도 없지. 하루 종일 안료를 쓰고 또 쓰고, 쓰고 또 쓰는데 무슨 돈이 남겠어?”
“내가 그림을 그려서 얼마나 벌었는지 알아?!”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형에게 일이 생길까?”
동생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것은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일을 감당하지 못해 손목이 고장 날 때까지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들개처럼 굶어 죽을 수도 있다. 혹은 행상을 다니는 동생에게 얹혀 재산이나 축내는 못난 형이 될 수도 있겠지. 일을 맡긴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아버지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것으로 이별의 인사말을 대신했다. 그들은 내게 무엇을 원해서 일을 맡겼던 것일까?
“가족이 없으면 형도 없어.”
동생이 차갑게 말했다. 나는 낙담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죄어왔다.
“가. 가서 장남의 의무를 다하고 와.”
동생의 말이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난, 죽을지도 몰라...”
“그럼 죽기 전에 죽여.”
동생의 말이 목덜미에 박혔다.
“쉽게 말하는구나...”
내 중얼거림에 동생은 잠시 숨을 멈췄다.
“내가 몇 명이나 죽였을 거라 생각해?”
동생이 말했다. 이번엔 내가 숨을 멈췄다.
“전쟁 중이라 행상을 끌고 가는 길엔 패잔병이며 전쟁으로 인해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종종 있어. 그들은 쉽게 도둑패들이 되지. 나는 그런 도둑패들과 몇 번이고 전투를 했어.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사람을 많이 죽였을 거야. 어떻게 생각해?”
그 말을 하는 동생은 침착했다. 나는 충격으로 눈물이 왈칵 났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열이 났다.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어깨며 목구멍으로 치미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세상이 조각나는 것 같았다. 깨진 거울처럼 조각난 우리 집 정원에서 동생의 검은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때서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여태까지 나 혼자만이 완전한 세상에 있었고, 그런 듯이 굴었던 것이다. 나는 동생이 나를 얼마나 미워했을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별이 보이는 숫자만큼 추웠다. 바닥의 모래들은 기대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달빛처럼 고요한 추위가 나를 죽이고 있었다.
문득 사라진 사람들이 생각났다. 밤이면 타닥타닥 타들어가던 모닥불 옆에서 화살촉을 손질하던 사내도, 건너의 건너 막사에서 저녁을 먹고 흥이 오르면 노래를 부르던 뚱뚱한 사내도, 이유 없이 욕을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사내도 갑자기 사라졌다. 나도 사라질 뻔했었다. 불운이었는지 다행이었는지 살아남는 대신 누군가를 죽였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이국의 갑옷을 입은 머리색과 눈 색이 옅은 남자를 기억해냈다. 막연히 그에게 칼을 꽂을 때의 감각과 그가 자신에게 토해냈던 피의 온도를 기억해냈다. 뜨겁고 비릿하고 미끌미끌했던 그의 생명이었다.
나는 그의 생명과 나의 생명을 저울로 달아보았다. 그의 생명을 대가로 고작 나흘을 더 살았다. 이렇게 먼지 같은 생명인데 그것을 위해 누군가를 죽였다.
파리하게 갈라진 입술로 눈물이 닿아 따가웠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더 둥글게 말아 안았다. 긴장, 두려움, 구토, 발열, 혼란, 오열, 기도, 그리고 기도... 마음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싶어 울었고, 기도는 붓 끝에서, 막대 끝에서 형태를 갖추었다. 물감을 붓에 묻힐 때마다 절을 했고 획을 그을 때마다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내 깃털 같은 염원은 병사들의 야만의 발자국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나는 무력했다. 누군가가 또 죽었고, 누군가를 죽였다. 이 이상은 없을 야만의 현장에서. 그에 비하자면 여기는 얼마나 고요하고 또 고독한가.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건 오히려 괜찮은 죽음이었다.
바람이 또 사락거렸다. 사막으로 하얀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이젠 정말로 죽음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리 위로 정적이 내려앉고 있었다.
눈을 뜨자 화롯불이 보였다. 사물들이 어른거리고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움직여보자 의외로 간단히 스르륵 하고 미끄러졌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뜨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마침 눈을 뜨셨군요. 이 차를 드시면 몸이 많이 따뜻해질 겁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내게 찻잔을 내밀었다. 나는 멍한 정신에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초점이 맞을 때까지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내가 먹일 테니 이제 나가도 돼.”
뒤통수가 동그란, 목이 다소 긴 남자가 딱딱한 어투로 말을 하자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남은 남자는 말없이 서 있었다. 멍하니 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날 보지 않았다. 나는 그의 등을 계속 바라보았다.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하지만 이젠 제법 청년 티가 나는 등이었다.
“자밀.”
그를 부르자 그가 대답을 해왔다.
“왜 부르십니까, 형님.”
여전히 시선은 주지 않은 채 노골적으로 빈정대고 있었다. 억누른 목소리엔 분노가 담겨 있었다. 희미하게 참담한 마음과 짜증이 함께 밀려들었다. 그는 아마 나의 나약함에 화내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다가 구출된 것일까? 왜 하필 그에게 구출된 것일까? 차라리 그때 죽게 내버려뒀으면 좋았을 것을.
불러놓고 말이 없자 동생이 먼저 나를 곁눈질로 힐끔 보고선 찻잔을 가리켰다.
“드시죠.”
예의바르지만 고압적인 말투였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디야?”
나의 물음에 그가 몸을 홱 돌려 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화가 나 있었다. 평소에는 조소하듯 차갑게 내려앉은 검은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그는 언성을 높였다. 아직 조금 덜 여문 목소리가 뒤집혔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대체 어떻게 된 일로 왜 거기에 있었는지, 자기가 뭘 하는 지나 알고 거기 자빠져 있었는지!!”
그는 일갈하곤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불규칙적인 박자로 서성거렸다.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가 멈춰서 눈두덩을 눌렀다가 머리를 다시 쥐어뜯으며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얼굴을 쓸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했다. 아직 어린 티가 남은 아몬드 모양의 눈을 찌푸렸다가 깜박거렸다가 했다. 동생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저 멀거니 그의 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형은 꼭 이딴 식으로 자기주장을 해야겠어?”
다소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공격적인 말투로 쏘아붙이곤 끙 소리를 내며 팔을 털었다.
“왜 아직 안 마셔? 마셔!”
동생은 다시 찻잔을 가리켰다.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히며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따스한 기운이 목구멍을 통해 안으로 전달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내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신 찻잔을 기울여 차를 들이켰다.
찻잔은 눈 깜짝할 새 비워졌다. 동생은 빈 찻잔을 채워주었고 나는 다시 차를 들이켰다. 온기가 손끝까지 전달되었고 등이 후끈해져왔다. 짙은 안개가 껴있던 것 같은 머리가 맑아졌고 몸은 가뿐해졌다. 찻주전자는 눈 깜짝할 새에 비워졌다. 그때서야 한숨이 나왔다. 마치 생명이 돌아오는 것 같은 한숨이었다. 동생은 온기를 탐하는 내 모습을 보자 화가 누그러졌는지 옆에 와 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딱딱한 어투로 동생이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잔을 내밀었다. 동생은 물을 채워주었다.
“형 부대가 적들과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난 이번엔 차 대신 물을 들이켰다. 뜨끔했다.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탈영한 거야?”
정곡을 찔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두려움에 팔을 안았다. 정직하게 그렇다고 대답하면 다시 그곳으로 끌려갈까? 또다시 죽이거나 죽거나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는 걸까? 긴장에 폐부까지 따끔거렸다. 동생은 나를 그곳으로 내몬 장본인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필사적으로 대답을 찾아봤지만 적당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따뜻하진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동생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살아서 다행이야.”
동생이 말했다. 난 그의 너무나도 의외인 한 마디에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뭔가를 떨쳐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깨어나서 별로 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자둬. 내일 또 출발해야 하니까. 형은 우리 행상과 같이 가지.”
그는 천막 문을 열었다. 싸늘한 기운이 대번에 코끝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어디로 가는 건데?!”
불안한 듯 물었지만, 동생은 나머지는 내일 얘기하자고만 했다.
천막이 닫히고 나 혼자만이 남았다.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자 크지 않은 천막 가장자리로 꾸러미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발갛게 타는 화롯불 주변엔 아까 마신 찻주전자와 찻잔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바닥은 흙바닥이었다. 나는 이불을 끌어올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밖에서 낙타들이 쌔근거리는 소리와 드문드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이곳이 어딘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혼자는 아니었다. 동생은 내게 내일 당장 다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의무를 운하지도 않았다. 화롯불은 따뜻했다. 점점 몸에서 힘이 빠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순간순간 의식이 깜빡거리고, 곧 나는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 같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러이 흩어지고 땀내와 진창 냄새, 금속의 비릿한 냄새, 오물냄새가 먼지와 함께 뒤섞였다. 따가운 햇볕에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빛이 번쩍이고 사내들의 함성이 공중을 울렸다. 나는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도 못 하고 저 검은 정수리들 너머 전장을 초조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사막은 장정들의 땀으로 먼저 젖고 그들이 흘리는 피로 웅덩이가 생겼다. 누군가의 팔이 잘리고 누군가의 머리가 갈라졌다. 전장은 공포와, 그를 덮기 위한 광기로 휩싸였고, 그건 후위에 있는 우리에게도 전염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대검에 머리가 찍혀 뇌수가 튀는 사람의 옆에 있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기분일까. 그 대검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리고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 걸까. 왜 여기 오는 것일까. 여기는 이미 지옥이었다.
누군가가 맹렬한 기세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거대하고 날카로운 도끼로 병사들을 찍어내고 절단내며 사자처럼 포효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병사들이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혹은 그가 지나고 나서야 잃어버린 육체의 단면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 광경에 압도되어 그저 간절히 그가 내 쪽으로 오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내 앞에 서 있던 자가 도끼로 목을 찍히고 쓰러졌다. 도끼가 자른 단면이 먼저 보이고 그 후에야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까부터 얼어붙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마치 죽음을 내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쓰러졌고, 이렇게 얼어붙어있기만 하면 나 역시 그들과 같이 죽어 쓰러질 것이었다.
식은땀이 나고 몸이 덜덜 떨렸다. 숨쉬기가 힘들어져 어깨로 겨우 숨을 이어갔다. 발끝에서부터 턱 끝까지 두려움이 서늘하고 저릿저릿한 감각으로차올랐다.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어떻게든 빼든 칼을 쥐고 서 있었다. 목뒤부터 뒤통수가 아플 정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눈 한 번 깜박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나의 앞으로 왔다. 그의 도끼가 높이 올랐다. 도끼에 더덕더덕 붙은 피와 살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날카롭게 벼린 도끼날이 공기를 베며 나의 어깨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헉!”
눈이 번쩍 뜨였다. 어둠 속이었다. 아직 오싹한 기운이 어깨며 등골을 휘감고 있었다. 나는 눈을 두어 번 더 깜박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천장이 보였다. 아름다움이나 문양이라곤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익숙한 부대 막사의 천장이었다. 양옆으로 사람들 자는 숨소리가 들렸다. 손으로 만져보자 목이 멀쩡히 몸에 붙어 있었다. 도끼로 몸이 갈라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그건 꿈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때서야 안심이 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악몽을 꿨나보지?”
옆 침대에서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첫날부터 나를 영 마뜩찮게 보던 살람이라는 사내였다.
“전쟁터에서 악몽을 꾸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해. 하지만 그건 전쟁터에 나가보기나 하고서 하라고. 형씨 기가 약한 건 알겠는데, 벌써부터 그러면 진짜 전쟁터에 나가게 되면 어쩔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잠시 숨이 막혀왔다. 밤의 어둠이 몽땅 내 위에 올라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에게도 나와 같은, 혹은 그보다 더 큰 어둠이 올라타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그의 눈이 젖어있음이 보였다.
“형님은 진짜 전쟁터에 나간 적이 있습니까?”
그가 나보다 연상임은 확실했기에 그렇게 물어보았다.
“다섯 번 정도...”
그는 그렇게 말하곤 맞은 편 옆의 침대를 보았다. 거기엔 그의 고용주의 침대가 있었다. 그는 이브라힘이라는 이름이었다. 살람은 다섯 번이나 전쟁터에서 살아남았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이브라힘의 아버지가 살람의 처자에게 생활비 10년분을 주는 것을 조건으로 이브라힘의 시종이자 경호원으로 고용되어 왔다고 했다. 나에게 그의 경력은 마치 까마득한 선지자의 이력처럼 들렸다. 나로서는 도저히 그처럼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왜 이 시간에 깨어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악몽을 꾸셨습니까?”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도 악몽을 꿨으리라.
“쓰지도 못할 칼이 더럽게 화려하네.”
배수대에서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코피와 흙먼지를 닦아내고 있자 그가 지나가며 한 마디 했다. 나는 언제나 허리에서 덜렁거리던 무겁고 화려하기만 한 애물단지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이런 건 나에게 필요 없었다. 그저 무겁기만 했다. 아무리 좋은 금속으로 아무리 잘 갈아놨어도 내겐 그저 흉측한 것일 뿐이었다.
“형님 칼도 화려하게 만들어 드릴까요?”
“왜?거기 형씨 칼에 박힌 보석이라도 떼서 박아주려고?”
“그런 것보다 훨씬 가벼운 걸로 해드릴 게요.”
“허허, 실없게...”
살람은 그렇게 말했지만 막사로 돌아가자 내 옷을 잡아끌어 자신의 칼집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옷을 보았다. 전반적으로 미색의 옷을 입고 있으니 어떤 색이든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붓을 꺼냈다.
붓이 가죽 칼집에 닿았다. 붓끝이 폭신하게 탄력을 갖고 마치 손의 일부처럼 가죽의 질감을 손가락 끝으로전해줬다. 검붉고 밋밋한 가죽이었던 것이 점점 색을 띠어감에 따라 나의 의식도 그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물감은 청록색에서 푸른색으로, 그리고 붉은 색으로 바뀌어갔다. 살람은 숨죽여 색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마치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 밖에선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명령을 하고 싸워댔지만, 이곳은 물감으로 그려진 물속이었다. 욕설하는 소리, 칼날끼리 부딪치는 소리, 싸워대는 소리는 멀어지고 오로지 내면의 소리만이 형태가 되었다.
“예쁘다!”
살람이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형씨 솜씨가 보통이 아닐세! 굉장허이! 이건 낙타 백 마리와도 안 바꾸겠어!”
“빈 소리 하지 마세요.”
“아니, 진짜로! 여긴 다들 번쩍번쩍 하는 화려한 칼들을 차고 다니니 내심 좀 부러웠는데, 지금은 내가 제일 예쁜 칼을 들게 됐네!”
“그 정도까진...”
“형씨, 또 누가 괴롭히면 말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살람은 순박한 얼굴로 웃었다. 전쟁터를 다섯 번이나 경험했는데 어떻게 그런 얼굴로 웃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기뻤다. 부대에 오고 처음으로 내가 나인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그것이 다행이라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형님.”
왠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람은 여전히 순박하게 웃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말이 달리는 소리가 났다. 덜그럭거리며 가문의 문장을 입은 기사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두려움에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기사는 길고 거대한 검을 휘둘렀고, 살람의 목이 떨어졌다.
“살람!!”
나는 그의 이름을 외쳤다. 기사는 나를 내버려둔 채 다시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살람!!!”
나는 다시 외쳤다. 허물어진 그의 몸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의 머리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살람!!!”
그에게로 달려가는데 그가 계속 멀어졌다. 눈물이 왈칵 났다. 팔을 허우적거리는데 팔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팔을 꽉 잡고 놓지 않는 것 같았다. 울음이 터졌다. 불안함과 답답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떴다.
그를 처음 봤을 때, 홀쭉한 얼굴에 마른 몸, 키는 훌쩍 크지만 도저히 칼을 휘두를 수 없을 것 같은,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길지만 가는 팔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선량한 얼굴로 맥없이 웃고 있었는데, 허리에 찬 화려하게 치장된 칼이 무색할 정도로 무기력한 인상이었다. 200년 전에도 300년 전에도 싸우던 숙적과의 전쟁터에 이런 전사라고도 부를 수 없는 남자가 보급품과 병사를 이끌고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허리의 칼보다는 손에 든 꽃이 훨씬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연꽃 아닌가?”
내가 손에 든 것을 묻자 그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좀 전의 무기력한 억지웃음에서 표정의 색이 바뀌자 웃음이 잔잔해지긴 했어도 오히려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혹 물웅덩이나 늪이라도 있다면 거기 심어볼까 합니다.”
“그대는 불도인가?”
“아닙니다. 무슬림입니다. 하지만 가장 더러운 곳에서도 깨끗하게 피어나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색상이 화려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렇게 은은한 것도 마음을 끄는 곳이 있어 좋아합니다. 물론 포도나 사슴뿔도 좋아하지만요.”
말투조차도 부드러워서 키도 골격도 나보다 컸지만 도저히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저 병사들을 전쟁터로 통솔해 왔다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 나라 안에서 내로라하는 정재계 거물의 둘째 아들로, 첫째 아들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보낸 자식이었다. 첫째 아들과 안면은 없었지만, 어떻게 죽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집안이 어떤 식의 교육을 하는지 손에 잡힐 듯했다. 거기다가 그들의 아버지인 아하브 대사의 아들 사랑은 소문이 자자했다. 분명 제멋대로에 방만하고 조금 배운 무예로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그런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를 매우 오해하고 있었다.
“씨앗을 넉넉히 가져왔는데 몇 개 드릴까요? 꽃은 이것 한 송이밖에 없지만 씨앗은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됐어. 가봐.”
“예..”
나의 거절에 그는 애매한 대답을 남기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의 동생이란 자가 들어와 형을 잘 부탁한다며 인사를 하는데,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풋풋한 얼굴이었지만 그 단단한 눈빛으로 밖에 대기하고 있는 그의 형이란 자가 데려왔다는 병사들은 사실 이 자가 통솔해왔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부잣집 아들들이 포진한, 일명 ‘쓸모없는 부대’였다. 도련님과 그 부대들이라고 하면 적절하겠다. 목적이라 한다면 재산과 아버지의 지위를 등에 업고 살아온 호기와 객기의 망나니들이 무작정 적에게 돌진하다 목만 돌아올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전투를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훈련과 청소와 빨래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가끔 잘나가는 집안 아들과 그렇지 않은 집안 아들로 나누어 작전을 수행했다. 대체로 없는 집 아들들로 구성된 선발조가 선두에 서면 있는 집 아들들이 뒤에 붙어서 전쟁 기분을 내고 돌아오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쓸 만해 졌다 싶은 녀석들은 본래 데려왔던 자기 군대를 이끌고 독립하거나 다른 군대와 합류하여 별개의 작전을 수행하는 식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그럼으로써 나의 아들도 전쟁터에서 용맹하게 싸우고 있노라 운운하며 머리를 높이 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이비 부대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였다.
그는 처음 닷새간은 무기력할 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엿새째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그는 훈련도 이겨내지 못하고 고열을 내며 쓰러져 사흘을 쉬더니 또 이틀 훈련했다가 사흘을 쓰러졌다가 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막사에 가봤더니 과연 그는 자리에 누워있었고, 사병 하나가 그를 보살피고 있었다.
“저 치가 왜 여길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를 보살피던 자가 말했다.
“훈련할 때마다 힘들다힘들다 노래를 부르더니, 목검으로 사람 때려보라고 하니 저렇게 골골대며 쓰러지지 뭡니까. 정작 맞은 놈은 팔팔하게 나돌아 다니고 있는데.”
“때리랬더니 쓰러졌다고?”
“예. 하도 자기는 붓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 없다고 떠들어대길래 저치가 들고 온 종이랑 화구를 줬더니 좀 나아지더라고요. 그나마도 종이가 다 떨어져서 저기다 그리고 있습죠.”
사병이 그의 머리맡을 가리켰다. 머리맡의 누런 막사 천에 푸른 바탕에 금색 패턴, 그리고 검은 포인트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아직 다 그린 것은 아닌 듯 테두리는 불분명했다. 아직 작은 부분이었지만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옆에는 종이를 가득 채운 아름다운 패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타고난 환쟁이일지도 몰랐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푸른 안료가 얼마나 하는지 아나?”
내가 뜬금없는 질문에 사병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쳐다봤다.
“저 푸른 안료는 코발트를 잘게 짓이겨 가루를 낸 것이야. 금색 안료는 금을 그렇게 해서 물에 갠 것이고. 그림에는 돈이 들지.”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측은함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보다는 창자가 꼬이는 질투심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를 바라보는 한심함이었다. 그의 동생이 한 달에 한 번씩 물자를 조달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이 남자를 집으로 내쫓았을지도 몰랐다.
“전쟁 중에 한심하긴...”
혀를 차며 돌아서려는 순간 사병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에 시선이 갔다. 칼집엔 청록색의 바탕에 푸른색과 붉은 색이 들어간 문양에 흰색으로 문구를 그려넣어 놓았다. 그의 칼을 청해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자, 원래 지극히 단순한 모양의 장식 없는 가죽 칼집이었던 것이 보였다. 아마 그것 때문에 사병이 그를 돌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난 그걸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약함이 옮을 것 같아 얼른 칼을 사병에게 돌려주었다. 나약한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종종 그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징후를 보고받았다.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전쟁터에라도 데려가 그가 마주해야 할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쟁에 예외란 없다. 심지어 아녀자와 아이들마저도 전쟁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했다. 전장에서, 심지어 코란을 필사하는 것도 아닌 그림 나부랭이를 붙잡고 있어서야 그저 짐일 뿐이다. 모두가 쓸모 있어야 한다. 그건 놀랍게도 있는 집 도련님들의 부대에서도 그랬다. 모두가 자기 역할을 한다. 그림 같은 비생산적인 것은 존재 가치가 없다. 그런 것들은 평화롭고 풍족한 때에나 가치를 가지는 법이다. 지금은 평화롭지도 풍족하지도 않은 상황이다.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불운하게라고 해야 할지, 적이 전방 방위선을 뚫고 이곳까지 침범했다. 전선에서 약간 떨어진 위치였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우린 적을 맞이하여 준비해온 대로 움직였고,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아온 도련님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잘 움직였다.
오아시스를 뒤에 두고 바닥이 단단한 사막에서 우리는 이틀을 내리 싸웠다. 상대는 금속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었고, 더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속은 내리쬐는 햇빛에 금방 달궈졌고, 그들은 짧게 치고 빠지는 식의 전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뒤에는 성이 있었고, 우리에겐 심지어 작은 오아시스도 있었다. 기온이나 날씨에 적응 같은 거야 이미 모두 끝내놓은 상태다. 전투는 오래 끌면 끌수록 유리하다. 이 전투는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규모 병력인 것으로 보아 그들 중 일부인 것 같긴 하지만, 그들이 왜 이런 어리석은 싸움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적을 욕심내다가 이리로 온 것일까, 아니면 상부 무능한 자의 지시에 따라 이리로 온 것일까?
그러나 사흘 째 되던 날은 적도 무슨 악을 냈는지 제법 맹렬하게 싸워왔다. 말발굽에 먼지가 일고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했다. 나는 전전긍긍하며 병사들을 독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일대는 모두 평지에 바닥도 단단해서 작전을 짤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 결국 용맹함과 전투력만이 승패를 가르는 싸움이었다.
혼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갑옷을 입은 자가 뭐라고 계속 외치며 주변인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큰 소리였는데, 부관이 “말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저 자를 잡으라!”
갑옷을 입은 자를 눈으로 좇다보니 의외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알 아하브(아하브의 아들), 바로 ‘그’였다. 갑옷을 입은 자는 그를 칼로 내리치려 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죽어선 안 된다. 다급하게 외칠 겨를도 없이 기사의 칼이 그의 머리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주 의외로, 기사의 목을 뚫었다. 나의 자리에선 그렇게 보였다. 나중에 보니 목을 뚫은 게 아니라 입으로 칼을 쑤셔 넣었던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쓸모 있었던, 가장 쓸모 있었던 순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혼전 탓에 빠르진 않았지만 적이 물러가고 있었다.
적들이 완전히 물러가고 난 처음으로 그에게 칭찬을 했다. 거하게 한바탕 토했는지, 옷에는 땀과 피와 토사물이 아직 묻어 있었다. 냄새가 지독함은 당연했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첫 경험이었다. 여기에 있는 누구나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누구나가 그걸 이겨냈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되고, 도태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는 여태까지의 내가 봐왔던 많은 병사들이 그랬듯이 한동안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원래 나약했던 만큼 더 요란스럽게 앓았다. 그는 또다시 고열을 내고 드러누웠다.
전투는 하루를 건너뛰고 그 다음날 또 개시되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것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노란 태양이 사정없이 이글거리고 금속 갑옷을 입은 적들이 불판 위의 고기가 된 마냥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는 맑고 더운 날이 좋았다. 그럴 때면 어설픈 구실을 붙여 땅싸움을 시작한 어리석은 자들의 천사들도 저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비는 달랐다. 미끄러운 땅과 축축하게 달라붙어 움직임을 방해하는 옷가지나 쉽게 확보되지 않는 시야가 양쪽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 조건이 공평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승리가 결정되어 있었다. 원군이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은 우리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저기 포박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림이...”
대열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홱 돌려 노려보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동안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병사들은 모두 몸을 긴장시키고 입을 다물었다. 전투 전에는 전투만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방금 그 말을 한 녀석의 목을 적 대신 내가 베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아하브 대사의 아들이라 해도 말이다.
“알다시피 저쪽에 우리의 원군이 도착해 있다. 적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일찌감치 내뺐으면 좋았을 텐데도 항복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한다. 먼저, 원군으로 도착한 알 샤마드의 군대가 적을 치고, 우리는 그보다 늦게 적의 후방을 칠 것이다. 우리는 맹렬히 싸울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전투 역시 우리의 승리가 될 것이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족을 위해 싸우라!”
연설을 끝내자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나는 ‘그’를 찾았다. 그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등을 둥글게 말고 시선은 한 군데 고정시키지 못하고 계속 움직였다. 나는 혀를 차며 그의 위치를 맨 뒤로 옮겼다. 괜찮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병력은 적의 세 배에 다다랐다. 도련님들은 무사할 것이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은 전투가 끝나고 닷새 뒤였다. 고열을 내고 드러눕고는 여태 일어나지 못했다는 보고였다.
“누워있는 것을 확인했나?”
“예.”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물어봤더니 선선히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지 않고 교관의 얼굴에 내뱉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아하브 대사의 아들이라 해도 이건 너무했다. 충격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약해빠진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난한 집의 아들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그는 보고 배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 요량으로 그의 막사를 찾았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두 명의 사병이 나를 맞이했다. 막사 천의 안쪽은 온통 파랗고 빨간 물감으로 그린 패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그렸냐고 물어보자 알 아하브가 그렸다고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해 왔다. 정말 그 다운 행동이었다. 아무리 부잣집 도련님들이 모이는 곳이라 해도 이 녀석 만큼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통솔자가 왔음에도 고개도 들어 보이지 않는 것도 화를 돋구었다. 그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씨근거리는 숨을 참지 않고 그의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들췄다.
카즈소우 참 좋았는데 작가시키 공각기동대로 우익 인증... 솔직히 공각기동대도 아주 좋아했는데, 파프너 각본가가 각본 작업을 한 공각기동대 어라이즈를 보고선 파프너와 공각기동대 양쪽으로 똥을 퍼먹은 기분이 들어 걍 내다버렸습니다.
글쎄요, 어라이즈 시리즈를 다 보지는 않았지만, "일본 상부의 지시로 전쟁범죄를 자행했고 그것을 폭로하겠다고 나섰던, 어찌보자면 나름 양심 군인인 사람이 거의 테러에 가까운 짓을 자행하는데, 실은 전뇌에 침투한 바이러스에 기억을 조작당해 없었던 전쟁범죄의 기억이 심어진 것으로 인해 벌어졌던 사건"이라는 어라이즈의 내용은 어이를 상실하게 만들기에 아주 충분했었기 때문에(사실 파프너 극장판 역시 나가사키 히로시마 피폭과 베트남 전쟁을 모티프로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찜찜했었는데 이걸로 너무나도 확실하게 우익 병신임을 인증한 셈이라), 공각기동대도 파프너도 보지도 않고 더 팔아주지도 않는 게 도의상 맞겠단 생각이 들어 아에 접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된 것은 올해 봄부터인데 새삼스럽게 적게 된 것은, 유입 키워드와 경로를 보니 카즈소우나 파프너 관련 검색으로 많이들 들어오시기에 모르시는 분들은 아시라고 적어봅니다.
매우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더 적다간 정말 심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정말로 양쪽 모두가 펑크가 납니다. 본의는 아니지만 하나는 도저히 마감에 맞출 수 없고 하나는 도저히 낼 수 없는 퀄리티였기에 그냥 쌈박하게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융융이 기껏 위탁 받아준다고 했는데 되게 미안합니다...
그래서 어떤 걸 쓰고 있었냐면
그랬다.
그랬었다.
알버트는 납득했다. 라이오넬이 떨리는 총구를 잡아 자신의 이마에 들이댔을 때 알버트는 여태까지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둠속에서 솟아나, 비어있던 부분을 완벽하게 채워 시끄럽게 삐걱대던 의문의 조각들을 꽉 채웠다. 그리고 막 완성된 감정은 라이오넬의 이마를 향한 총구와 결합해 목구멍으로 치달아 올라 나지막이 입가로 흩어졌다. 시야는 형편없이 흐려졌다. "네가 아니면 안 돼!"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던 말이 가슴을 때렸다. 뒤늦게 찾아온 자각이 손가락으로 흘러 그 끄트머리에서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진의를 깨닫게 되는 자신의 아둔함을 원망했다.
저택 안은 적막이 감싸고 있었다. 두 사람이 죽었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도 몰랐다. 라이오넬은 유력한 살인용의자였다. 알버트 역시 그 사실에 겁먹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라이오넬이 그가 가진 총을 빼앗으려 하자 알버트는 저항했다. 라이오넬이 덤벼들어 결국 총을 빼앗아 갈 때까지 실수로라도 발사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했다. 웃기게도 이런 상황에서 그는 라이오넬이 다치거나 죽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둘 중 하나가 죽는다면 차라리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버트는 라이오넬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겼다. 라이오넬이 그 권리를 행사하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가. 하지만 라이오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것을 원망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총은 이제 라이오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알버트는 이제 침착한 얼굴로 창문을 등지고 라이오넬과 마주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지금 서로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알버트, 너는 날 죽이지 못해.”
라이오넬이 조용히 그를 문책했다. 알버트는 수긍했다. 라이오넬은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지.”
총구가 불을 뿜었다. 총탄은 가슴을 뚫고 유리창에 작은 구멍을 내며 저택 밖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귀가 먹먹해지는 파열음과 거의 동시에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조각나는 유리창과 함께 알버트의 몸이 유리창 밖으로 기울어졌다. 방 안을 가득 메우고 반사되는 총성의 메아리가 그의 몸을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짙은 남색 하늘이 알버트의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숫자의 하얀 눈들이 마치 별처럼 하늘에 떠 있었다. 아직은 상처가 아프지 않았다. 다만 온몸이 자극에 집중하느라 숨을 쉴 수 없었다. 눈보다 몸의 낙하속도가 빨라 뒤통수와 등으로 아래에 있던 눈이 달라붙었다.
이명이 총소리를 먹어치우며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가늘고 긴 신경 긁는 소리 속에서 눈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늘어졌다. 알버트는 아래로 끌어당겨지며 검푸른 하늘이 주변으로 퍼져가는 것을 보았다. 눈은 마치 별의 운동을 그린 것처럼 하얀 선을 그리며 멀어지다가 곧 어둠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아직 낙하 중이었다.
그러다가 이제 이명도 어둠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알버트는 자신의 죽음을 납득했다.
희미한 이명이 울렸다. 어둠 속 지평선에서 강렬한 빛의 띠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른함과 가려움을 닮은 경미한 근육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멀어졌다가 다시 밀려왔다. 눈꺼풀과 등줄기가 근지러웠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들이 이명 사이로 드문드문 섞여들었다. 빛은 몇 번이나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그 세기를 강화해나갔다. 소리는 왕왕 울리며 점점 커졌다. 알버트는 결국 엷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누구라도 좋으니 11시 방향 커버해줘요!”
“못 해! 현재 다수와 전투 중! 떨쳐낼 수 없어!”
“제3격납고 피탄!”
어딘가에서 급박한 목소리들이 울렸다. 전투 중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버트는 멍하니 심장 부근을 만져봤다. 상처는 흔적도 없었고 전혀 아프지도 않았다. 죽은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것인가? 죽은 자들의 세계에 와 있다면 그들은 왜 전쟁 같은 것을 묘사하는가? 알버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주변을 살펴봤다.
알버트는 그가 전혀 상상해본 적이 없는 곳에 갇혀 있었다. 주변은 금속과 유리 이중으로 된 유선형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넓이는 저택의 화장실 정도로 좁았다. 천장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낮았다.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는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의자로, 몸을 감싸는 재질이나 안락함은 여태까지 쓰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좌석 양 옆으로는 레버 같은 것이 배치되어 있었다. 시야 아래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면과 버튼들이 몇 개가 있었다. 알버트는 마치 자동차 운전석을 고급화하여 금속 상자 안에 처박아놓은 것에 운 나쁘게 자신이 갇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배리어 78% 손실! 요격 시스템 46%가 작동불능입니다!”
“룩시온은 아예 그른 거야? 룩시온이든 브라디온이든 뭐든 빨리 내보내줘!”
“브라디온 출격이 허가되었습니다. 브라디온 기 출격 스탠바이.”
스피커는 아직도 멋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알버트는 멍하니 그것을 듣고 있었다. 분명 영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현실감을 가질 수 없었다. 브라디온 기 파일럿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는 말이다.
“브라디온 스탠바이.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알버트는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죽은 자의 세계라면 그가 있어선 안 됐다. 그가 왜 여기 있는가?
“……라이오넬?”
무심결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 이름에 반응하듯 그가 몸을 싣고 있는 곳에 생명이 깃들기 시작했다. 위잉 하는 팬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금속벽으로 닫혀있던 시야각이 선명하게 열렸다. 자동차 시동을 걸었을 때처럼 미세한 진동이 좌석을 통해 전해지고 유리벽과 화면 위로 글씨와 함께 기묘한 기호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직후 시야에 나타난 글씨들이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해갔다. 스크린을 통해 열린 시야로 부서진 건물 잔해와 거기에 깔려 죽은 시신 몇 구가 보였다. 알버트는 숨을 들이켰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엔 분명한 현실감을 갖고 있었다.
연합군의 전함 시그너스 호는 지독하게 운이 없었다. 시그너스 호의 임무는 태평양 서부 피닉스 제도에서 이제 막 실용화에 성공한 기체―브라디온 기과 룩시온 기―를 이곳 고등전술시스템 연구개발연구소에서 미국 플로리다 주 틴돌 공군 기지까지 무사히 운반하는 것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러나 하필 출발을 목전에 둔 이날, 적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습격해온 적의 규모는 이쪽보다 작았다. 그러나 기동성과 화력 면에 있어서는 저쪽이 압도적이었다. 이유는 21세기 중반에 발견된 고농축 에너지 소스인 넥토르븀에 있었다.
넥토르븀은 「친환경에너지와 석유에너지 사이를 이어주는 과도기적 에너지원」이라는 구호 아래 쓰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 새로운 에너지원에 열광했다. 그들은 “과도기적 에너지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엄청난 효율과 화력으로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을 변혁시켰다. 특히 에너지 소비 규모가 엄청난 항공과 군대에선 넥토르븀 없이는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의존도가 커졌다. 그러나 이것의 가장 큰 문제는 매장지역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 파악된 곳으로는 시베리아 일대와 태국과 캄보디아, 그리고 보루네오 군도 정도다. 자유무역연합은 북미와 유럽, 그리고 일부 국가에 머물러 있었다.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연합군의 문제를 말하자면, “에너지원”이 모자랐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풍부한 자원으로 무장한 조길리아 공화국의 군대만큼 에너지를 쓸 수 없었다. 항상 그들보다 낮은 출력으로 싸우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기동력이나 화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과 같은 형태의 결과로 나타났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만들어놓은 신형기였다. 파일럿 육성에도 엄청난 돈이 들어갔다. 그러나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제2격납고를 공격당하며 룩시온과 파일럿을 잃었다. 브라디온은 룩시온과 짝을 이뤄 제 기능을 발휘하는 기체였다. 그들은 이제 신형기의 성능에 기대어 볼 수도 없었다. 함장대리 비비안 블랙로크는 손가락으로 오른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럴 때 돌파구를 찾아내는 것이 함장의 역할이었다.
“어, 룩시온이……!”
그때 오퍼레이터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룩시온이 어떻다는 거지?”
날카롭게 물어보자 오퍼레이터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룩시온이…… 작동합니다.”
“뭐?!”
먼저 반응한 것은 옆 데스크에서 브라디온의 상태를 체크하던 페트리시아 박사였다.
“매칭지수,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계속 올라갑니다. 엄청난 수치입니다, 박사님! 90을 넘었어요!”
페트리시아는 아연해졌다. 브라디온 기의 파일럿인 라이오넬과 이 정도의 수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이 연구소에 없었다. 모든 매칭 테스트는 기록되어 있었고 그녀의 꼼꼼한 검사를 거쳤다. 대체 누가 이 정도의 수치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불가능했다.
“룩시온 기! 지금 앉아있는 사람은 누구죠? 이름과 소속, 관등성명을 대세요!”
그녀는 윽박질렀다. 그러나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기체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녀는 초조해졌다.
“이봐요, 거기! 대답해요! 누구길래 거기 앉아 있는 거죠? 허가된 사람 이외엔 탑승해선 안 되는 것 알고 있나요? 얼른 거기서 나와요! 경우에 따라선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도 있어요!”
“이봐요!”
비비안은 박사가 대답 없는 룩시온 기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을 냉철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박사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살아남아서 이곳을 빠져나가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알버트”
드디어 룩시온 기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의외로 소년처럼 맑고 깨끗했지만 어딘지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남작입니다.”
그의 대답에 페트리시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비비안은 낮은 신음을 내며 턱을 쓸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현재 이곳 연구소 소속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빨리 그곳에서 나와요! 빨리!”
패트리시아가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이 기체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반응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커플링 하도록 해요.”
비비안이 말했다.
“예?”
“여기서 모두 죽으면 신형기고 자시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거예요, 패트리시아 중위. 커플링을 시키세요.”
그녀는 패트리시아에게 계급을 들이대며 명령했다. 패트리시아는 납득하지 못하는 듯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 망설였지만, 결국 라이오넬과 알버트에게로 회선을 열었다.
“커플링을 하라고?”
라이오넬은 되물었다. 준비되었던 파일럿이 죽은 이상, 그와 커플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이곳에 남아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정체도 알 수 없는 대상과 커플링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매칭 수치는 거의 톱으로 나왔어.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야. 이제 부적합으로 죽거나 하지 않잖아. 하라면 해!”
비비안의 다소 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이오넬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말이야 쉽지, 뇌파와 신경계까지 링크시켜 교감을 나눠야만 하는 입장에서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이오넬로서는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넬?”
화면과 함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라이오넬의 입술에서 낮게 욕설이 흘렀다. 알버트의 얼굴 위로 적의 블레이드가 날아들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기체를 선회시켜 블레이드를 피한 다음 적기의 복부에 탄환을 세 방 먹여줬다. 아드레날린이 어느 때보다도 많이 분출되었다. 손발이 짜릿짜릿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지고 있는 전쟁이었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묘한 호승심이 솟아올랐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반짝였다.
“룩시온 기, 듣고 있나? 이제부터 그쪽으로 갈 테니 네가 할 일을 잘 듣고 지시한 대로 하도록!”
라이오넬이 제2격납고를 향하며 말했다. 2시 방향에서 적 기체의 공격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피하며 곧바로 알버트에게로 향했다. 꼬리에 붙은 적기를 흔들며 커플링 가능 범위 내로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말해! 커넥티브 라이오넬!”
라이오넬이 외쳤다. 그는 커플링 가능 구역의 경계를 따라 선회하며 알버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커넥티브…라이오넬.”
“억셉션!”
라이오넬은 승인 구호를 외쳤다. 파일럿 시트에서 그의 뇌와 신경을 연결하기 위한 장치가 철컥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려지며 의식이 감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질적이지만 그다지 이질적이지 않은 느낌이 그를 나른하게 지배하고, 곧 의식을 현실로 불러들이는 짜릿한 전기적 자극이 머리에서부터 온몸으로 흘렀다. 손가락 끝, 발가락 끝까지 저릿저릿한 느낌이 지나가고, 묵직한 반향이 꼬리뼈에서 척추를 타고 되돌아갔다. 레버를 잡고 있는 손가락의 느낌도, 콕핏에서 나는 냄새도 바뀌었다. 그는 룩시온 기의 파일럿과 연결되어있음을 실감했다. 고양감이 흘러넘쳤다. 라이오넬은 의식이 확장되고 있었다. 그의 곁을 지나는 주변 광경은 평소보다 훨씬 느려 보였다. 뒤에 따라붙은 녀석들의 움직임은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할 수 있다.
그는 아랫입술을 핥았다. 뒤에 붙은 녀석들은 이제 그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알버트의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육체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그는 곧 근처에 있는 라이오넬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감각은 라이오넬을 향해 달려들었고, 알버트는 온몸으로 라이오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전기적 자극이 온몸을 훑고, 그 묵직한 반향이 단전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갔다. 익숙하고 기묘한 감각이 그의 몸을 지배했다. 이질적인 차가운 냄새만이 나던 콕핏에서 라이오넬의 냄새가 느껴졌다. 알버트는 그냄새를 깊숙이 들이켰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고양감이 흘러넘쳤다. 라이오넬이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알버트는 룩시온을 구동시켜 격납고를 빠져나갔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무엇을 타고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라이오넬의 감각을 운용해 룩시온을 움직였다.
격납고를 빠져나가자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말도 안 되게 푸른 하늘이었다. 날씨는 맑기 그지없었다. 비록 까마귀 떼들처럼 전투기와 인간형 기체들이 날고 있었지만 푸른 하늘은 푸른 하늘이었다. 알버트는 속력을 내어 금속으로 된 까마귀 떼들 사이를 쌔앵 날아보았다. 날아드는 적의 포탄을 피하며 수면 위를 아슬아슬하게 저공비행 하다가 큰 호를 그리며 날아올랐다. 그를 따라 온 물방울들이 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이번에 그는 적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적기들은 느렸고 적의 총기에서 발사된 탄환마저도 느렸다. 알버트는 그 사실에 흥분했다.
“흥분하지 마, 룩시온.”
화면 구석에서 라이오넬이 그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라이오넬 역시 흥분하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막 3기와 적의 소형 함선 하나를 작동불능으로 만들어놓은 참이었다. 그는 라이오넬의 흥분된 호흡을 공유하고 있었다.
잠시 움직임이 멈추자 곧바로 적이 공격해왔다. 순간가속으로 공격은 피했지만 곧 다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알버트는 공중에서 급선회 하며 공격을 피했다. 조종석에 걸리는 부하에 알버트는 이를 꽉 물고 온몸에 힘을 줬다. 몇 군데 실핏줄이 터진 것 같았지만 속력을 내며 날아 요령 좋게 적 기체를 적의 모함에 들이받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적의 공격이 이어졌다.
“선회하지 마! 직선으로 움직여!”
회선을 통해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알버트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또 한 대의 적기가 그에게 따라붙었고, 그는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가 수면으로 하강했다. 그를 따라오던 적기가 그의 꽁무니로 따라붙었고, 알버트는 아슬아슬하게 수면에서 연구소를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따라오던 기체는 물속으로 처박혔다. 라이오넬은 아직 자신의 근처에 있었다. 그는 라이오넬과의 연결을 재확인하며 다시 하늘로 떠올랐다. 알버트는 지극히 흥분하고 있었다.
“흥분하지 마! 안 들려? 선회하지 말라고! 직선운동을 해! 내 말 듣고 있어?!”
“알고 있어!”
대답은 했지만 라이오넬의 충고가 별 소용은 없었다. 알버트가 너무 흥분하고 있었던 데다가, 직선운동만으로 모두 피하기에 알버트는 미숙했고 그가 운용하는 기술은 지나치게 고급이었다. 아드레날린이 퍼져 아픔을 잘 느낄 수 없는 탓도 있었다. 또다시 적이 공격하자 알버트는 직선으로 움직이려 노력했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작은 호를 그리며 공격을 피했다.
“커헉!”
이번엔 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알버트는 피를 토했다. 내장에 손상을 입은 것 같았다. 자신을 노리고 총을 들이대는 적을 노려보았으나, 적은 9시 방향에서 날아온 탄환에 쓰러졌다. 알버트가 확인하자 남색으로 전신을 칠한 밸리언서―인간형 기체―가 의기양양하게 총을 들어 보였다. 피식 웃다가 순간 뇌리를 스치는 강렬한 위기감에 라이오넬의 기체를 쳐다봤다. 총기가 땅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적 기체의 거대한 소닉 블레이드가 굉음을 내며 브라디온의 배에 꽂혔다.
“라이오넬!!”
알버트가 비명을 지르며 튕기듯이 그를 향해 날아갔다. 적은 브라디온 깊숙이 박힌 블레이드를 지지 삼아 콕핏부를 우악스럽게 쥐고 뜯어내려 하고 있었다. 알버트는 순식간에 적 기체의 왼쪽 어깨를 잘라냈다. 구동부의 일부 부품들과 뜯긴 와이어들이 지저분하게 튀어나왔다. 적 기체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기울면서도 브라디온을 놓지 않았다. 남아있는 오른팔은 소닉 블레이드로 브라디온의 몸체에 완만히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알버트는 거친 소리를 내며 적 기체를 향해 한 번 더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이번엔 다리가 떨어져나갔다. 그러자 비로소 적 기체가 브라디온을 놓았다. 알버트는 정신없이 브라디온을 안았다. 적 기체는 어느 새 다가온 적의 동료가 구조해 갔다. 그리고 그 기체가 회수되어 감과 동시에 적들이 퇴각했다. 바다 위에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쫓지 않습니다. 전 기, 돌아오십시오. 무기 보충을 끝낸 후 제1 경계태세로 대기합니다. 룩시온과 브라디온은 긴급점검 들어갑니다.”
알버트는 브라디온을 안고 활주로를 향했다. 어느 새 커플링이 풀려 있었다. 그는 라이오넬과의 연결이 끊어진 탓에 몹시도 불안정한 착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브라디온을 놓치고도 한 바퀴를 굴러 제3격납고 해치에 바디를 부딪치고 나서야 완전히 멈출 수 있었다.
약간의 충격이 있긴 했지만 콕핏 안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알버트는 다행히 머리를 브라디온 쪽으로 향한 채 룩시온이 멈춰준 덕에 라이오넬이 브라디온 콕핏의 해치를 열고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콕핏에서 나온 라이오넬은 헬멧을 거칠게 벗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헬멧이 부딪친 곳에는 핏방울이 튀었다. 라이오넬의 입가에는 핏자국이 나 있었다. 커플링 시스템의 영향이었다. 그는 거친 발걸음으로 룩시온 기를 향했다. 룩시온 기의 파일럿은 나올 생각을 않고 계속 콕핏 안에 앉아 있었다. 그는 외부에서 해치를 열고 파일럿의 멱살을 잡았다. 파일럿은 창백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선회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덕분에 난 죽을 뻔했어!”
라이오넬이 으르렁댔다. 알버트는 히죽히죽 웃으며 라이오넬의 손목에 손을 얹었다. 뼈마디가 불거질 정도로 마른 손이었다. 라이오넬은 그 손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좀 전의 비행을 견딜 수 있는 컨디션의 신체가 아니었다. 라이오넬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자 좀 전까지 웃고 있던 알버트가 스르륵 미끄러져 파일럿 시트로 떨어졌다.
“어때?”
아래서 남색 밸리언서의 조종사가 물었다. 라이오넬은 한숨을 쉬었다.
“기절했어.”
눈을 뜨자 새하얀 형광등의 불빛이 보였다. 주변은 창문조차도 없는 콘크리트 벽이었다. 알버트는 힘겹게 몸을 굴려 일어났다.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와 책상, 의자, 그리고 화장실이 붙어 있는, 기묘할 정도로 기능만이 강조된 방이었다. 인간적인 온기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는 답답한데도 한기가 들어 팔을 쓸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아직도 낯선 곳이다. 이곳은 그가 처음 룩시온의 조종석에 앉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줬다. 이질적이고 차갑고 외로운, 외따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사자(死者)의 세계에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알버트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자연광이 전혀 없어서 몇 시인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저 밤의 느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혼란이 그를 덮쳐왔다.
전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떨어졌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뭔가를 타고 날았다. 사람 모양을 한 기체가 자신을 따라왔다. 자신은 기체가 상대보다 빠르고 움직임이 날카로운 것을 이용하여 의도적으로 상대가 적 모함에 부딪치게 만들었다. 다른 기체는 엄청난 속도로 물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온통 분홍색으로 도색했던 기체의 왼팔을 잘라냈다. 손에 둔탁한 느낌이 걸렸다. 촘촘하게 이어진 와이어가 거친 단면을 드러내고 구동부를 매끄럽게 유지하기 위한 오일이 피처럼 흩어졌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균형을 잃은 적 기체의 왼쪽 다리를 잘라냈다. 알버트는 발작적으로 귀를 막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이 한 짓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타고 있었던 것처럼 분명 거기엔 사람이 타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더 깊은 사고의 심연으로 빠져들기 전에,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나며 방문이 열렸다. 라이오넬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다들 네가 일어나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어.”
그는 찻잔에 담은 홍차를 알버트에게 들이밀었다. 알버트는 몸을 굴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어디지?”
알버트가 묻자 라이오넬이 한쪽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자주 보던 그 표정이었다.
“몰래 숨어들어 룩시온에 탑승할 정도면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려고 온 게 아니었어.”
“그럼 어떻게 오게 된 거야?”
라이오넬이 되묻자 알버트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차마 ‘너한테 죽고 나서 눈 떠봤더니 여기였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알버트는 입을 다물었다. 라이오넬은 그의 심중을 헤아렸는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앞에 내민 잔을 한 번 더 그의 턱 앞에 들이밀었다.
“그 정도로 고전적인 영국 영어를 하면서 홍차는 안 마셔?”
라이오넬의 말에 알버트는 차를 받아들었다. 솔직히 그로서도 라이오넬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심지어 라이오넬이 왜 여기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생각하기 시작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차라리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홍차의 향을 맡았다.
“다 마시면 함교로 가보지. 함장 대리가 기다리고 있어.”
라이오넬이 말했다. 알버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백 년 전 영국에서 왔다고??”
비비안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알버트의 모습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어보았다. 소매가 넓은 셔츠에 베스트, 타이트하게 다리를 감싸는 미색의 팬츠는 확실히 19세기 영국의 유행을 대변해주고 있기는 했다.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창백하고 투명한 인상의 날씬하게 빠진 미청년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이 농담 같은 상황을 더 농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마치 20세기 후반의 싸구려 코미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설정이었다. 저걸 설명이라고 하다니, 비비안은 실소를 그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타게됐고 하라니까 시키는 대로 했던 것이다?”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알버트는 목을 움츠렸다.
“그래서 거기서 나오라는 지시도무시하고 폭주하다가 커플링 대상에게까지 민폐를 끼쳐 브라디온에 심각한 손상을 야기하고 우리 소중한 신상품을 제3격납고에 머리부터 갖다 박아놓은 것도 우리가 시킨 대로 한 일의 결과이겠군요. 브라디온의 신형 바디는 다시 만드는 데 한 달이나 걸리는 데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벌어도 다 모으지 못할 만큼의 돈이 들어가고 평범한 사람이 평생 써도 다 벌충하지 못할 만큼의 시말서를 나는 쓰게 됐는데 말이죠.”
그녀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살아남았으니 이제 살아남게 해준 사람의 정체를 걱정해야할 때였다. 그녀는 비난하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일부러 붙여 말했다.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이 연약해 보이는 남자를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남자의 가마를 응시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는 걸까. 혹시 이 사람은 누군가가 데려온 망상증 환자가 아닐까.
사실 비비안은 처음부터 이 남자가 스파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상정하고 태웠다. 커플링에 성공하면 컨트롤 타워에서 룩시온의 제어를 원격으로 바꾸고 브라디온으로 하여금 적을 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룩시온이 조금이라도 허튼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그렇게 되진 않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에요. 당신이 조종한 기체는 국가기밀이고 말이죠. 시그너스 호의 수리가 다 끝나서 이곳을 떠날 때까지 2주 정도 걸릴 거예요. 그때까지 당신이 어떻게 할지 결정해요. 여기 군대로 들어와 당신이 부숴먹은 것을 수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니면 기지에 도착해 처분이 결정될 때까지 민간인 자격으로 구금되어 있을 것인지. 언제든 결정되면 말해줘요. 그때까지 당신이 다닐 수 있는 구역은 C블록 일부로 지극히 제한될 거예요.”
옆에 서 있던 갈색머리 여자가 말했다. 뼈대가 작고 마른, 마치 종달새 같은 여자였다. 흰 가운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군인은 아닌 듯 보였다.
“일전처럼 쳐들어오지만 않으면 당신은 편해지겠죠, 미스 홉킨스.”
“이미 차고 넘칠 만큼 환자가 많아요.”
그녀는 우수가 짙게 깔린 얼굴로 팔을 쓸었다. 피로가 역력한 얼굴이었다. 비비안은 그녀에게 아주 잠깐 연민을 느꼈지만, 다시 고개를 알버트에게로 돌렸다.
“앞으로 한동안은 라이오넬 이스터브룩 대위가 당신을 감시할 거예요. 브라디온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벌로 C블록 내 근신이라니 부럽기 짝이 없군요.”
알버트는 그녀의 말에 더욱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고개가 약간 라이오넬 쪽으로 돌아간 것을 보면 라이오넬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돌아가요. 다음에 다시 만나도록 하죠.”
그녀는 알버트가 조금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것을 즐겼다. 옆에선 라이오넬이 불순한 눈동자를 하고선 발뒤꿈치를 붙이며 깍듯한 경례를 해왔다.
두 남자가 함교에서 사라지고 유압식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홉킨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알버트라던 남자의 DNA는 그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의 DNA와 거의 일치하지 않았어요. 신체적 특징은 많이 겹쳐도 생판 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리티시어 스텔라 홉킨스가 대답했다. 비비안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라이오넬이 그걸 알고 있나요?”
“예, 어제 물어보러 왔었어요.”
“그래요….”
비비안은 손가락으로 깍지를 꼈다. 눈을 감고 몸을 편안히 이완시켰다. 이제부터 어쩐다. 상부에선 감시를 붙여서 일단 두고 보라고만 했다. 어떤 길을 택해도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비교적 안전한 길을 택할 것인가, 불안요소를 계속 끌어안고 전장에 나갈 것인가. 그녀는 두 방법 모두 내키지 않았다.
알버트는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서 영국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남국의 강렬한 태양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건물의 그림자는 빛과 대비되어 더욱 뚜렷해져 있었다. 뜨거움과 서늘함이 체스판처럼 교차하고 있었다.
함교에는 비비안 싱이 있었다. 리티시어 스텔라 홉킨스가 있었다. 라이오넬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가 200년 후의 전혀 모르는 세계라고 말했지만, 그에게 이곳은 마치 자신을 위해 잘 만들어진 무대 같았다. 숨이 막혔다. 현기증이 일었다. 총알이 관통했던 부분을 만지자 한기가 느껴졌다. 세계가 이 섬 하나로 좁혀지는 갑갑한 느낌에 팔을 안았다. 도대체 이 무대의 목적이무엇인 걸까. 왜 자신은 라이오넬에게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나. 이것은 혹시 천국에서의 사이코드라마인가?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홉킨스 박사가 치료를 했다고 했는데.”
라이오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그늘 속에서 알버트의 얼굴이 시시각각 창백해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세포치료로 전투 중에 입었던 부상의 회복에다 몇 가지 처치를 더 해줬다던데, 아직도 아픈 데가 있어?”
알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세포치료가 뭔지는 몰랐지만 문맥을 알아듣기에는 문제없었다.
“너한테선 항생제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더군.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신기해했었어. 과연 19세기라면 아직 페니실린이 만들어지기 전이었으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만.”
라이오넬이 피식 웃었다. 약간의 피로와 권태가 묻어있는 얼굴이었다. 의심이 섞여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라이오넬은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믿어주는 거야?”
“안 믿어. 더 캐물을 마음도 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 건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알버트는 말을 삼켰다. 자신조차도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라이오넬의 멱살을 붙잡고 어떻게 이렇게 크고 정교한 무대를 꾸밀 생각을 다 했냐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커플링’의 체험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알버트는 라이오넬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그런 체험을 함께하고서 라이오넬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때의 흥분은 남녀 간의 성행위 때와 비슷했다. 알버트는 그 감각을 떠올리며 라이오넬의 척추를 시선으로 훑었다. 적당히 벌어진 어깨에서 늘씬하게 빠진 허리선을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흥분된 호흡을 내뱉었다. 허벅지 스치는 소리며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함께 움직이는 둔부를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흠칫, 그는 스스로 놀라 숨을 삼켰다.
이런 생각은 배신이었다. 이런 건 물어봐서도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미 서로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걸 말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친구가 아니게 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괴로운 기억은 이미 충분히 맛보지 않았던가. 알버트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라이오넬은 이미 그와 만나는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출신이 아니라 죽지 않을 실력이지.”
라이오넬이 복도 끝의 문을 열며 말했다. 안쪽은 군인들을 위한 트레이닝 룸이었다. 규모는 상당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없어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리와. 날다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내장 손상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의 트레이닝은 해둬. 체력을 붙여놓으면 전투가 장기화 됐을 때 집중력을 길게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돼. 적어도 10분 전투에 이틀간 쓰러지는 꼴은 면하게 될 거야.”
라이오넬이 사이클 핸들을 툭툭 치며 알버트를 불렀다. 알버트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라이오넬은 그런 그의 반응에 피식 웃고는 자신이 먼저 사이클에 올라탔다.
“그 몸을 보니 운동하곤 담을 쌓았겠지. 페이스를 보면서 플랜을 잡아줄 테니 일단 날 따라서 같이 해봐.”
라이오넬이 다리를 움직이자 바퀴에서 진짜 바퀴와는 다른, 작지만 나름 청량한 소리가 났다. 알버트는 신기한 모양과 소리에 이끌려 라이오넬의 곁으로 왔지만, 역시 석연치 않았다. 아직 자신은 민간인이고 앞으로도 총을 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전의 일은 흐름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그가 총을 들어 좋았던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알버트는 심장 부근을 매만졌다.
“아마 너 자신은 다시 전투에 나갈 일은 없을 테고 따라서 이런 훈련을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라이오넬이 한숨과 함께 말을 토해냈다. 알버트는 정곡을 찔려 몸을 움찔거렸다.
“저 커플링 기는 시작기체로, 현재 탈 수 있는 파일럿은 널 포함해도 다섯이 안 돼. 그렇군. 전임자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딱 다섯이 되었겠군. 하지만 그는 죽었고 한 명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한 명은 부상으로 모국 병원에 가 있지. 결국 지금 제대로 저걸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너와 나뿐이라는 거야. 네가 거부한다면 매번 억지로 태우진 않겠지만, 혹시라도 있을절체절명의 순간엔 네 의사와 상관없이 차출될 수도 있어. 너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는 것보단 그래도 싸워보기라도 하고 죽는 게 낫지 않겠어?”
“포로가 될 수도 있잖아.”
알버트가 볼멘소리를 했다. 라이오넬은 잠시 동안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포로가 될 수도 있지. 하지만 지면 우린 죽어. 그건 확실한 사실이야.”
단정적인 어조였다.
“지면 너도 죽는 거야?”
알버트가 물었다.
“제일 먼저 죽거나 그보다 좀 뒤에 죽거나 하겠지.”
라이오넬이 대답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알버트에겐 그렇지 않았다. 죽음이란 그의 주변을 항상 맴돌았고, 한번은 그에게도 찾아왔던 것이었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죽음의 서슬 퍼런 냄새는 언제나 그를 긴장시켰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알버트는 라이오넬을 그닥 믿지 않았다. 라이오넬이 자신과 친구놀이를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저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를 자신의 주치의로 삼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율배반적인 말이지만, 그가 자신을 싫어했기에 옆에 둔 것이었다. 그에게 죽는 것이라면 언제든 배반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버트는 라이오넬과의 관계를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정의해 왔다. 언제나 알버트만이 라이오넬을 좋아했다.
알버트는 라이오넬을 따라 사이클 안장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부하가 생각보다 커서 조금 힘겹긴 했지만 페달을 밟았다. 그걸 유심히 지켜보던 라이오넬이 자전거의 부하를 조정해 주자 한결 편해졌다.
마치 기숙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실연엔 역시 여자지!”
맞은 편 소파에 앉은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약간 통통한 체형에 양복을 잘 갖춰 입고 머리엔 포마드를 바른 전형적인 신사였다.
“생긴 게 멀끔하니 염문 나는 것도 순식간이더군. 잘생긴 의사선생님께서 특정 여성 환자분에게 잘 대해준다고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말이야.”
비아냥 속에는 질투가 섞여 있었다. 알버트는 웃었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웃고 있는지는 알버트 자신도 몰랐다. 그저 앞에 앉은 남자가 학교 선배였던 건 기억이 나지만 얼굴이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무례함과 무신경함엔 감사했다. 덕분에 라이오넬이 어떻게 지내는지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을 사람들은 아직도 함구하고 있었다. 알버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만이 알버트 앞에서 라이오넬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곧 그 여자랑 이탈리아로 간다더군. 이탈리아는 좋겠지!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로마, 피렌체, 맛있는 음식, 그리고 이탈리아의 태양을 품은 미인들!”
알버트는 웃었다. 앞에 앉아서 라이오넬의 이야기를 하는 이 남자는 라이오넬에 대해 단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없었다. 알버트 자신에 대해서도 그랬다. 학생시절엔 몇 마디 제대로 나눠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멋대로 찾아오는 그를 알버트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그 뒤로도 라이오넬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알버트는 거기서 진짜 라이오넬의 이야기를 골라내느라 그의 이야기를 반쯤은 흘려냈다. 특히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듣지도 않았다. 재산을 불리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고모님의 조언에 따라 의무적으로 그에게 ‘투자금’을 가끔 건네는 게 전부였다. 알아서 하겠지. 성공하면 좋겠지만 딱히 이익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알버트는 그에게 내내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그래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알버트가 그에게 한 유일한 말이었다. 진심이었다. 라이오넬의 상처가 치유되고 그것으로 그 기억을 잊을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새 살이 올라 딱지가 앉고 상처가 완전히 메워지면 그걸 핑계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걸고 다시 얼굴을 보며 웃고 장난치고 가벼운 싸움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알버트는 그가 전한 소식에 만족하고 얼마의 돈을 쥐어 내보냈다.
그날 밤은 유난히 습기를 품은 서늘한 바람이 그를 괴롭혔다. 열이 나고 속이 아팠다. 감기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계절에 맞지도 않게 벽난로를 피워봤지만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지독한 상실감과 외로움에 이불을 끌어올렸다. 다시 기침이 몇 번인가 나고 알버트는 소량의 피를 토했다. 의사는 스트레스로 위벽이 긁힌 것 같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일상에 쌓이고 널렸다. 산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위벽을 긁고 난리인지 알버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극단적인 스트레스가 될 일이라면 따로 있었다. 자신의 약혼녀를 맞이하는 연회의 전야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나, 혹은 한때 자신과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던 친구의 옛 약혼녀가 친구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가둬버린 것이나. 밤늦은 시간에 순찰을 돌고 있을 때 그녀의 방에서 라이오넬이 나오는 것을 목격했던 것도 있었다.
‘실연엔 역시 여자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동기의 말이 맴돌았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열이 오르고 눈이 지끈거렸다. 멀리서 라이오넬이 양산을 쓴 숙녀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숙녀는 라이오넬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그는 그걸 듣고선 너털웃음을 지었다. 알버트는 그것을 노려보고 있었다.
숙녀가 양산을 치우자 비비안 블랙로크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다정하게 라이오넬의 얼굴을 쓸었고 라이오넬은 그녀에게 진한 키스를 해주었다. 어느 새 그들은 군복을 입고 밀착해서 혀를 얽고 있었다.
“싫어!”
알버트가 외쳤다.
“싫어!”
알버트가 다시 외쳤다. 라이오넬이 그를 보며 웃었다. 그의 오른손엔 권총이 들려 있었다.
“너는 못해.”
라이오넬이 그를 책망했다. 알버트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훑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지.”
라이오넬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알버트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총소리가 나고 라이오넬의 왼쪽 관자놀이에서 피가 튀었다. 발포의 충격으로 그의 목이 꺾이고 몸이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알버트는 온몸이 긴장되어 숨조차 쉬지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목구멍을 뭔가가 막은 듯 꺽꺽 하는 소리를 내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쥐어짜이는 듯했다. 배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았다.
“안돼!!”
알버트는 겨우 소리 내서 절규했다.
“날 죽이기까지 했잖아! 이제 그만 날 용서해줘도 되잖아! 이제 충분하잖아! 왜 이런 걸 보여주는 거야!”
피를 토하듯 눈물을 흘렸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은 지 오래였다. 그는 라이오넬의 시신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비비안은 다시 양산을 쓰고 알버트를 바라보다가 라이오넬의 시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눈을 감기고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알버트는 분노했다. 그녀에겐 라이오넬을 만질 자격이 없었다. 애당초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몸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알버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그의 묘지를 만드는 것을 보며 비비안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알버트.”
누군가가 자신의 뺨을 툭툭 때렸다. 하지만 알버트는 가슴 속 응어리를 끌어안는 게 먼저였다. 감각은 멀었고 감정은 너무 컸다.
“야, 알버트, 일어나!”
이번엔 호되게 뺨을 때리는 바람에 알버트는 눈을 떴다. 눈앞엔 라이오넬의 얼굴이 버티고 있었다. 알버트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혼란이 느껴졌지만 뺨에서 느껴지는 얼얼함이 이쪽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알버트는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자는 틈을 타 이런 폭력적인 짓을 하다니…….”
“자면서 여자 이름을 불러대는 못난 짓을 하니까 그러지. 비비안한테 관심 있는 거야? 별로 좋은 취미는 아닌데.”
라이오넬이 물을 따라 알버트의 손에 쥐어주었다. 알버트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게 아니야.”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말 못할 꿈이라도 꿨나보지?”
“그런 취미는 없어!”
알버트는 단호히 부정했다. 혹시라도 오해를 사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그런 식의 엔딩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 오늘 테스트를 마지막으로 이 연구소와는 작별이니까. 네가 민간인으로 계속 있을지 군 소속이 될지 결정해야하는 날이기도 하고.”
라이오넬의 말에 알버트는 몸을 일으켰다. 방의 전자시계는 오전 9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더 잘 시간이지만, 라이오넬과 씨름하며 더 잘 권리를 얻기 위한 투쟁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꿈보다도 현실의 라이오넬을 보는 편이 안심이 됐다.
알버트는 자신이 왜 그런 꿈을 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일주일 전에 봤던 라이오넬과 비비안의 키스를 떠올렸다.
‘죽음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충동이 그런 거지. 나도 그녀도 지극히 동물적인 필요에 의해 가끔 그런 걸 하는 거야. 애정이 있어서 만나고 있는 건 아냐.’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가능할까? ‘몸이 가는 데 마음도 간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이라도 생긴다면? 알버트는 머리가 지끈거려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2주 동안 알버트는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하나는 브라디온과 룩시온의 커플링만이라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는 점이었다. 훈련도 없이 곧바로 투입되어 커플링에 성공한 케이스는 오직 자신밖에 없었다. 일전에 라이오넬이 이야기를 하긴 했었지만 정말로 그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알버트였다. 그 점은 그도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군인이 된다 하더라도 임시 파일럿 취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도 있었다. 현재 병원에서 재활치료 중인 루이스 대위가 얼마 후 이곳으로 배치된다는 소식과, 그렇게 되면 곧바로 자리를 내주고 예비 파일럿으로 전환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쉽게 됐네요. 게이부부처럼 딱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이었는데 자리를 뺏기게 돼서.”
전신을 남색으로 도색한 전용기를 정비하던 니나가 약간의 비아냥과 서운함을 섞어 말했었다. 알버트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아직도 싸울지 말지에 대한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라이오넬과 연결되지 않았을 때의 그는 여전히 총이라면 질색이었고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이 세계에도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라이오넬은 그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대단한 유명인인 모양이었다. 연구소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영국 굴지의 군수기업 윌프레드 사의 경영을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회장, 흔히 말하는 재벌 후계자였던 듯했다. 이 연구소와도 깊은 인연으로, 그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을 때 커플링 시스템의 초창기 연구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고 했다. 결국 미국의 거대자본에 밀렸지만 지금도 만만찮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이 연구는 여기서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 피닉스 제도의 연구소는 말하자면 2호점이었다. 원래 남반구에서 시스템을 개발하던 연구소는 모종의 이유로 해체된 듯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 속해있던 멤버의 대부분이 죽었고, 연구소 자체도 파괴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거기서 상당수의 연구원들은 기밀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정부기관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이탈을 시도했던 파일럿들도 전부 처단되었다고 한다. 기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지금은 아무도 이곳에서 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꿈이었다.
아마도 총체적인 불안이 한데 뭉쳐 꿈의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알버트는샤워기를 잠갔다. 타월을 집어 머리를 털고 바깥으로 나갔다.
“조길리아 공화국은 어떤 곳이야?”
병동으로 향하는 회랑을 걸으며 알버트가 물었다. 여느 때처럼 앞서 걷던 라이오넬이 걸음을 멈췄다. 같이 걸음을 멈추자 회랑 밖에 있던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운 공기가 몸에 감겨들었다. 찌를 듯한 햇빛은 건물과 사물에 부딪치고도 기세가 죽지 않아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라이오넬의 고개가 알버트 쪽으로 살짝 돌아오나 싶더니 다시 정면의 화랑 끝을 향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과거 러시아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곳이야. 오랜 기간 공산주의를 표방하다가 뒤늦게 자본주의에 뛰어든 나라지.”
그는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경쟁자가 적을 때 미리 많은 것을 챙겨놓은 쪽이 유리한 게 인지상정이야. 광활한 대지와 결코 적지 않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석유사업 이외에는 딱히 이렇다 내세울만한 산업이 없었어. 자본은 석유를 다루는 최상위층으로 집중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대와는 달리 자본주의로의 전환 이후 훨씬 심한 박탈감에 시달려야 했어. 물론, 살기는 이전보다 좋아졌지만 말이야.”
알버트는 과거 자신이 알던 러시아 제국을 떠올렸다. 그는 라이오넬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의 러시아도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래서 또다시 독재자가 나타났어. 그들은 과거로의 회귀를 기치로 중국과도 손을 잡는 척하다가 아예 집어삼켜버렸지. 여기저기 반항의 움직임이 나타나자, 그들은 나라 전체를 군대로 만들어버렸어. 엉망진창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그쪽으로 가지마.”
라이오넬이 말했다. 호흡이 거의 섞이지 않은 단단한 말투였다.
“그냥 싸우는 대상을 알고 싶었을 뿐이야.”
알버트는 우물거렸다. 사실이었다. 여기 있던 2주 내내 사람들은 ‘조길리아는 적’이라는 말은 했지만, 정작 그 조길리아란 나라가 어떤 곳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둘은 앞으로도 연구소에 남아있을 리티시어 박사와 이별의 인사를 하고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습하고 뜨뜻한 바람이 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하늘에서 태양이 섬을 노려보고 있었다. 뜨겁게 달궈진 활주로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그곳을 지나 연구소를 한 바퀴 돌며 연구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테스트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일찌감치 찾아와 나가자고 했던 이유가 이것인가 싶어 알버트는 내심 혀를 찼다.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알버트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더운 땡볕 아래를 더 걷기 싫어서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본 사람들에게만 인사를 하면 안 되겠냐고 했으나 라이오넬은 부득부득 그를 끌고 다녔다.
“인사를 해놓지 않으면 후회할 사람은 너야.”
파일럿은 연구자와 기술자, 의료관계인의 신세를 많이 지게 된다. 관계를 잘 만들어둬서 나쁠 게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군인이 되겠다고 말한 적도 없었는데 그는 열성적으로 알버트를 돌봐주었다.
“우린 C구역에서 못 나오는 것 아니었어?”
알버트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라이오넬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은 예외야. 감시자의 근신이 풀리는 날이거든.”
이 사람 좋아하는 녀석은 근신이 풀리면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타입의 인간이었던가. 저쪽의 라이오넬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찾아간 사람들은 모두 라이오넬을 알아보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알버트는 혹시 라이오넬이 자신에게 인기를 과시하기 위해 데리고 다니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인사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점심 식사를 끝내자 이제는 섬에서의 마지막 테스트와 짐을 싸서 시그너스 호에 선적하는 일이 남았다. 알버트는 그늘에 앉아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몸을 늘어뜨렸다. 테스트고 뭐고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왜 하필 떠나기 직전에 연구소는 테스트 스케줄을 잡았단 말인가.
“갑자기 수치가 떨어지니까 그렇지.”
라이오넬이 그의 앞에 앉아 책망하듯 말했다. 알버트는 ‘어차피 루이스가 있는데, 뭐.’하고 삐죽거리고 싶었지만 그만뒀다. 생각해보면 그도 피해자였다. 커플링 수치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떨어지는 바람에 라이오넬도 함께 테스트를 받아야만 했다. 애당초 그 테스트란 건 알버트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얼마나 남았어?”
“40분.”
“왜 이런 애매한 시간대를 잡은 거야?”
“그야, 식당을 한꺼번에 쓰면 복잡하니까 군인과 연구원의 식사시간을 분리해놨기 때문이지.”
즉, 그들의 점심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테스트란 얘기였다. 알버트는 쥐고 있던 물컵을 내리고 바다를 바라봤다.
반짝이는 수면은 고요했다. 바다의 바람이 불어와 체온을 식혀주자, 알버트는 다시 꿈이 생각났다. 그리고 라이오넬과 자신 사이에 놓인 것을 생각했다. 여기엔 아직 알버트의 배신은 없었다. 하지만 비비안 블랙로크는 있었다. 언제든 배신의 고리를 잡아당길 수 있도록 함정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그 고리를 잡아당기는 것이 자신이 될지 이쪽 세계의 알버트가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알버트는 라이오넬에게 이쪽 알버트의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 이야기는 물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묻는 순간 자신을 부정당하고 말 것 같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갈까?”
라이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버트 역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곤 정신없이 격납고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정신없이 울리고 기술자들이 뛰어다니며 고함을 쳐댔다. 군인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눈 깜짝할 새에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철컹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십 수 대의 밸리언서들이 격납고 입구에 진열되었다.
“밸리언서 부대, 온 포지션!”
“에어포스 부대, 온 포지션!”
“요격시스템 준비 완료.”
“브라디온, 온 포지션!”
순간 줄지어 있던 밸리언서들의 머리가 그들의 꽁지로 향했다. 줄 끄트머리에서 브라디온이 손을 흔들었다.
“근신 중 아니었습니까?”
니나가 물었다.
“근신은 어제까지였으니까. 복귀 명령은 없었지만.”
“룩시온은 어디로 갔어?”
“파일럿 슈트를 못 입고 있어서 일단 두고 왔어. 군인도 아니잖아.”
알버트가 이곳에 오고 나서 파일럿 슈트를 얼추 다섯 번은 입었다. 그렇게 입기 까다로운 옷은 아니었다. 다만 생소할 뿐이었다. 라이오넬은 알버트가 그 옷을 입는 데 15분이나 걸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의 규모는 밸리언서 6기. 작은 규모입니다. 후진은 보이지 않습니다. 룩시온과 브라디온을 제외한 밸리언서 부대, 출격허가가 떨어졌습니다. 밸리언서 부대 출격 스탠바이.”
“밸리언서 부대 출격 스탠바이.”
전 밸리언서 조종사들의 시선이 격납고 출구로 고정되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선두에 있던 기체가 출발하기 위해 반쯤 자세를 웅크리고 격납고 해치 앞의 병사가 막 흔들기 위해 라이트를 높이 들었을 때였다.
“잠깐만요! 전방 11시 방향에서 고에너지 반응! 넥터 라이플로 추정!”
오퍼레이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실드 전개! 활주로 사용이 일부 제한됩니다!”
투명한 에너지의 막이 건물 중심부에 제한적으로 생겼다. 활주로 바깥으로 두꺼운 철제 방어벽이 몇 겹이나 솟아올라 연구소를 둘러쌌다. 그러나 곧 직선을 그린 눈부신 붉은 빛이 활주로의 철제 방어벽을 녹여 부수고 에너지 막의 하단부를 찢었다. 조준을 잘못 한 것인지 건물에 정통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연구소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무리 넥토르븀을 사용한 무기라고는 하나 밸리언서 전용 라이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고출력이었다.
라이오넬이 타고 있는 브라디온의 화면 구석에 긴급 회선이 열리고 비비안의 얼굴이 나타났다.
“미안하지만 브라디온도 같이 나가줘야겠어. 이번엔 절대로 부수지 마!”
라이오넬은 혀를 찼다. 어차피 저 넥터 라이플―포(砲)라고 부르는 게 나을 위력의―에 한 대 스치기라도 한다면 브라디온과 함께 라이오넬도 함께 증발할 터였다. 브라디온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절대 그럴 일은 만들지 않을 예정이었다. 라이오넬은 밸리언서 부대의 선두로 나서며 몸을 긴장시켰다.
알버트는 마지막 파츠를 입기 위해 악전고투 하고 있었다. 옆에는 라이오넬이 먼저 달려나가며 붙여놓은 어린 병사 하나가 그런 알버트를 보고 있었다. 무장은 하고 있었지만 무기를 꺼내들고 있지는 않았다.
알버트는 영 심기가 불편했다. 아까 라이오넬이 뛰기에, 그리고 사이렌이 주는 어떤 급박한 느낌 때문에 자신도 엎어놓고 뛰었지만, 생각해보면 군인도 아닌 알버트가 그 사이렌에 맞춰 뛸 의무는 없었다. 라이오넬에게 반쯤 군인처럼 훈련을 받는 통에 더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는 같이 뛰어줬음에도 옷을 빨리 입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박정하게 내버려두고 간 라이오넬을 내심 원망했다.
알버트는 옷 입는 것을 마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하필 적은 이 타이밍에 찾아온 걸까. 자신들이 떠난 다음에 찾아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해선 안 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꿨던 꿈이 계속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그때 갑자기 창으로 엄청난 빛이 덮쳐들었다. 마치 마른천둥과 같은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로 진동이 울렸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철제 파티션이 끽끽대며 울어댔고 서 있던 병사는 중심을 잡지 못해 파티션에 머리를 부딪치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알버트는 이를 악 물고 의자를 붙잡고 견뎠다.
진동이 끝나고 알버트는 자극으로 인한 기침을 해댔다. 천장에서 먼지가 흘러내리고 바깥에선 캐비닛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자 병사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허리에선 단말기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알버트는 병사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알버트가 단말기의 버튼들 중 하나를 누르자 화면에 비비안의 얼굴이 나왔다.
“왜 당신이 곧바로 받는 거죠? 아니, 어차피 당신이 필요한 거니까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알버트, 당신이 다시 한 번 기체를 타줘야겠어요.”
비비안은 빠르게 말했다. 배경으로 오퍼레이터들의 소리가 어지러이 섞여드는 것으로 봐서 함교 쪽은 난리가 난 것 같았다.
“저쪽에서 고출력 넥터 라이플을 사용했어요. 저걸 제대로 막을 수 있는 건 지금 현재는 룩시온과 브라디온밖에 없어요. 각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커플링 상태로 아주 가까이 날면서 실드를 겹쳐야만 가능하죠. 할 수 있겠어요?”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수 있냐?’라는 건 사실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진동이 적의 공격에 의한 것이었음이 확실해지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서늘한 불안감이 등을 훑었다. 생각하기 싫은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알버트는 전용 탈의실의 문을 열고 복도를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이 섬에서 넥토르븀을 제대로 사용하는 기계는 단 셋뿐이었다. 브라디온, 룩시온, 그리고 연합군의 신형 전함 시그너스 호. 나머지는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하거나 아직도 전기나 석유에 의존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커플링 중인 브라디온과 룩시온은 밸리언서 주제에 건방지게 고밀도 넥터 실드를 사용할 수 있다고 라이오넬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알버트는 비비안이 말해준 것을 비비안의 의도보다는 훨씬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룩시온의 콕핏에 앉자 회선으로 오퍼레이터의 얼굴이 나타났다.
“교전지역은 11시 방향 4.8km 상공. 먼저 교전지역으로 간 브라디온과 만나 커플링을 해주십시오. 시그너스 호가 출발하는 4분 20초 후까지만 버텨주시면 됩니다. 그 후에 상황을 봐서 수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전해주는 지시사항의 목적은 알버트의 목적과도 얼추 비슷했다.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속을 위해 활주로 앞에 서서 사병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앞에 서 있던 방어벽이 사라지고 사병이 라이트를 들어 흔들기 시작했다. 알버트는 룩시온을 발진시켰다.
가격은 아직 미정이며, 마감이 될지 불투명하여 예약은 받지 않습니다만, 와주실 분들이 혹시 계실까 하여... ㅠㅠ
버디 컴플렉스 AU입니다.
버디컴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됐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기본적인 건 버디컴에서 가져왔지만 기실 버디컴과는 상당히 다릅니다..ㅠㅠㅠㅠ
그리고 아래는 샘플입니다.
그랬다.
그랬었다.
알버트는 납득했다. 라이오넬이 떨리는 총구를 잡아 자신의 이마에 들이댔을 때 알버트는 여태까지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둠속에서 솟아나, 비어있던 부분을 완벽하게 채워 시끄럽게 삐걱대던 의문의 조각들을 꽉 채웠다. 그리고 막 완성된 감정은 라이오넬의 이마를 향한 총구와 결합해 목구멍으로 치달아 올라 나지막이 입가로 흩어졌다. 시야는 형편없이 흐려졌다. "네가 아니면 안 돼!"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던 말이 가슴을 때렸다. 뒤늦게 찾아온 자각이 손가락으로 흘러 그 끄트머리에서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진의를 깨닫게 되는 자신의 아둔함을 원망했다.
저택 안은 적막이 감싸고 있었다. 두 사람이 죽었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도 몰랐다. 라이오넬은 유력한 살인용의자였다. 알버트 역시 그 사실에 겁먹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라이오넬이 그가 가진 총을 빼앗으려 하자 알버트는 저항했다. 라이오넬이 덤벼들어 결국 총을 빼앗아 갈 때까지 실수로라도 발사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했다. 웃기게도 이런 상황에서 그는 라이오넬이 다치거나 죽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둘 중 하나가 죽는다면 차라리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버트는 라이오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 라이오넬이 그 권리를 행사하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가. 하지만 라이오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것을 원망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총은 이제 라이오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알버트는 이제 침착한 얼굴로 창문을 등지고 라이오넬과 마주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지금 서로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알버트, 너는 날 죽이지 못해.”
라이오넬이 조용히 그를 문책했다. 알버트는 수긍했다. 라이오넬은 희미하게 쓴웃음을 웃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지.”
총구가 불을 뿜었다. 총탄은 가슴을 뚫고 유리창에 작은 구멍을 내며 저택 밖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귀가 먹먹해지는 파열음과 거의 동시에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조각나는 유리창과 함께 알버트의 몸이 유리창 밖으로 기울어졌다. 방 안을 가득 메우고 반사되는 총성의 메아리가 그의 몸을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짙은 남색 하늘이 알버트의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숫자의 하얀 눈들이 마치 별처럼 하늘에 떠 있었다. 아직은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다만 온몸이 자극에 집중하느라 숨을 쉴 수 없었다. 눈보다 몸의 낙하속도가 빨라 뒤통수와 등으로 아래에 있던 눈이 달라붙었다.
이명이 총소리를 먹어치우며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가늘고 긴 신경 긁는 소리 속에서 눈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늘어졌다. 알버트는 아래로 끌어당겨지며 검푸른 하늘이 주변으로 퍼져가는 것을 보았다. 눈은 마치 별의 운동을 그린 것처럼 하얀 선을 그리며 멀어지다가 곧 어둠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아직 낙하 중이었다.
그러다가 이제 이명도 어둠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알버트는 자신의 죽음을 납득했다.
희미한 이명이 울렸다. 어둠 속 지평선에서 강렬한 빛의 띠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른함과 가려움을 닮은 경미한 근육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멀어졌다가 다시 밀려왔다. 눈꺼풀과 등줄기가 근지러웠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들이 이명 사이로 드문드문 섞여들었다. 빛은 몇 번이나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그 세기를 강화해나갔다. 소리는 왕왕 울리며 점점 커졌다. 알버트는 결국 엷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누구라도 좋으니 11시 방향 커버해줘요!”
“못 해! 현재 다수와 전투 중! 떨쳐낼 수 없어!”
“제3격납고 피탄!”
어딘가에서 급박한 목소리들이 울렸다. 전투 중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버트는 멍하니 심장 부근을 만져봤다. 상처는 흔적도 없었고 전혀 아프지도 않았다. 죽은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것인가? 죽은 자들의 세계에 와 있다면 그들은 왜 전쟁 같은 것을 묘사하는가? 알버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주변을 살펴봤다.
알버트는 그가 전혀 상상해본 적이 없는 곳에 갇혀 있었다. 주변은 금속과 유리 이중으로 된 유선형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넓이는 저택의 화장실 정도로 좁았다. 천장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낮았다.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는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의자로, 몸을 감싸는 재질이나 안락함은 여태까지 쓰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좌석 양 옆으로는 레버 같은 것이 배치되어 있었다. 시야 아래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면과 버튼들이 몇 개가 있었다. 알버트는 마치 자동차 운전석을 고급화하여 금속 상자 안에 처박아놓은 것에 운 나쁘게 자신이 갇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배리어 78% 손실! 요격 시스템 46%가 작동불능입니다!”
“룩시온은 아예 그른 거야? 룩시온이든 브라디온이든 뭐든 빨리 내보내줘!”
“브라디온 출격이 허가되었습니다. 브라디온 기 출격 스탠바이.”
스피커는 아직도 멋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알버트는 멍하니 그것을 듣고 있었다. 분명 영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현실감을 가질 수 없었다. 브라디온 기 파일럿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는 말이다.
“브라디온 기 스탠바이.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알버트는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죽은 자의 세계라면 그가 있어선 안 됐다. 그가 왜 여기 있는가?
“……라이오넬?”
무심결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 이름에 반응하듯 그가 몸을 싣고 있는 곳에 생명이 깃들기 시작했다. 위잉 하는 팬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금속벽으로 닫혀있던 시야각이 선명하게 열렸다. 자동차 시동을 걸었을 때처럼 미세한 진동이 좌석을 통해 전해지고 유리벽과 화면 위로 글씨와 함께 기묘한 기호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직후 시야에 나타난 글씨들이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해갔다. 스크린을 통해 열린 시야로 부서진 건물 잔해와 거기에 깔려 죽은 시신 몇 구가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엔 분명한 현실감을 갖고 있었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만들어놓은 신형기였다. 파일럿 육성에도 엄청난 돈이 들어갔다. 그러나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제2격납고를 공격당하며 룩시온과 파일럿을 잃었다. 브라디온은 룩시온과 짝을 이뤄 제 기능을 발휘하는 기체였다. 그들은 이제 신형기의 성능에 기대어 볼 수도 없었다. 함장대리 비비안 블랙로크는 손가락으로 오른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럴 때 돌파구를 찾아내는 것이 함장의 역할이었다.
“어, 룩시온이……!”
그때 오퍼레이터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룩시온이 어떻다는 거지?”
날카롭게 물어보자 오퍼레이터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룩시온이…… 작동합니다.”
“뭐?!”
먼저 반응한 것은 옆 데스크에서 브라디온의 상태를 체크하던 페트리시아 박사였다.
“매칭지수,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계속 올라갑니다. 엄청난 수치입니다, 박사님! 90을 넘었어요!”
페트리시아는 아연해졌다. 브라디온 기의 파일럿인 라이오넬과 이 정도의 수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이 연구소에 없었다. 모든 매칭 테스트는 기록되어 있었고 그녀의 꼼꼼한 검사를 거쳤다. 대체 누가 이 정도의 수치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불가능했다.
“룩시온 기! 지금 앉아있는 사람은 누구죠? 이름과 소속, 관등성명을 대세요!”
그녀는 윽박질렀다. 그러나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기체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녀는 초조해졌다.
“이봐요, 거기! 대답해요! 누구길래 거기 앉아 있는 거죠? 허가된 사람 이외엔 탑승해선 안 되는 것 알고 있나요? 얼른 거기서 나와요! 경우에 따라선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도 있어요!”
“이봐요!”
비비안은 박사가 대답 없는 룩시온 기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을 냉철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박사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살아남아서 이곳을 빠져나가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알버트”
드디어 룩시온 기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의외로 소년처럼 맑고 깨끗했지만 어딘지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남작입니다.”
그의 대답에 페트리시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비비안은 낮은 신음을 내며 턱을 쓸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현재 이곳 연구소 소속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빨리 그곳에서 나와요! 빨리!”
패트리시아가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이 기체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반응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커플링 하도록 해요.”
비비안이 말했다.
“예?”
“여기서 모두 죽으면 신형기고 자시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거예요, 패트리시아 중위. 커플링을 시키세요.”
그녀는 패트리시아에게 계급을 들이대며 명령했다. 패트리시아는 납득하지 못하는 듯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 망설였지만, 결국 라이오넬과 알버트에게로 회선을 열었다.
사실 정말 자기만족용으로 소량만 찍어서 낼 예정이므로, 혹시라도 사실 분들은 수량조사를 위해 '산다'라는 의사만 적어주셨으면 합니다.
가늠할 수 없이 깊은 어둠이 거기 있었다. 그 주변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거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어둠을 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구나 어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리면 바로 거기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 스쳐간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한다. 어쩌면 그저 보고 싶지 않을 뿐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을 등지고 은결은 손가락에 힘을 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몇 발자국만 뒷걸음 치면 빛의 세계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쳐버릴까. 수 개월에 걸쳐 무디게 만들어 왔던 두려움이 다시금 날카롭게 벼려지는 감각에 전율했다.
"으아악!"
동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손에 힘을 주자 뭔가가 눌린 듯 손으로 부르르 소리와 함께 진동이 전해졌다. 그 진동에 놀라 손에 쥐고 있던 것마저 바닥으로 내던져버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비명소리는 아마 두 시 방향인 것 같았다. 후방일지도 모른다. 적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전방이고 후방이고 나발이고. 어둠은 항상 무서웠다. 하지만 이번 어둠은 특별했다. 여전히 정체불명이었지만 여태까지와는 다른 근본적인 공포심을 자극했다. 비명이 난 곳으로 달려가 덜미를 잡아채는 임기응변조차 불가능했다. 바깥은 저렇게나 밝고 선명한데 왜 이곳은 이렇게나 어두운 걸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방금 자신이 쥐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잡히기에 잡았을 뿐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은결은 사건의 시작점을 더듬어갔다.
"평소 받는 분이 아니어서 깜짝 놀랐어요. 잘못 찾아왔나 싶어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여자가 애교섞인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조달사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서류철을 내밀었다.
"이야,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가 물품 들여오는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내가 여기 있을 걸 그랬지 말입니다."
머리를 반묶음 한 장신의 남자가 서류철을 받으며 붙임성 좋게 대꾸를 했다. 아찔한 형광핑크 머리에 선글라스, 일부러인지 아닌지 제복 상의는 어디로 가고 적당히 걸친 티셔츠 한 장에 손목엔 가죽팔찌까지 차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한지 여사원은 그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도장은 여기 있잖아. 반짝이, 네 사인 하면 안된다고."
"아아..."
은결이 도장을 내밀자 깜빡했다는 듯 건네받아 인주가 묻은 부분을 호호 불었다. 건강한 갈색빛이 도는 손이 (인) 자리에 착실히 도장을 찍었다.
"이거 저기 옮기면 되나? 무거워 보이는데."
"아뇨, 이거랑 이건 그쪽이 아니라 지하로... 밀개 빌려드릴까요?"
"아니... 이거랑 그거면 우리 둘이서 옮기면 되겠네요."
"그치만 이거 무거운데..."
반짝이 '괜찮지?' 하는 미소로 은결을 돌아봤다. 은결로서는 그가 원래 이런 타입인지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여성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싶은 심리는 모든 남자 공통인지라 은결도 다소 어깨에 힘이 들어간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남자 둘이서 이정도는 들어야죠. 하지만 담당자가 지하 쪽은 전혀 가르쳐주질 않아서 어디로 가져가야할지 모르겠네요. 안내만 해주세요."
은결이 말하자 그녀는 미소지었다.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예, 그러죠."
오후 3시 반. 따스한 햇살이 복도의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 사이사이로 끼어든 벽돌기둥이 복도 바닥에 강렬한 대비를 만들었다. 이상하게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어딘가에선 그린벨트 깊숙한 곳답게 불길한 꿩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뿐만이 아니었다. 고라니가 불길하게 풀 뜯어먹는 소리와 어딘가에서 멧돼지가 불길하게 산길을 달리는 소리와 어딘가의 토끼가 무청을 뜯어먹는 불길한 소리가 암울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은결은 그보다도 조금 더 가깝고 현실적인 사실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반짝의 제복, 정확히는 바지, 조금 더 정확히는 흔히 '밑위'라 불리는 허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이어지는 부분의 각도와 주름이 정상적인 바지와는 다르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허리춤이 시계 반대방향으로 약 9도 가량 틀어져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
"어이, 반짝. 바지 돌아갔어."
"어어, 지급받은 바지가 커서... 귀찮아서 그냥 입고 나왔는데."
"벨트는 어쩌고?"
"늦잠 잤거든."
뭐 그런 데 신경쓰냐는 투로 반짝이 말했다. 그러나 은결은 신경이 쓰였다. 등뒤에서 여사원이 몰래 웃고 있는 게 느껴졌다. 큰일이었다. 양손으로 들고 있는 묵직한 박스에는 금속으로 된 뭔가가 들어있는 게 분명했다. 그나마 덜 무거운 것을 들었음에도 벌써 팔이 상당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빛의 속도로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불안감이 그늘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멀리서 꿩 울고 고라니가 풀 뜯고 멧돼지가 숲속을 달리고 토끼가 당근을 파먹는 불길한 BGM이 울렸다. 그리고 새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창공을 날았다.
"아." 잠시 비둘기에 정신을 빼앗긴 반짝의 걸음이 반 박자 어긋났다.
"아!" 그 덕에 뒤에서 따라오던 여사원이 그의 뒤꿈치를 밟고 말았다. 그리고 반짝은 훈련받은 사람답게 상당히 빠른 속도로 회피활동을 했다. 움직임 자체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만 했다.
"아..." 그러나 예정된 참상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장신에 체형 좋고 얼굴 생김새도 호남형인, 어느모로 보나 멀쩡했던 남자가, 사고였다고는 해도, 묘령의 여인 앞에서 보여버리고 만 것이다. 팬티를. 허리춤의 단추도 지퍼도 멀쩡히 잠긴 채 바지가 엉덩이에 반쯤 걸쳐져서. 하필 오늘 밑위길이가 짧은 셔츠를 입어서. 양손 가득 박스를 들고 있어 다리로 어떻게든 수습하려다가 그나마 붙어있던 단추와 지퍼까지 고장내버려서.
당황한 은결이 반짝과 여사원 사이에 서서 박스는 창틀과 한 손으로 들고 자기 외투의 벨트를 풀어 반짝에게 넘겼다.
"저기, 아가씨, 이거 사고인 건 알고 있죠? 우린 결코 뭔가를 하려던 게... 여튼 이건 결단코 사고에 불과해요."
벨트 차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그는 말했다. 여사원은 뒤로 돈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웃는 걸 참느라 필사적인 건지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속옷을 보고 상처받고 있는 건지. 은결은 전자에 전재산을 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 웃고 있는 거다, 저거.
"저기... 지하에 가면 대충 알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이만... 가보는 게..."
여사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살풋 다시 돌아보는데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예, 아마 그러시는 게..."
은결은 차마 그녀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복도 구석으로 돌렸다. 그 순간 일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소름 돋는 감각에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럼 저는 가볼게요."
여사원의 수줍은 가르마가 보였다. 시선은 착각이었던 걸까. 은결도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서 가세요."
반짝이 딱딱하게 굳은 미소로 그녀를 배웅하고 있었다. 양손은 교차하여 고장난 지퍼 사이를 가리고 있었다. 멀어지는 여사원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반짝도 울고 은결도 울었다. 사나이구나, 오 반짝. 창가로 비치는 햇볕에 지퍼 사이로 팬티가 반짝였다.
반짝의 팬티노출사건은 가끔 소소하게 회자되는 정도로 지나갔다. 아무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동료를 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을 뿐.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사건 며칠 지나지 않아 또다시 발생했다.
그것은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였다. 그날은 별다른 일이 없어 햇볕 아래서 어슬러대고 있었다. 날은 맑음. 바람은 적당했다.
"어? 저게 뭐지?"
민하준이 건물 뒤의 그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가?"
"저거."
은결이 하준이 가리키는 방향을 봤지만 그저 평범한 건물의 그늘일 뿐이었다. 벽돌로 쌓은 다소 고풍스러운 외벽과 바닥의 잡초 정도가 전부였다. 복도에 누군가 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뭐라 하기도 전에 문답무용, 라임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는가 싶더니 어느 새 하준이 건물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었다.
"우왓, 야...!"
하는 사이에 하준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위치는 벌써 건물 그늘 안이었다. 과연 민하준이라고 감탄해야할지 과연 민하준이라고 한탄해야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말이나 하고 달려가든가."
은결이 다가오자 하준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곤 갑자기 쭈구리고 앉아 손으로 주변을 더듬기 시작했다.
"왜... 왜? 왜!"
"이 근처에서 뭔가가 내 바짓단을 잡았어. 분명히 뭔가가 잡았어."
"뭐?!"
같이 있었던 은결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뭔가가 있었다면 큰일이다. 필사적으로 은결도 주변을 살폈다. 그렇가 한동안 살펴보다가 무심결에 시선이 머문 곳에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진의 바지가, 하필 엉덩이 부분이 봉제선을 따라 튿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면 소재의 이질적인 뭔가가 보였다. 은결은 무심결에 바지의 벌어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왓...! 왜 꼬집어?!"
"아니... 바지 양쪽이 너무 애절하게 헤어져 있어서 보다 못해 옷핀 노릇이라도 해줄까 하고... 나도 모르게 그만..."
공부를 위해 잠시 써봤던 것. 아주 조금 쓰고 말았음. 왜냐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귀찮았으니까. 하지만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오리지널.
김보문은 허겁지겁 관내로 들어왔다. 그는 씩씩거리며 자신의 감문위 친구를 찾았다. 그는 이를 갈았다. 관내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원망스러웠던 기억이 없었다. 그는 이리저리 들쑤시며 감문위 소속 이정휘 중랑장 본 적 없느냐고 물어댔다. 그러다가 오히려 금오위 소속의 사관학교 동기에게 허리를 붙잡히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그는 날카로운 눈매를 빛내며 물었지만 보문은 그리 쉽게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일단 어깨로 숨을 쉬던 것을 조금 진정시킨 후에야 비로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반가움의 포옹을 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윤식!"
"그래, 어딜 그렇게 가는 거야?"
집안이 그렇게 좋지 못 했기 때문에 같은 나이에도 아직 산원에 그친 윤식의 얼굴을 보문은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너 정휘 못 봤냐?"
"정휘? 정휘는 뭐 기강 잡는다고 내내 싸돌아다니니 찾아다니기보단 얌전히 관저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단 걸 알잖아."
윤식이 말했다. 보문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솔직히 성가셨다. 중랑장(현대의 대령에 해당되는 관직) 씩이나 되면서 졸병들 기강이나 잡겠다고 돌아다닌다니,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보문은 한숨을 한 번 더 쉬며 윤식의 팔을 잡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너도 왔냐? 통지서."
"뭐? 무슨 통지서?"
"토지수용 통지서!"
보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윤식은 그의 목소리가 신경 쓰였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의 금오위 졸병들이 어떻게 볼지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보문은 그의 그런 부분까지 신경써줄 수가 없었다. 윤식은 일단 보문의 팔을 잡고 끌었다.
"가세, 일단 정휘 나으리의 사무실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지."
보문은 윤식의 이끌림에 따라 휘적휘적 걸어갔다. 하필 이런 날 햇볕도 따가웠다.
가죽 소파에 푹 기대어 앉아 보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병이 갖다준 물을 마셨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 햇볕 아래를 뛰어다녔다. 그늘에서 찬물을 마시자 그나마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며 느긋함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입고 있는 군복에 통기성을 기대할 순 없었지만 에어컨이 돌아가는 사무실 안은 그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줬다. 윤식은 그런 그를 맞은편에 앉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야, 미안. 많이 찾았다며!"
문이 열리며 중간보다 약간 큰 듯한 느낌을 주는 장교가 들어왔다. 군인답지 않은 흰 얼굴에 영민한 검은 눈동자를 빛내는 남자였다. 앞에 앉은 두 사람과 동기라기엔 많이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정휘!!"
보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연 군인답게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정휘는 안으로 들어오며 보문에게 손을 흔들었다. 보문은 약간의 원망과 반가움이 섞인 움직임으로 다시 소파에 앉았다.
"어떻게 복계(국경지역)에서 여기까지 왔어? 오래 걸렸을 텐데. 오자마자 어머님도 뵙지 않고 여기부터 온 이유는 또 뭐야? 설마 내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라든가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
정휘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보문은 짧게 자른 머리를 거친 손길로 흩뜨린 다음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윤식과 정휘는 그 봉투의 궤적을 눈길로만 쫓았다. 겉면엔 "토지수용위원회"의 이름이 파란 잉크로 적혀져 있었다. 보기엔 이상한 점이 없었다. 윤식은 의아한 눈으로 보문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단 거야?"
보문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김보문 님의 아래 토지가 관공서 건설 부지로 선정되어 수용 예정지가 되었습니다. 동의 여부를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보문은 봉투 하나를 더 꺼냈다. 토지수용위원회의 재결이 있었습니다. 공시지가에 따라 김보문 님의 땅에 손실보상금 1억 8천만 원이 지급될 예정이며...
윤식은 봉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가 어쨌단 거냐는 눈빛에 보문 대신 정휘가 대답했다.
"이건 이상한데? 날짜가 법으로 지정된 만큼 지나지도 않았고 도착 주소도 자네가 일하는 근무지임에도 자네에게 충분한 시간도 고지도 주지 않았어. 절차 위반으로 취소할 수 있겠는걸. 그보다도 땅은 언제 산거야? 군인전으로는 모자랐던 거야? 모자랄 만은 하지만..."
"내가 언제 땅 보고 다니겠어! 아무리 지금 전시가 아니라곤 하지만 사소한 분쟁은 끊이질 않아! 변변한 휴가 내기도 힘든 마당에 땅은 무슨 얼어죽을 땅? 나한테 땅이 어디 있어?!"
보문이 소리쳤다.
"그럼 이건 뭐야?"
"바로 그 군인전이지!!"
보문이 탁자를 내려쳤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윤식의 앞에 놓여있던 물컵에서 물이 넘쳐 윤식의 무릎을 적셨을 정도였다. 하지만 윤식도 보문도 그런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놀라움에 입을 쩍 벌리고 보문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군인전? 그거 일단 반쯤 국가 귀속인데다 완전히 네 명의도 아니잖아. 월급 대신 월세로 먹고 살라고 줘놓고 그걸 수용하겠다니, 무슨 해괴한 소리야?"
"그러니까!!"
보문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그는 머리를 쥐어싸며 괴로워했다. 토지 수용이란 국가 공익 사업을 위해 필요한 땅을 동의를 얻어 토지의 주인에게 일정의 가격을 치르고 받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민간 기업이 행정청의 위임을 받아 행정주체로서 그 사무를 행하며, 원만한 수용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조정기간을 둔 다음 토지수용위원회의 재결사항에 따라 적당가의 대가를 치른 다음 토지주의 동의와 관계없이 강제로 수용하고 그 대가로 손실보상을 한다.
"그거 받은 지 얼마나 됐어?"
정휘가 물었다.
"장난해? 오늘 아침에 사인하고 받았어!"
"그럼 됐네. 쟁송 걸지."
정휘가 말하자 보문은 고개를 저었다.
"소송이고 나발이고 난 이거 직접 따져야겠어! 요즘 같은 땐 국가사업에 집행정지 걸어줄지도 의문이고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 같으니까! 이건 정말 말도 안돼!"
보문의 말에 정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왜 찾은 거야?"
정휘가 말하자 보문은 다시 한 번 통지서를 보라며 손짓했다. 윤식과 정휘가 다시 한 장씩 통지서를 들고 살펴보았다. 윤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다른 이상한 건 못 느끼겠는데?"
그러나 정휘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문에게 보냈다.
"이런 걸 찾아내고 제법인데?"
윤식은 다시 통지서로 시선을 돌렸다. 면밀하게 살펴보던 그도 한 순간 탄성을 흘렸다.
"직인이 병부(현대의 국방부 등) 직인이야."
보문이 말하자 셋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분명 이건 지역관청이나 토지수용위원회에서 관장해야할 일이었다. 병부의 직인이 찍힐 이유도 없었고 찍혀서도 안 될 일이었다. 셋 사이에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보문이 정휘와 윤식을 둘러보며 말했다.
“따지긴 내가 따지겠지만 혹시 뭔가 있는지 조사 좀 해줄 수 있겠어?”
보문의 질문에 둘은 잠시 생각하는 척 했다. 그러나 윤식부터 너털웃음을 지었다.
“재미있군! 죄수 하나를 탈주시키면 여기저기 뒤지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지. 부하들이 높으신 나으리들의 추태와 조우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원망 좀 듣겠구만!”
300여 평의 관내 한 구석엔 분명 감옥이 있었다. 마치 스톰윈드의 지하감옥 같은 것이었다.
“우리 부대 산원 중 하나가 대단한 소식통이니 물어보면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지. 나도 한 번 힘써 보겠네.”
정휘 역시 가담의 뜻을 나타냈다. 보문은 씩 웃었다. 마치 셋이서 뭉쳐 돌아다니며 사고를 치던 학창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좋아, 나는 일단 병부상서와 판병부사를 찾아뵙겠네. 자네들만 믿겠어!”
그들은 셋이서 주먹을 한 번 부딪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참고로 감문위는 고려시대 국왕친위대, 금오위는 치안 담당으로 현대에선 경찰과 비슷한데, 궁에선 죄수들을 감시하기도 했습니다.
스터디에서 조금 썼으나 그 뒤로 못 썼던 것. 언젠가 써야지. 리퀘 받았던 건데 튀면 안되졍.
머리 위로 붉은 하늘이 흘렀다. 구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지는 해를 향해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바람은 거친 손길로 잘 씻지 못해 꾀죄죄해진 그의 금발을 날카롭게 헤치고 그의 깃발도 세차게 흔들었다. 그 손길에는 진득한 피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엔 압도적으로 숫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귀족들도 반 이상이 자신에게 찬동했고 군사는 상대의 세 배 가량을 확보한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 경험으로 치자면 상대는 전쟁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애초부터 질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뒤엔 이제 겨우 오백여 명 만이 남아 있었다. 기병은 넷이었다. 그는 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들의 결전지였던 구릉, 정상을 갓 넘어온 그 지점에 깊은 구덩이들이 파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너무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 죽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알면서도 뒤에서 밀려오는 무리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려 떨어져 고통스럽고 느린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맞은 편에선 삼만 명의 적들이, 뒤에선 오백 명의 아군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 없이 그의 결정을 촉구했다. 도망치다가 죽을 것인가 싸우다가 죽을 것인가. 그는 적들 사이에서 적의 수장을 찾았다. 눈에 띄는 백마를 타고 날카롭게 빛나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조소하며 계속 쳐다보았다. 멀었지만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분명히 평소처럼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바람은 맞바람이었다. 후들거리는 자신의 다리와는 달리 타고 있는 말은 의연했다. 그는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무슨 결말이 나든 오늘로 끝이 날 터였다. 그는 구덩이를 돌아 좌측으로 이동했다. 그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적군들의 얼굴 방향이 바뀌는 것은 썩 웃기는 광경이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과가 마찬가지라면 무엇을 선택할지는 자명했다. 그는 흔들리는 손으로 칼을 뽑았다.
그는 막사 안으로 연행되었다. 어둑해진 바깥에 익숙해졌던 터라 등잔불에 눈이 부셔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양 옆구리에 팔을 집어넣고 있던 병사들이 그의 무릎 뒤를 차고 어깨를 눌렀다. 그는 자동적으로 무릎을 꿇으며 황망히 맞은 편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맞은 편의 남자는 검은 목제 테이블 앞에 서서 아예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검은 빛에 가까운 머리를 잘 넘겨 묶고 신경질적일 정도로 깨끗하게 손질된 푸른 코트를 입고 있었다. 손가락이 길고 하얀 손은 잘 포장된 무언가를 여유롭게 풀고 있었다. 막사 안은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갖추고있는 듯 했고-이 막사의 짐만 다섯 수레는 족히 나올 것 같았다- 기둥과 테이블에 매달린 등잔이 소리 없이 타고 있었다.
"놔드려."
남자는 손에 있는 물건을 잠시 보곤 다시 포장을 여미며 스마트하고 매끄러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병사들은 즉시 그를 놓아주었다. 기사는 잠시 푸른색 코트의 남자의 행동을 주시하더니 그의 작은 고갯짓 한 번에 병사들을 끌고 나가버렸다. 푸른색 코트를 입은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꿇어앉아 있던 남자는 목구멍으로 뭔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래에서 포장지에 핏자국이 점점이 묻어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는 걸음을 옮겨 구석에 놓여 있던 꽃이 담긴 그릇을 가져오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뱃속에서 온갖 것들이 회오리치며 뭔가를 자꾸만 떠올리게 했고 몇 시간 전, 실은 며칠 전인지 몇달 전부터 체념하고 있었던 분노와 오기를 일깨우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리가 묶여있지 않았더라면, 손이 묶여있지 않았더라면 지금 기회에 천연덕스런 얼굴로 꽃을 만지는 저 남자를 죽여버렸을 것이다.
"마르셨군요, 드와일리 형님."
푸른 코트의 남자가 말했다. 꿇어앉아 있던 남자-드와일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튀어나올 듯 부릅 뜬 눈이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푸른 코트의 남자는 시선을 다시 꽃으로 돌려 꽃의 모양새를 다듬었다.
"마르셨군요, 형님."
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날카로우리만치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드와일리는 고개를 돌렸다.
"...... 고맙군요, 헨리님."
비꼬는 말이 겨우 나왔지만 푸른 코트의 남자는 만족한 듯 했다. 그는 꽃그릇에 익힌 고기를 한 덩이 올려 드와일리 앞에 놓았다. 드와일리는 의아한 듯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드세요."
그는 정중히 명령했다. 드와일리는 선뜻 뜻이 와 닿지 않아 그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손이 묶여 있는데 무슨 수로?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네가 감히!!"
드와일리는 반쯤 일어서며 소리쳤다.
"어떻게 네가 감히 나한테......!!"
그러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헨리의 오른손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얼굴이 돌아가기가 무섭게 고개를 되돌려 노려보자 또다시 후려쳤다. 헨리는 그가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옆으로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차고 때렸다. 간간이 터져나오는 비명 소리에도 차가운 논동자로 할일을 하듯 그렇게 때렸다. 끝내 드와일리가 땅바닥에 누워 피를 토할 때가 되어서야 그는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거친 숨을 내쉬며 피를 뱉어 내는 그에게 꽃그릇에 담겨 있던 고기를 조금 썰어 입에 넣어 주었다. 드와일리는 그것을 뱉았지만 또다시 입속으로 고기가 들어왔다. 그는 다시 뱉았다. 그러나 또 들어왔다. 그 반복은 고기가 다 소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헨리가 고기를 가지러 일어나자 드와일리는 거칠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지?"
"......"
"왜냐고."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헨리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왔다. 그는 의자 등걸이에 손을 얹은 채 드와일리의 앞으로 옮길지 말지를 고민하는 듯 공중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어쩌면 드와일리의 질문의 의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는 의자를 들고 드와일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땅바닥에 의자 놓는 메마른 소리가 났다.
"이 꽃을 기억하십니까?"
헨리가 턱짓으로 접시 안에 담긴 꽃을 가리켰다. 색깔은 여러가지였지만 그건 분명히 아네모네였다. 하지만 드와일리로서는 그 의도를 읽을 수 없었다. 대답이 없자 헨리는 그에게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래서 형님은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기억 못 하시는 겁니다."
말같잖은 소리에 실소가 피식 튀어나왔다. 드와일리는 피투성이가 된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그래서 형님들을 싸그리 죽여버렸나보지?"
"전 형님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장난해?"
"아뇨."
"네 명령이지만 네 부하가 죽였으니 네가 죽인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건가?"
"아뇨."
"날 죽이고도 그렇게 말할 셈이야?"
"아뇨, 전 형님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헨리는 의자에 앉았다. 그는 한숨을 쉬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얼굴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바람 소리가 났다. 차가운 공기중에 천막 펄럭이는 소리가 들었고 그것은 그림자를 크게 흔들며 가장자리에 걸어놓은 가문의 상징이며 헨리의 다소 중성적인 느낌이 남은 얼굴에 어린 그림자를 일변시켰다. 마치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 된 마냥 낯선 느낌이 들었다. 새로이 덧쓰인 그림자는 이전보다는 조금 인간적이고 피로한 느낌이 있었다. 드와일리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고 무표정했다. 하지만 드와일리는 그제야 그가 화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절제된 억양으로 그는 말했다. 드와일리는 처음 그를 봤을 때 얼굴이 하얗다는 것 이외엔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단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외엔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시 그는 검술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드와일리는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시선을 바닥으로 던졌다. 헨리는 그저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별로 기억하고 계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며 쓰레기통을 응시했다. 거기엔 분명 누군가의 신체 한 부분이 들어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파란 눈동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형님들만 옹호하지 마시고 제 얘기도 좀 들어주시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몸은 아직도 이야기를 망설이고 있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고민하고 있었다. 드와일리는 땅에 머리를 기댄 채 그의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는 체 했다. 헨리는 드와일리의 얼굴을 잠시 보더니 이윽고 중얼거리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붉은 가죽 신발을 신은 소년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곳은 위압적이고 무거운 곳으로, 여태까지 본 적도 없을 정도로 높은 천장과 어떻게 운반했을지 감이 오지 않을만큼 무거워 보이는 차가운 돌을 쌓아 만든 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건물의 투박하고 창문이 작아 채광이 좋진 않았지만 좌우로 정열된 갑옷들도 발에 밟히는 푹신하고 화려한 카펫도 그를 움츠러들게 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죽었다.소년은 그 죽음을 실감하기도 전에 자신의 '진짜' 아버지가 있다는 곳으로 끌려 왔다. 하녀들은 그를 목욕통에 담갔다가 생전 입어본 적도 없는 좋고 불편한 옷을 입혔다. 그에겐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아들이라는 소년에겐 잘 쓸어넘긴 머리칼도 약간 굽이 들어간 불편한 신발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뭐가 '진짜' 아버지란 말인가. 엿이나 먹으라지.
그의 어머니는 미혼모였다. 그녀는 아직 미모의 절정기가 채 오기도 전에 귀하신 분에게 '진상'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임신을 했고, 자신은 왕의 씨를 잉태했노라고 주장했다. 그러며 어머니는 자신에게 왕자라는둥 품위가 있어야 한다는둥 하며 여러가지 이상한 소릴 늘어놓으며 '헨리'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놓았다. 하지만 거리에서 그의 이름은 받침을 뺀 '헤리'였다. 그것은 어렸을 적 머물던 고향에서도 그랬고 어머니가 결국은 새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후 도성으로 이사한 후에도 그랬다. 그렇게 생긴 다정한 아버지 역시 어머니가 없을 땐 그렇게 불렀다. 애들과 공을 찰 때도 그랬고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그랬다. 아버지는 그를 왕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보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머니의 뜻에 맞춰서 성문 앞에 가 소년이 왕의 씨라는 것을 주장하는 척 하다가 어머니를 달래서 오곤 했다.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줬고 나무로 가짜 칼을 만들어 주었다. 소년은 그 칼로 동네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놀다 오면 어머니는 따뜻한 스튜를 내려놓았다. 공부할 때 발 시리지 말라며 특별히 두툼한 양말을 지어주기도 했다. 언제나 맵시가 있어야 한다며 없는 살림에 옷차림과 구두만은 언제나 깔금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소년에게 잘 대해 주었고 그리고 그들은 죽었다. '진짜' 아버지란 것이 생겼고 홀 안에선 양쪽으로 늘어선 낯선 어른들이 무서운 눈매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 끝엔 풍채가 좋고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가 비스듬히 앉아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파란 눈은 냉정하고 잔인해 보였다. 소년은 주눅이 들어 눈썹에 난 점을 긁었고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는 그 광경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이제야 너를 찾게 되었구나. 어서 이리로 가까이 오너라."
소년은 그가 왕임을 깨달았고 꼼짝도 않으려는 발을 질질 끌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소년의 엉덩이를 툭툭 치더니 냄새 나는 입으로 말했다.
"짐은 네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신분의 차이가 있어서 데려올 수 없었으나 이제라도 이렇게 너라도 데려올 수 있어서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구나."
그리고 그는 계속 말했다.
"너 역시 어미를 잃어 얼마나 마음이 상했느냐. 짐이 대신 복수를 해주었다."
그는 옥좌 옆에 놓여있던 나무 상자를 열어 뭔가를 꺼냈다. 종종 보던 문지기의 머리였다. 그의 얼굴은 가죽이 축 쳐진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놀라 숨을 삼켰다.
"잘 봐라, 이건 너의 원수니라. 내가 너의 원수를 갚아 주었다. 앞으로는 네가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은 머리를 다시 집어넣고 나무궤짝을 닫았다. 소년은 무서움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왕은 너털 웃음을 지었다.
"이제 너의 마음이 이 일로 인해 흐려질 일은 없을 것이다. 가서 쉬거라. 사람을 보내 네가 여기서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이 할테니 그리 알거라."
왕이 그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소년은 옥좌에서 내려왔다. 거기엔 400개의 매서운 눈들이 있었다. 그가 왜 거기 있는지를 묻는 눈이었다. 소년은 작은 몸을 떨었다. 그것은 그가 이 왕궁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웅장하리만치 거대한 문을 열고 나오자 키가 크고 얼굴이 길쭉한 남자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조용히 읍을 하고 있었다. 소년이 그를 보자 그는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왕자님의 시중을 담당한 할로런이라고 합니다."
소년은 당황해서 같이 머리를 숙이려 했으나 할로런이 그 틈을 주지 않고 얼른 금방 상체를 일으키는 바람에 엉거주춤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할로런은 싱긋 웃었다.
"이왕 불편한 옷을 입으신 김에 왕궁의 식구들을 만나보심이 좋을 듯 합니다. 어설프게 예를 익혀 실수하느니 아예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가서 실수하는 게 쉽게 이해 받을 수 있겠지요. 왕비님부터 뵙도록 합시다."
그는 소년에게 판단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소년은 어리둥절한 채 또다른 크고 화려한 문 앞으로 이끌려 왔고, 그 앞에서 방 주인의 허가를 기다리며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들었다. 왕비에게만 머리를 아주 조금만 숙일 것.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말 것. 대답은 최대한 간략하게 할 것.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고 도무지 움직일 것 같지 않은 육중한 문이 열렸다. 거기엔 신기하리만치 얼굴이 하얀 귀부인과 턱선이 뚜렷하고 잘 생긴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비스듬히 마주 보고 있었다. 분명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소년은 자신이 방해꾼일 것이라 생각했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그는 무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첫 인사조차 찾지 못해 헤매고 있자 왕비 쪽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네가 '헨리'냐."
그녀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우아하게 물었다. 헨리는 연극에서조차 그렇게 우아한 말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예."
헨리는 "예"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무식하게 들려본 적이 없었다. 이런 짧은 말에서조차 교육 수준과 인품의 차이가 드러난다. 우아함은 상대를 압도하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통감했다.
멀리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내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라라아는 숨이 막힐 듯이 미노프스키 입자가 짙게 뿌려진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나아갔다. 소리는 저기서 나고 있었다.
-지직... 나를 ...지직... 구나, 샤아!
미노프스키 입자의 영향 하에서 통신기기들이 늘 그렇듯이 목소리엔 심한 노이즈가 껴 있었다. 마치 고장 난 구식 라디오의 소리 같았다. 그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라라아는 그의 소리에 공명하는 부서진 전투기의 잔해를 밀어내며 전진했다. 잔해는 무중력 속을 부유하며 고요히 멀어졌다. 라라아 역시 미끄러지듯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나아갔다.
-나를 속였...지직, 샤아!
가까이 다가가자 그건 하나의 작은 빛의 덩어리였다. 라라아는 그것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것은 라라아의 기척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주변은 다시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오로지 우주의 먼지와 어둠만이 그들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 있었군요. 당신을 찾아 지구까지 다녀왔어요. 설마 사이드3의 권역에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라라아가 말했다. 희미하게 미소 지은 듯도 했다. 작은 빛은 손 안에서 침묵했다. 라라아는 딱히 대답을 구하려 물은 건 아닌 듯했다. 라라아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빛덩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빛은 당황한 듯 빛의 세기를 강하게 했다 약하게 했다 하며 손바닥 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내부에서부터 잡힌 빛은 라라아의 권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빛은 경련하듯 빠른 속도로 움직였지만 라라아는 놓아주지 않았다.
"무슨 짓이야?!"
빛은 소리쳤지만 라라아는 그저 웃음을 띠며 "당신이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라라아는 빛 속으로 자신의 팔뚝까지 집어넣었고, 그 팔이 빛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 빛으로부터 희미하게 빛나는 손이 함께 미끄러져 나오기 시작했다.
라라아의 다갈색 손이 잡아끌고 있는 손은 하얀 면장갑을 낀 긴 손가락이었다. 고생을 모르는 부자 남자의 손이었다. 붉은 바탕에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인 소맷부리가 함께 딸려나오고 있었다. 진녹색의 소매가 라라아의 인도에 의해 끌려 나오고 그 뒤로 동그란 남자의 머리가 빛으로부터 나왔다. 라라아는 힘을 주어 그의 형태를 한 번에 빛으로부터 빼내었다. 빛은 발끝에서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는 라라아가 이끌어낸 방향으로 부유하며 라라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인도계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넌 누구지?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이건 대체..."
빛으로부터 나온 남자는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확인했다. 그저 의식체로서 흘러다니던 그의 존재가 다시금 육체를 갖고 재구성 되었다. 옷은 그가 죽을 때 입고 있었던 지온 공국 키시리아 소장 소속 지구군 사령관 장교복 그대로였다. 그는 조금 긴 앞머리를 매만졌다. 스타일링까지 완벽하게 죽기 직전을 재현하고 있는 듯했다. 위화감은 없었다. 그는 그것에 위화감을 느꼈다.
"넌 누구지?"
그는 다시 한 번 라라아에게 물었다. 라라아는 그를 만족스럽게 봤다.
"난 라라아 슨이에요. 당신은 가르마 자비죠.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라라아의 먼 곳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매혹하는 눈빛이었다. 가르마는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꼬았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부탁할 일이 뭐지?"
가르마가 묻자 라라아가 그의 귀에 속삭여 줬다. '대령님을 구해주세요.' 대령이면 누구 대령? 가르마가 묻자 라라아는 웃었다. 아시면서. 가르마는 그 미소가 썩 불편했다. 어딘지 사람을 위압하는 힘이 있는 미소였다.
"그렇네요. 당신이 살아있을 땐 아직 소령이었으니 대령님이라고 말하면 모를 수밖에 없겠군요."
라라아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가르마는 등줄기에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는 열이 나고 속이 꼬이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고 스치는 옷의 감촉마저 에이는 듯 아프게 느껴졌다. 악다문 어금니에선 부러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라라아는 그가 뿜어내는 증오의 열기를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나더러... 그 녀석을 구해달라고 하는 건가?"
가르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양 팔은 서로를 끌어안은 지 오래다. 몸이 발하는 열 때문에 오히려 오한이 들었다. 죽기 직전, 미노프스키 입자의 영향으로 노이즈가 껴있는 상태에서도 또렷이 들렸던 그 목소리, 웃음소리가 귓전을 왕래했다. 모함 가우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했던 그 말이. 넌 좋은 친구였지만 네 아버지가 나빴던 거야. 겨우 그런 이유로 자신을 죽였던 남자가 있었다. 자신은 그로인해 죽으면서까지 공을 세우지 못 했다. 가우는 목마를 앞에 두고 허무히 폭파되었다. 이 목숨의 결말은 개죽음이었다. 가르마는 식은땀을 흘렸다. 얼마나 오랫동안이었을까, 그는 오로지 그 일만을 생각해 왔다.
"예, 가르마 소령님. 샤아 대령님을 구해주세요. 그러기 위한 조치니까요."
라라아는 태연히 말했다.
"지금부터 당신은 과거로 가게 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대령님을 구하게 될 거예요. 그렇네요. 그래서 대령님이 당신을 죽이지 않게 된다면 당신은 다시 삶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내가 그를 죽이면 어떻게 되지?"
라라아는 그를 보며 다시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가르마는 발끈했다.
"내가 못할 것 같아?! 죽일 수 있어! 나도 샤아를 죽일 수 있어! 아니, 반드시 죽이고 말 거야!"
그는 다소 극적인 움직임을 섞어 라라아에게 선언했다. 하지만 어쩐지 얕보는 듯한 시선은 변함이 없었다.
"당신은 지금 한시적인 생명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거기서 죽으면 다시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 당신밖에 없어요, 가르마 자비."
라라아는 말했다. 가르마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아니, 난 그녀석을 죽일 거야! 죽여서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할 거야! 간도 쓸개도 내줄 마냥 굴다가 뒤에서 쏴버릴 거야! 듣고 있어?! 난 그를 죽일 거야!!
그러나 별안간 시계가 차단되고 아까보다도 더 새까만, 먹먹한 어둠이 주위를 집어삼켰다. 소리는 어둠에 잡아먹히고 그가 지르는 소리 같은 건 스스로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가르마는 악을 썼다. 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스스로가 어둠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을 때까지 계속해서 외쳤다. 그리고 목구멍 안쪽까지 무거운 침묵으로 들어차게 됐을 때 소리 지르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목이 아파왔다. 아픔은 진짜 육체를 얻었다는 증거였다. 가르마는 죽어있었을 때의 견딜 수 없이 시렸던 감각을 떠올렸다. 그의 영혼은 새로 얻은 육체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적응하고 있었다. 이제 시리거나 추운 느낌은 없고 오히려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뱃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뜨겁고 눈두덩은 더욱 뜨거웠다. 눈물이 꿇어앉은 허벅지와 위에 올린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망연히 내려다 보았다. 그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멍하니 어둠 속에서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앉아 있었다.